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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 공동성명의 평화개념과 남북(북남)관계의 변화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9.19 공동성명에 나오는 평화개념의 두 가지 의미2. 9.19 공동성명과 6.15 공동선언의 관계3. 남북(북남)관계 정상화의 한계와 진보정당의 집권
1. 9.19 공동성명에 나오는 평화개념의 두 가지 의미
북(조선)과 미국은 9.19 공동성명에서 “한(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 전반의 평화와 안정이라는 대의를 위해” 조미관계 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하기로 공약하였다. 한 마디로, 그것은 평화공존체제를 세우자는 공약이다. 평화공존체제란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항구적인 평화공존을 보장하는 정치군사체제를 말한다.
평화공존체제를 논할 때 주의할 문제는, 인권이나 민주주의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평화라는 개념도 정치이념에 따라 상반적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9.19 공동성명에 나오는 평화개념을 미국의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한(조선)반도의 분단체제를 평화적으로 유지관리함으로써 이른바 ‘미국의 평화(Pax Americana)’를 한(조선)반도에 실현하는 것을 뜻한다. 분단체제의 평화적 유지 및 관리란 중국과 러시아가 남(한국)과 국교를 수립한 것에 상응하여 미국과 일본이 북(조선)과 국교를 수립하는 교차승인구도를 완성하는 방식으로 추진되는 것이다. 한(조선)반도 분단체제를 평화적으로 유지관리하는 ‘미국의 평화’란 분단체제를 영구화하는 제국주의분할지배정책을 교차승인구도 속에서 추진하는 영구분단의 평화이며, 그 정책에 한(조선)민족이 순응할 것을 강요하는 식민주의적 평화이다.
그와 달리, 9.19 공동성명에 나오는 평화개념을 한(조선)민족의 자주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사회주의적 의미와 민족주체적 의미가 보인다.
첫째, 평화의 사회주의적 의미란, 북(조선)이 대미관계에서 사회주의적 평화공존을 실현하는 것을 뜻한다. 북(조선)의 대미정책에서 볼 때, 사회주의국가가 제국주의국가와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은 사회주의국가가 반제투쟁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적 평화공존이란 사회주의국가가 자기를 노리는 제국주의국가의 봉쇄침략정책을 무력화하여 사회주의체제를 수호하고 사회주의체제의 자주적 발전을 보장하는 것을 뜻한다. 사회주의적 평화공존은 사회주의국가가 상호자주권존중, 상호불가침, 상호내정불간섭의 원칙을 정치적 무기로 하여 제국주의국가에 맞서 싸우는 반제투쟁의 한 형태이다. 제국주의국가의 대외정책에서 기본은 자주권존중이 아니라 봉쇄와 예속이고, 불가침이 아니라 침략전쟁전략이며, 내정불간섭이 아니라 지배주의적 간섭이므로, 사회주의적 평화공존은 봉쇄와 예속, 침략전쟁, 내정간섭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조선)의 사회주의적 평화공존정책에서 보면, 한(조선)반도에서 평화공존체제를 세우는 정치과업을 밀고 나갈수록 미국의 제국주의정책은 무력화되며 마비된다. 1988년 11월 7일 북(조선)이 ‘조선반도의 평화보장 4대 원칙과 포괄적인 평화방안’을 발표한 때로부터 17년이 되는 올해에 9.19 공동성명을 채택한 것은, 북(조선)이 미국의 제국주의정책을 무력화하기 위해 끈질기게 싸워온 끝에 마침내 자기의 사회주의적 평화공존정책을 관철시킨 정치적 승리인 것이다.
둘째, 평화의 민족주체적 의미란 남북(북남)이 화해협력하면서 평화통일정책을 추진하는 전략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뜻한다. 남북(북남)의 화해협력이란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것이고, 남북(북남) 정부의 평화통일정책 추진이란 나라의 통일을 평화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한(조선)민족에게 평화는 남북(북남)의 평화공존이 아니라 나라의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정치적 과정이자 방도인 것이다.
평화라는 정치개념이 남북(북남)의 평화공존으로 인식되지 않는 까닭은, 남북(북남)의 평화공존이 분단체제를 평화적으로 유지관리하는 ‘미국의 평화’와 상통하며, 분단체제를 영구화하려는 제국주의분할지배정책에 들어맞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한(조선)민족에게 평화란, 남북(북남)의 평화공존이 아니라 나라의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 또는 방도로서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남북(북남)의 평화공존을 국가관계론으로 개념화한 것이 남(한국)정부가 말하는 국가연합방안이다.
셋째, 한(조선)반도의 평화라는 정치개념이 가리키는 사회주의적 의미와 민족주체적 의미는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사회주의적 평화공존정책과 민족주체적 평화통일정책이 일치함을 뜻한다. 자주적 평화통일이라는 말은 반제자주와 평화통일의 일치성을 표현한다.
2. 9.19 공동성명과 6.15 공동선언의 관계
일반적으로, 반제자주화는 제국주의전쟁도발에 무력으로 대응하는 비평화적 방도로 실현될 수도 있고, 사회주의적 평화공존정책을 밀고 나감으로써 제국주의정책을 무력화하는 평화적 방도로 실현될 수도 있다.
그런데 위에서 지적한 대로, 한(조선)민족이 수행하는 반제자주화의 과업은 나라를 통일하는 과업과 떼어놓을 수 없게 연관되어있다. 반제자주화과업과 나라의 통일과업이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은, 분단국가에서 수행되는 반제자주화과업이 지닌 특수성이다.
만일 한(조선)민족의 반제자주화가 제국주의전쟁도발에 무력으로 대응하는 비평화적 방도로 실현되는 정세가 조성될 경우, 나라의 통일을 평화적으로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반제자주화과업과 나라의 통일과업을 비평화적으로 수행한 역사적 경험은 베트남민족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한(조선)민족은 베트남민족의 경우와 달리 나라의 통일을 평화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 북(조선)이 6자회담에서 사회주의적 평화공존정책을 관철하여 9.19 공동성명을 내옴으로써, 나라의 통일이 평화적으로 실현되는 길이 열린 것이다.
북(조선)이 미국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사회주의적 평화공존정책을 밀고 나가는 것은, 남북(북남)이 화해협력하면서 평화통일로 나아가는 정세발전을 힘있게 떠밀어준다. 9.19 공동성명이 이행됨에 따라 남북(북남)은 그 성명의 이행속도를 앞질러 화해협력관계를 한층 강화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남북(북남)의 화해협력이 아니라 남북(북남)관계의 정상화이다. 남북(북남)관계의 정상화란 남(한국)정부와 북(조선)정부의 관계가 정상화되는 것을 뜻한다. 남북(북남)관계의 정상화란 민족 내부에 존재하는 두 정부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므로, 국가 대 국가의 관계인 조미관계가 정상화되어 평화공존체제를 세우는 것과 달리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것이다. 조미관계의 정상화는 평화공존체제로 나아가지만, 남북(북남)관계의 정상화는 평화통일로 나아간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9.19 공동성명은 6자회담에서 채택된 것이므로 남북(북남)관계를 정상화하는 정치과업에 대해서 공약하지 않았고 또 그렇게 할 까닭도 없었다. 남북(북남)의 두 정부가 제국주의내정간섭을 배격하고 정치협상으로 남북(북남)관계의 정상화 문제를 푸는 것은 당연하다.
남북(북남)의 두 정부가 관계를 정상화하고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원칙과 방향은 6.15 공동선언에 밝혀져 있다. 6.15 공동선언에 따라 두 정부가 관계를 정상화하면 그것이 곧 평화통일정책을 함께 추진하는 것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6.15 공동선언의 원칙과 방향에 따라 실현되는 나라의 평화통일은, 9.19 공동성명의 공약에 따라 사회주의적 평화공존이 실현되는 정세발전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촉성될 것으로 예상된다. 9.19 공동성명의 이행은 6.15 공동선언의 실현을 촉성한다.
3. 남북(북남)관계 정상화의 한계와 진보정당의 집권
그런데 남북(북남)관계를 정상화하는 과정에 놓인 걸림돌은, 남북(북남)의 두 정부가 6.15 공동성명 제1항에 밝혀진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는 원칙을 서로 달리 해석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나라의 통일방안을 합의하기 위한 논의조차 아직 시작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북(조선)정부는 자주적으로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는 원칙을 반제자주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는 데 반하여, 남(한국)정부는 한미동맹의 강화와 자주적 통일의 실현이 상호모순되지 않는다고 해석하고 있다. 북(조선)의 반제자주적 관점에서는, 미국의 제국주의핵우산을 거둬치우고 주한미국군을 내쫓는 것을 자주적으로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는 원칙문제로 본다. 그러나 남(한국)정부는 남(한국)이 미국의 제국주의핵우산 아래서 ‘안전보장’을 받는다고 보면서, 주한미국군 철군을 반대한다.
남북(북남)의 두 정부가 이처럼 상반되는 견해를 가진 까닭은 그 두 정부의 근본이 상반되기 때문이다. 북(조선)정부는 제국주의체제를 배격하는 자주성을 자기의 근본으로 하는 반면, 남(한국)정부는 제국주의체제에 편입된 예속성을 자기의 근본으로 한다.
자주성 대 예속성으로 상반되는 두 정부의 근본은, 남북(북남)의 화해협력이 더 진척되더라도 남북(북남)정부의 관계는 정상화되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화해협력이 평화통일의 실현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도중에서 멈출 것임을 예고한다.
화해협력단계를 평화통일단계까지 밀고 나가려면 남(한국)정부가 자주성을 근본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로 바뀌어야 한다. 그 새로운 정부는, 민주노동당 강령의 표현을 빌리면, “노동자와 민중 주체의 자주적 민주정부”이다.
남(한국)에 자주적 민주정부가 들어서야, 남북(북남)의 화해협력이 도중에 멈추지 않고 계속 진전되어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우는 높은 단계까지 나아가게 되며, 또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환상의 미궁에 빠뜨리는 형식적 민주개혁을 넘어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치적, 경제적 요구를 실현하는 실질적 민주개혁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것이 진보정당의 견지에서 바라보는 평화통일의 역사적 전망이다.
남(한국)에서 낡은 정부가 새로운 정부로 바뀌는 것은 진보정당의 집권과업이 완수되는 것을 뜻한다. 진보정당의 집권은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한다.
첫째, 진보정당이 집권하여 민족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것은, 9.19 공동성명에 밝혀진 조미관계의 정상화가 이행됨에 따라 주한미국군이 철군하는 정세급변에 발맞춰 남(한국)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반제자주화과업이 완수되며, 남(한국)의 자주적 민주정부와 북(조선)의 사회주의정부가 합작한 자주적 통일정부가 세워진다는 뜻이다. 미국이 제국주의분할지배정책을 강요하는 한(조선)반도에서는 반제자주화과업만이 아니라 그 과업과 더불어 나라의 통일과업이 상호연동적으로 추진되어야 민족적 자주성이 완성에 이르게 된다.
둘째, 진보정당이 집권하여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것은, 진보정치를 실시하는 민주주의, 곧 진보적 민주주의를 완성한다는 뜻이다.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는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의 계급적 자주성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통해서 실현된다. 진보적 민주주의란, 민주노동당 강령의 표현을 빌리면,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발전”시킨 새로운 민주주의이다. 물론 진보적 민주주의는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기는 하나, 그것의 완성에는 이르지 못한다.
민주노동당은 창당선언문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노동자, 농민, 빈민, 중소상공인의 정당이며, 여성, 청년, 학생, 진보적 지식인의 정당”으로 규정하였다. 통일전선정당의 정체성을 천명한 것이다.
남(한국)의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 전체가 진보정당의 깃발 아래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단결하여 통일전선을 일으켜 세우고 그 전선운동에 힘을 집중하는 것이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지름길이다. (2005년 10월 3일 작성)
* 이 글은 2005년 10월 10일 서울에서 발행된 민주노동당 기관지 ‘주간 진보정치’ 제244호에 발표한 것이다.
6자회담 중단 이후의 한(조선)반도 정세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실패로 끝난 조잡한 심리전2. 북(조선)의 격파전술은 핵폭발실험이 아니다3. 전략목표는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다4. 반세기 전의 정전담판이 철군담판으로 5. 한(조선)민족의 자주화를 촉성하는 두 개의 정치일정
1. 실패로 끝난 조잡한 심리전
6자회담이 일년 넘도록 다시 열리지 못한 가운데 극도의 불안에 빠져들고 있는 쪽은 미국이다. 요즈음 워싱턴에서는 이러다가 6자회담이 정말 물 건너가 버리는 게 아닌가 하고 심각하게 우려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다.
불안에 빠진 부시 정부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북(조선)을 위협하는 심리전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북(조선)이 곧 핵폭발실험을 실시할 것이라는 소문을 미국 언론에 퍼뜨리는 것이 저들이 펼치는 심리전인데, 거기서 저들이 노리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북(조선)이 혹시 핵폭발실험을 강행하지나 않을까 생각하면서 경계하고 있는 중국의 여론을 자극함으로써 조·중 관계를 벌어지게 만들고 6자회담 구도에서 북(조선)을 고립시키려는 술책이다. 여기에는 북(조선)의 핵폭발실험을 매우 경계하고 있는 또 다른 상대인 남(한국) 정부를 자극하여 민족내부의 관계를 악화시키려는 술책도 들어있다.
핵폭발실험에 관하여 여론을 조작하는 심리전이 노리는 다른 하나는, 핵폭발실험이 다가온 것처럼 소문을 퍼뜨리는 것과 더불어 핵공갈로 북(조선)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해보려는 것이다. 만일 북(조선)이 핵폭발실험을 강행하기만 하면 미국은 선제핵공격으로 모든 것을 잿더미로 날려버리는 무시무시한 핵전쟁을 준비하였다는 식의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부시 정부의 심리전은 그들이 노리는 효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원래 심리전이란 상대의 기를 꺾을 수 있을 만큼 정교하게 조직되고 강하게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인데, 부시 정부의 심리전은 조잡하기 이를 데 없다. 저들의 심리전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실패작이다. '핵문제'와 관련하여 부시 정부는 불안이 실패를 낳고, 실패가 불안을 부채질하는 악순환에 빠지고 있다. 조잡한 심리전의 역효과가 이른바 '부메랑'으로 날아와서 제 얼굴을 강타하고 있는 꼴이다.
2. 북(조선)의 격파전술은 핵폭발실험이 아니다
북(조선)은 핵폭발실험을 실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북(조선)은 중국과 남(한국)을 자극하는 어리석은 일은 절대로 벌이지 않는다. 부시 정부가 핵공갈 심리전을 벌인다고 해서 북(조선)이 겁을 집어먹고 움츠러드는 것도 아니다. 북(조선)은 핵공갈 심리전에 맞서서 맹렬한 격파전술로 나오고 있다. 북(조선)의 격파전술은 미국의 여론을 자극하고, 워싱턴의 대북(조선)정책을 둘로 갈라놓음으로써 헤어나올 수 없는 혼란과 궁지에로 몰아넣으려는 것이다.
그런 격파전술에 동원되는 수단은 핵폭발실험이 아니라 핵연료봉의 재처리다. 1994년에 채택된 제네바 기본합의서를 이행하는 동안 불이 꺼져 있던 영변 핵발전소의 흑연감속로에 다시 불을 지핀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고, 이제는 흑연감속로의 불 속에서 익을 대로 익은 8천여 개의 핵연료봉을 꺼내서 거대한 냉각수조에 넣고 식힌 다음 재처리하는 공정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핵활동이 뜻하는 것은, 핵탄두를 만들 수 있는 고순도 플루토늄을 많이 생산해낸다는 것이다. 영변에서 고순도 플루토늄의 양이 늘어나는 것은, 미국의 정찰위성이 찾아내지 못하는 비밀핵무기고에 핵탄두를 더 많이 들여놓게 된다는 뜻이다. 사용한 핵연료봉에서 재처리공정을 통하여 뽑아낸 고순도 플루토늄은 커다란 양파 크기로 만들어 두 손에 들고 맞부딪쳐도 핵폭발을 일으킬 만큼 매우 강한 폭발력을 지닌 무기급 핵물질이다. 지금 영변의 거대한 냉각수조 에서는 그런 무기급 핵물질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침울한 분위기에 잠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둘러앉은 고위관리들이 영변의 냉각수조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장면을 머리 속에 상상하면서 극도의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미국이 '핵문제'를 제기하였던 때로부터 지금까지 그러했지만, 북(조선)의 격파전술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예상치를 뛰어넘는 곳에 이른다. 그 격파전술의 위력은 1994년의 제네바 기본합의서에 따라 중단되었던 영변 핵발전소 건설공사를 다시 시작하는 것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영변 핵발전소 건설공사를 다시 시작하는 것은 고순도 플루토늄을 지금보다 비할 바 없이 많이 생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자체적으로 요구되는 양보다 더 많은 고순도 플루토늄이 생산될 때, 그것이 어떻게 처리될 것인지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부시 정부가 등장하여 제네바 기본합의서를 깨버리는 바람에 함경남도 신포에 커다란 구덩이만 파놓았던 경수로 발전소 공사가 막을 내렸으므로, 북(조선)이 원래 계획대로 영변 핵발전소 건설공사를 다시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놀랍게도, 북(조선)은 이 모든 일을 남몰래 숨어서 벌이지 않는다. 가끔 외무성 대변인을 통하여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통보하여 그들을 경악과 충격에 몰아넣으면서 보란 듯이 일을 벌인다. 핵활동에 관한 북(조선)의 태도는 미국 국가정보기관들의 첩보활동이 요구되지 않을 만큼 공개적이고 그만큼 떳떳하며 자신감이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있는 몇몇 나라들은 미국의 첩보망을 피하여 국제암시장을 들락날락하면서 핵관련 장비와 기술을 사들이려고 애쓰다가 미국에게 들키는 바람에 마구 두들겨 맞고 두 손을 번쩍 들어버리는 게 흔한 일인데, 북(조선)은 그야말로 예외 중의 예외다.
외무성 대변인을 통해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통보하고 핵활동을 재개한 것이 미국을 자극할 것이고, 부시 정부가 북(조선)에 대해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를 북(조선)이 알지 못하는 게 아니다. 북(조선)은 핵활동을 재개하는 격파전술이 미국의 핵공갈 심리전을 촉발시켜 조·미 관계를 더욱 날카롭게 긴장시킬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떳떳하게 자신감을 가지고 핵활동을 재개하는 격파전술로 나오는 그런 배짱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바로 거기에 '핵문제'의 비밀이 들어있다.
3. 전략목표는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다
모든 전술에는 목표가 있는 법이다. 핵활동을 재개하는 북(조선)의 격파전술에도 목표가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북(조선)에게는 목표가 명백하고, 목표에 이르는 전략·전술적 경로가 또한 명백하게 파악되어 있으므로 그처럼 떳떳하게 자신감을 가지고 핵활동을 재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핵활동을 재개하는 전략·전술적 목표가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일이다.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핵활동을 재개하는 전술적 목표다. 그 전술적 목표는 조·미 정치회담을 다시 여는 것이다. 조·미 정치회담의 재개는 미국이 자꾸 강조하는 것처럼 6자회담의 틀 안에서도 가능하고, 미국이 말하지 않았지만 6자회담과 별도로 열어서 6자회담과 양자회담을 병행하는 것도 가능하다. 북(조선)이 6자회담 재개를 반대하면서 무턱대고 조·미 양자회담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은, 북(조선) 외무성 대변인의 발표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북(조선)이 잔뜩 궁지에 몰린 미국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긴장상태를 풀어가려면 6자회담의 틀 안에서 양자회담을 여는 방안이 더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르게 될 것으로 예견된다.
여기서 정작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문제는 6자회담과 양자회담을 병행하여 추진하느냐 별도로 추진하느냐 하는 형식이 아니라 그 회담에 담겨지는 내용이다. 특히 양자회담에서 무엇을 다루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북(조선)의 전략적 목표가 양자회담의 의제로 제시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백하게도, 북(조선)의 전략적 목표는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다. 양자회담을 요리조리 피해왔던 부시 정부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궁지에 몰아넣고, 양자회담에 끌어내는 것이 북(조선)의 전술적 목표라면, 양자회담에서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는 방도와 일정에 관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북(조선)의 전략적 목표다.
그런데 북(조선)이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라는 전략적 목표를 향하여 나간다고 하면서도 영변에서 핵활동을 재개하면서 무기급 핵물질을 생산해내는 것은 언뜻 생각하면 모순된 행동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핵활동 재개는 격파전술이고, 한(조선)반도 비핵화는 전략목표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면 그것은 전혀 모순으로 보이지 않는다.
북(조선)이 핵활동을 재개하는 격파전술을 취하는 까닭은, 그러한 초강경한 전술을 취해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를 흔들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데 반하여 북(조선)은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를 맹렬히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미국 언론에 자기의 정치적 의사를 드러낼 때마다 입버릇처럼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를 말하곤 한다. 그렇지만 그들이 말하는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는 어디까지나 북(조선)의 핵무장을 해제하는 것을 뜻한다. 자기의 핵전쟁준비태세는 그대로 두고 북(조선)의 핵무장만 해제하려는 것이 저들이 말하는 기만적인 비핵화론이다.
그와 달리, 북(조선)이 추구하는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는 미국의 기만적인 비핵화론을 마주보며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 비핵화는 미국이 북(조선)을 겨냥한 핵전쟁준비태세를 거두고 조·미 관계를 정상화하면, 북(조선)은 그것에 상응하여 핵무장을 해제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이 북(조선)을 겨냥한 핵전쟁준비태세를 거둔다는 말은, 핵전쟁 돌격대로 재편되고 있는 주한미국군을 전면적으로 철군한다는 뜻이다. 주한미국군을 그대로 놔두고 핵전쟁준비태세를 거두겠다는 것은 아이들이 들어도 웃을 거짓말이다. 주한미국군 철군이 핵전쟁준비태세 포기로 이어지고 그에 따라 조·미 두 나라는 백년숙적의 관계를 풀고 국교를 수립하는 것이다.
물론 조·미 두 나라가 국교를 수립한다고 해서 맹방관계로 들어서는 것은 아니다. 국교수립 뒤에도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구도는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북(조선)이 추구하는 비핵화는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구도까지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북(조선)에 대한 핵전쟁준비태세를 유지하면서 남(한국)을 군사적으로 지배해온 미국의 점령군을 한(조선)반도에서 영원히 몰아냄으로써 한(조선)민족의 자주성을 완성하는 것이다. 북(조선)이 말하는 한(조선)반도의 비핵화 프로그램에 담긴 정치적 의미가 한(조선)민족의 자주화에 있음은 명백하다. 북(조선)이 미국에게 일관되게 요구해오는 전략적 목표는 '미국군대는 우리 강토에서 나가라'는 구호로 표현된다.
4. 반세기 전의 정전담판이 철군담판으로
6자회담은 그것이 재개되더라도 1994년의 제네바 기본합의서를 다시 살려내지는 못한다. 1994년에 제네바에서 조·미 두 나라가 채택한 기본합의서와 같은 내용으로 된 국제협약이 6자회담에서 채택되리라고 기대하기 힘들다.
제네바 기본합의서가 규정한 한(조선)반도 비핵화 프로그램은 영변 핵시설의 동결과 조·미 관계정상화로 요약될 수 있다. 그 기본합의서에 따르면, 조·미 관계정상화로 이어지지 않는 북(조선)의 핵활동 중지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북(조선)은 조·미 관계를 정상화하는 경로에서 주한미국군이 철군하는 것에 따라서 자기의 핵활동을 단계적으로 포기해나갈 것이다. 이것은 북(조선)이 '핵문제'가 제기된 뒤로 10년이 넘도록 미국에게 일관되게 밝혀온 비핵화 프로그램의 핵심내용이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조·미 정치회담이 다시 열리는 경우 그 자리에서는 북(조선)이 말하는 한(조선)반도 비핵화의 방도와 일정을 놓고 밀고 당기는 양자협상이 벌어질 것이다. 한(조선)반도 비핵화의 방도와 일정을 놓고 밀고 당기는 정치협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철군담판이라고 할 수 있다. 조·미 두 나라 협상대표들이 주한미국군을 철군하는 문제를 놓고 밀고 당기는 담판을 벌이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비핵화 협상의 중심부에는 철군담판이 놓여있다고 말할 수 있다.
조·미 두 나라가 철군담판을 벌이게 되면, 그것은 50여 년 전에 벌어졌던 정전담판과 비교될만한 대사변이다. 오래 전에 판문점에서 열렸던 정전담판에는 군지휘관들이 나섰던 것에 비하여, 앞으로 열리게 될 철군담판에는 외교관들이 나서게 될 것이다. 정전담판에서는 전쟁을 중지하고 외국군을 철군하기 위한 정치회담을 열자고 합의하였는데, 앞으로 벌어질 철군담판에서는 한(조선)반도에 남아있는 유일한 점령군을 철군하기 위한 담판이 벌어질 것이다. 50여 년 전에 제국주의 미국의 한(조선)반도 전쟁을 중지시켰던 정전담판은 5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남(한국)에 대한 제국주의 미국의 군사적 지배를 영원히 끝장내는 철군담판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철군담판은 열릴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철군담판을 언제까지나 회피할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들이 철군담판을 회피할수록 북(조선)의 핵무기고에는 플루토늄 핵탄두가 늘어갈 것이므로, 저들에게 남은 대안은 철군담판에 응하는 것밖에 없다.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라는 대외적 명분 뒤에서 벌이지게 될 철군담판에서는 당연히 철군협약이 체결되어야 한다. 철군협약에서는 미국이 어느 때부터 단계적으로 주한미국군을 빼내가겠다는 철군일정이 밝혀져야 한다. 바로 그 철군일정이 북(조선)이 추구하고, 한(조선)민족 전체가 요구하며, 진보적 인류가 염원하는 한(조선)반도의 비핵화일정과 일치되는 것이다.
5. 한(조선)민족의 자주화를 촉성하는 두 개의 정치일정
요즈음 조·미 정치회담의 가능성을 예고해주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첫째로 손꼽히는 것은 올해 세 단계에 걸쳐서 펼쳐지는 6.15 공동선언 실천운동의 정치일정이다.
철군담판은 남북관계가 긴장에서 화해로 돌아서고, 민족대단결의 기운이 한(조선)반도에 넘쳐나는 조건에서 시작될 수 있다. 북(조선)의 남침을 입버릇처럼 뇌이면서 남침위협으로부터 남(한국)을 보호해주기 위해서 미국군대를 남겨두고 있다는 미국의 주장은, 한(조선)민족의 화해와 단합의 분위기가 무르익을수록 우스꽝스러운 헛소리로 들리게 된다. 6.15 공동선언의 정신에 따라 우리 민족끼리 화해하고 단합하여 조국통일을 실현할 수 있음이 현실로 입증될 때, 주한미국군의 존재근거는 사라질 것이며 남(한국)의 대중이 주한미국군 철군운동을 지지하게 될 것이다.
6.15 공동선언 발표 5주년을 맞이하여 남북 장관급(상급)회담이 오랜만에 다시 열리게 되고, 남북해외에서 구름처럼 모여든 사회단체대표들과 정당대표들 1천5백 명이 남(한국) 정부대표단과 함께 참가한 민족통일대축전에서는 통일열기가 넘쳐나게 될 것이다. 그 열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북(조선)의 남침위협으로부터 남(한국)을 보호해주기 위해 미국군을 남겨둔다는 미국의 해묵은 거짓말이다.
만일 8.15 조국광복 60주년을 맞이하여 서울에서 열리는 민족공동행사를 남북정부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남북해외의 정당대표들과 사회단체대표들이 모두 모이는 민족통일대축전이 열리는 경우, 민족대단결의 기운은 5년 전 평양에서 남북최고위급회담이 열렸을 때처럼 뜨겁게 솟구칠 것이다.
그러한 민족대단결의 기운은 오는 10월 10일 평양에서 열리는 조선로동당 창건 60주년 기념행사에 5년 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남(한국)의 수많은 정당대표들과 사회단체대표들이 참가하여 우리 민족끼리 단합하는 6.15 공동선언의 정신을 드높이는 정치적 행동에서 절정에 이를 것이다.
올해 한(조선)반도를 통일열기로 뜨겁게 달구게 될 정치일정은 이처럼 세 단계로 설정되어 있다. 미국이 제아무리 초강대국이라고 해도 우리 민족끼리 만나서 힘을 모으는 6.15 공동선언 실천운동의 정치일정을 막지는 못한다.
둘째, 주한미국군이 평택기지로 옮겨가는 것을 저지하는 대중투쟁의 정치일정이다.
주한미국군이 평택기지로 옮겨가는 것은 미국의 군사력을 재편하는 전략에 따라 추진되는 사업이다. 평택기지를 확장·건설하는 전략사업의 목표는 평택기지에 모아놓게 될 미국군을 동아시아의 신속기동군으로 재편하고, 평택기지를 미·일 동맹군의 전초기지로 삼으려는 데 있다.
미국 국방부가 미·일 동맹군의 전초기지로 징발한 평택기지는 미·일 동맹군의 해군력과 공군력을 증강함으로써 미·일 동맹체제에 대한 중국의 도전을 억제하고 한(조선)민족의 자주화를 가로막으면서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적 지배권을 유지하려는, 미국 국무장관의 말 그대로 '폭정의 전초기지'다.
그러나 남(한국)의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은 미국이 우리 강토에 '제국주의 폭정의 전초기지'를 세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남(한국) 대중의 주한미국군 철군투쟁은 평택기지 반대투쟁에서 그 폭발력을 얻게 될 것이므로, 철군투쟁의 힘을 그곳으로 집중해야 할 요구가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6.15 공동선언 실천운동과 남(한국) 대중의 철군투쟁은 한(조선)민족의 자주화를 촉성하는 정치일정이다. (2005년 5월 22일 작성)
* 이 글은 서울의 인터넷 언론 '통일뉴스'에 기고한 글이다.
미국의 새로운 국방전략의 위험성
News by Rodong Daily, 채일출
최근 미국이 새 국방전략을 짰다. 그 내용을 보면 앞으로 10년간에 군사비를 대폭 줄인다는것, 유럽과 중동지역에 중점을 두던 전략을 아시아태평양지역으로 옮긴다는것, 두개 전쟁을 동시에 치르는것을 내용으로 하는 이전의 군사전략을 한개 전쟁수행, 한개 분쟁억제로 조정한다는 것 등이다.
국방전략은 미국이 얼마나 극심한 금융위기를 겪고있는가를 잘 보여주고있다. 미국은 지난 기간 항시적으로 겪고있는 경제위기, 금융위기속에서도 군사비증강에로 줄달음쳤었다. 그런데 이번에 군사비를 삭감한다는 국방전략까지 짜놓고 공포하는것을 보면 그들의 처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미국가채무액은 국내총생산액을 뛰여넘어 14조US$를 넘어섰다.
미국이 바빠나긴 바빠난 모양이다. 미국은 더는 경제대국이라고 뽐내며 군사적위세를 부리고 유일초대국행세를 할 형편이 못된다. 미국의 새로운 국방전략도 다 기울어진 경제를 추세우는데 도움이 되지 못할것이다.
문제는 새 국방전략이 결코 미국이 자기의 침략적 본성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은 두개 전쟁 동시수행 전략을 포기하고 한개 전쟁수행, 다른 분쟁 억제전략을 세웠다. 두개 전쟁 동시수행 전략은 이전 미정권이 세운 전략이다. 이 전략을 세운 때로부터 미국은 두 개의 전면전쟁을 동시에 치른적이 없다.
한 나라를 집어 삼키는 사이에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전쟁을 위한 사전 교란을 일으키는 방식 즉, 순차 별로 다른 나라를 들이친적은 있어도 동시에 두 개 전선에서 전쟁 판을 벌려놓은 례가 없다. 그러나 미국은 두 개 전쟁 동시수행 전략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있다.
파네타 미 국방장관이 이번 국방전략을 두고 《조선반도에서 지상전을 벌리면서 호르무즈 해협에서도 이란의 위협에 맞서싸워 두 곳에서 모두 승리할 수 있다》 고 줴친 데서도 그것이 나타났다.
이렇게 놓고볼 때 현 미 당국의 한개 전쟁수행, 한개 분쟁 억제전략은 실천에서 검증 된 침략 방법을 합법화 하여 정식 미국의 침략 방식으로 만들면서도 일단 기회가 조성되면 두 개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일으켜 승리 하겠다는 것이나 같다. 침략전쟁에 이골이 난자들의 국방전략이다.
국제사회는 미국의 이번 국방전략을 두고 승냥이의 침략수법이 결코 변하지 않았다고 강하게 규탄 하고있다.
미국이 군사비를 대폭 줄이고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무력을 집중 시키려 하는것은 그들의 침략 수법에 변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있다.
미국은 국방전략에서 앞으로 10년동안에 약 4 890억US$의 군사비 지출을 삭감 할 것을 예견 하였다. 대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을 철수 시키고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군사적 힘의 중심을 둘 것을 계획 하고있다.
이것은 미국이 군사비를 삭감 하는데로부터 오는 무력의 축감을 효률적으로 리용하기 위한 계략 이다.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저들의 구미에 맞게 이미 정치군사 구조를 갖추어놓은 상태이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철수 하였다고 하여 이 나라들이 자주독립국가로 되고 미국의 침략적 본성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이 나라들에서 미군을 철수하는것은 두 전쟁 때문에 겪는 극심한 경제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국제사회에 침략국가 로서의 저들의 영상을 가리우기 위한것이다.
미국의 국방전략은 군사비를 축감하는 속에서도 군사력을 더욱 강화 할 것을 노리고 있다는데 그 위험성과 엄중성이 있다.
미국의 군사비는 군사 인원과 재래식 무기생산을 줄이는것을 통하여 삭감되며 대신 미군의 무장장비는 더욱 현대 화되고 첨단무기들로 증강되게 된다. 미 집권자가 이번에 세운 국방전략을 두고 《미군은 축소되지만 높은 기동성과 유연성을 실현하여 미국의 군사적우위를 유지해나갈것이다. 그리고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미군의 전개력을 강화하여 국방비삭감의 영향이 미치지 않게 할것이다》라고 한것이 그것을 립증해준다.
이것은 미국의 국방전략발표가 저들의 침략 적인 군사정책의 위험성을 감추어 보려는 잔꾀에 불과 하다는것을 폭로해준다.
미국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대한 전략적 무력배비 이동을 실현 하려 하고있는 것은 이 지역에 저들의 동맹국들과 앞잡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태평양지역중시를 내용으로 하는 미국의 국방전략이 발표 됨으로써 이 지역은 앞으로 새로운 전쟁발발의 위험성을 안고있는 열점 지대로 되고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이 노리는 주되는 목표는 우리 나라이다. 반제 자주적 립장이 강한 우리 인민은 오늘 강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 힘차게 떨쳐 나서고있다.
지역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강력한 국가건설을 지향하고있다. 이에 겁을 먹은 미국은 저들의 추종국가, 앞잡이들을 리용하여 다른 아시아 태평양 지역 나라들의 발전을 억누르고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 하려고 발악 하고있다. 이것은 이 지역 나라들의 응당한 경계심을 자아내고있다. 미국의 국방전략 발표와 관련하여 아시아 태평양 지역 나라들이 그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목표들을 세우고 국방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려는 의지를 표명 하고있는 것은 우연치 않다.
이것은 미국의 국방전략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군비 경쟁을 몰아오는 도화선으로 되고 있다는것을 실증 해주고있다.
미국의 국방전략은 침략성과 호전성, 지배주의적 야욕으로 하여 파멸을 촉진 시키게 될것이다.
《세기와 더불어》1권 제3장 길림시절:
4. 조직을 확대하기 위하여
4. 조직을 확대하기 위하여
반제청년동맹과 공청을 내온 다음부터 우리는 활동무대를 광할한 지역에로 넓혀나갔다. 공청과 반제청년동맹의 핵심들이 조직을 확대하기 위하여 꼬리를 물고 길림을 떠나갔다. 나도 그때 학생의 몸이지만 여러고장들에 나가군하였다.
길림에서 몇백리 떨어진곳들에도 자주 다니며 새로운 활동무대를 개척하였다. 토요일 저녁차로 길림을 떠나 교하, 카륜, 고유수와 같은 고장들에 갔다가 다음날 밤차로 돌아오군하였는데 피치못할 사정이 있을 때에는 결석도 하였다. 리광한교장이나 상월선생을 제외한 대다수의 교원들은 그것을 몹시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아버지도 안계시고 집이 가난하여 학비벌이라도 하는게 아닌가고 짐작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신분이 학생이고보니 여러가지 구속과 제약이 없지 않았다. 강의에 참가하고 과외학습을 하고 그 여가를 타서 여러 조직들의 사업까지 보아야 했으므로 나는 늘 시간의 부족을 느끼군하였다.
시간의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수 있는 시기는 방학때였다. 우리는 보통때 준비를 잘해두었다가 방학이 되면 여러고장으로 다니며 조직을 꾸리는 활동도 하고 군중계몽도 하였다.
인민들속으로 들어가는것은 국내에서도 하나의 사회적풍조로 되고있었다. 방학이 되면 많은 학생들이 농민들속에 들어가 계몽활동에 참가하였다. 내가 화성의숙에 다니던 그해 여름 국내에서는 《조선일보(현재의 좆선일보가 아닌 초기의 민족지인 조선일보를 지칭함)》사가 방학이 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등학교이상의 학생들로 계몽대를 뭇고 그들에게 강습까지 주어 농촌으로 내려보냈다. 계몽대에 망라된 학생들은 고향에 돌아가 신문사에서 만들어준 조선어교본을 가지고 문맹퇴치사업을 하였다.
일본에 가서 공부하는 류학생들도 방학이 되면 조국에 돌아와 류학생순회강연대를 무어가지고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계몽사업을 하였으며 천도교와 기독교청년회에서도 농민들속에 침투하여 농촌진흥사업을 추진시키였다.
그러나 국내학생들의 계몽운동은 민족의식의 계발을 지향하는 모든 국민적운동을 저들의 식민지정책에 대한 반항으로 보는 총독부당국의 철저한 탄압과 지도자들의 사상적제한성으로 인하여 대중을 혁명화하고 조직화하는 단계에로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민족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한 순수한 개량주의적운동에 머무르고말았으며 그것마저 1930년대중엽에 들어가서는 하강기를 맞이하였다.
그 운동이 순수한 개량주의적운동으로 전개되였다는것은 농촌에서 그들이 해온 활동내용을 보아도 잘 알수 있다. 그들의 활동에서 중심을 이루는것은 문맹퇴치와 농촌의 생활환경을 위생적으로 개조하는것이였다. 기독교청년회성원들이 진행한 활동내용가운데는 지어 료리법의 개선운동과 우물을 깨끗이 거두는 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양계, 양잠법과 당국이 발행한 증명서, 신청서의 사용법에 이르기까지 농촌주민들을 근대적생활에로 안내하고 유도하기 위한 여러가지 문화계몽적인 문제들이 다 포함되여있었다.
우리는 일제의 탄압이 직접적으로 미치지 않는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농촌계몽활동을 대중을 조직화, 혁명화하기 위한 활동과 밀접히 결합시키면서 그것을 적극적인 정치투쟁의 한 형태로 승화시키는데 큰 주의를 돌리였다. 우리의 군중공작은 애국주의교양, 혁명교양, 반제교양, 계급교양을 주선으로 하여 사람들을 의식화하고 그들을 각종 대중조직에 묶어세우는 방향에서 진행되였다.
우리가 대중의 혁명화를 위해 그처럼 전력을 다한것은 그들을 우매하고 미개한 계몽대상으로만 보아오던 종래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 인민이야말로 우리의 선생이며 혁명을 추동하는 기본동력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그것을 절대시한데 있었다. 우리는 이런 관점을 가지고 인민들속으로 들어갔다.
《인민들속으로 들어가라!》 그때부터 이 구호는 나의 전생애를 관통하는 좌우명으로 되였다.
나는 인민들속에 들어가는것으로 혁명활동을 시작하였고 오늘도 인민들속에 들어가는것으로 혁명을 계속하고있다. 그리고 인민들속에 들어가는것으로 인생을 총화하고있다. 단 한번이라도 인민들과의 접촉을 게을리하고 단 한번만이라고 인민의 존재를 망각하는 순간이 있었다면 나는 10대의 시절에 이미 형성된 인민에 대한 순결하고 진실한 사랑을 오늘까지 간직하지 못하였을것이며 인민에 대한 참다운 복무자가 되지 못하였을것이다.
인민의 권리가 최대한으로 보장되고 인민의 지혜와 창조력이 무한정 발양되는 오늘의 우리 사회에 대하여 생각할 때마다 나는 우리를 인민행렬차에 처음으로 태워준 길림시절에 감사를 드리군 한다.
우리가 인민들속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시작한것은 1927년 겨울방학부터였다.
부자집 학생들 한테는 겨울방학이 문자 그대로 신선놀음 이였다. 그들은 겨울내내 집에서 련애소설을 보며 뒹굴든가, 기차를 타고 장춘이나 할빈, 베이징과 같은 대도시로 유람을 떠나든가 하였다. 음력설이 되면 좋은 음식을 해놓고 폭죽을 터뜨리며 흥겹게 놀았다. 원래 중국사람들에게는 음력 정월초하루부터 2월 2일까지 정월 한달동안 계속 노는 풍속이 있다. 그들은 음력 2월 2일을 룡태두(룡이 대가리를 쳐든 날)라고 하면서 정월에 잡은 돼지 대가리를 다 삶아먹어야 명절놀이를 끝낸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처럼 유람을 다닐수도 없었고 명절놀이로 풍청거릴수도 없었다. 그대신 어떻게 하면 방학을 리용하여 혁명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수 있겠는가 하는 궁리를 하였다.
나는 방학이 되자 연예대원들을 데리고 장춘에 갔다가 거기서 돌아오기 바쁘게 인차 무송으로 떠났다. 박차석과 계영춘도 한해 겨울을 우리 집에서 보내기로 약속하고 나와 동행하였다.
그해 겨울방학을 우리는 참으로 바쁘게 보내였다. 나는 집에 도착하기 바쁘게 새날소년동맹원들에게 둘러싸이였다. 그들은 동맹이 겪고있는 사업상 고충에 대하여 기탄없이 하소연하였다. 동맹위원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해결을 기다리는 문제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우리는 그들의 애로를 풀어주기 위하여 새날소년동맹원들과의 사업에 많은 시간을 바쳤다. 동맹지도일군들에게 연예선전대의 활동방법, 사회활동방법, 군중공작방법, 동맹내부사업방법들을 가르쳐주면서 정치토론회와 성격검토회에도 자주 참가하여보았다.
소년동맹사업을 추켜세운 다음에는 무송지방의 핵심청년들로 백산청년동맹을 조직하였다. 백두산주변에 있는 청년들의 조직이라는 의미에서 백산청년동맹이라는 이름을 달았으나 그 단체는 사실상 반제청년동맹의 변신이였다. 우리가 그 조직에 백산반제청년동맹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저 청년동맹이라고 한것은 적들에게 혼란을 주고 조직을 위장시키기 위해서였다. 백산청년동맹은 민족주의영향하에 있는 단체처럼 변장하고 합법적인 활동을 하였다.
우리는 백산청년동맹원들을 움직여 청와재를 비롯한 주변의 농촌마을들에 야학을 내오도록 하였다.
나는 청년조직들이 늘어나고 그 대렬이 확대되는 조건에서 광범한 청년들과 군중들에게 사상적인 량식을 줄수 있는 신문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신문을 만드는 사업은 완전히 령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욕심같아서는 한번에 신문을 100부 정도씩 찍어내고싶었지만 우리에게는 등사기도 없고 종이도 없었다.
무송에 중국사람이 경영하는 자그마한 인쇄소가 하나 있기는 하였으나 우리가 만들 신문의 내용으로 보아 그 인쇄소에 의뢰할수가 없었다. 나는 생각다 못해 손으로 써서 신문을 내기로 마음먹고 이 사업에 새날소년동맹열성자들과 백산청년동맹의 핵심들을 동원시키였다. 100부를 쓰는데 한주일이상의 시간이 걸리였다.
1928년 1월 15일 우리는 드디여 《새날》이라는 제호를 단 신문의 창간호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때 무슨 정력으로 그 많은 글을 다 써냈던지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그 시절의 혈기와 젊음이 그리워지는 때가 많다. 우리는 그때 자기를 혁명에 깡그리 바치는 거기에서 둘도없는 행복을 느끼였다.
꿈도 없고 담력도 없고 열정도 패기도 투지도 랑만도 없는 청춘은 청춘이 아니다. 젊은시절에는 리상을 높이 세우고 그 리상을 실현하기 위해 만난을 무릅쓰고 완강하게 투쟁하여야 한다. 생신한 사상과 건실한 육체를 가진 청춘들이 피와 땀을 바쳐 가꾸고 이룩해놓은 모든 열매들은 조국의 귀중한 재부로 되며 그 재부를 이루어놓은 주인공들에 대하여 인민들은 영원히 잊지 않는것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젊은 시절을 그리워 하는것은 그때가 일생 에서 일을 제일 많이 할수 있는 시절 이기 때문이다.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때가 제일 행복하다. 그후 나는 아버지의 친지들한테서 힘들게 얻어낸 등사기로 《새날》신문을 밀어냈다. 1927년 겨울방학의 활동가운데서 가장 이채로왔다고 말할수 있는것은 연예선전대의 활동이였다.
무송의 연예선전대에는 새날소년동맹원들과 백산청년동맹원들, 부녀회원들이 망라되였다. 이 연예선전대가 무송과 그 주변의 농촌부락들을 돌아다니면서 한달가량 순회공연을 하였다. 우리는 순회공연을 하면서 도처에 조직도 꾸리고 군중계몽도 하였다. 《혈분만국회》,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딸에게서 온 편지》와 같은 연극들은 다 그해 겨울에 우리가 무송에서 창작하고 공연한 작품들이다.
연예선전대가 순회공연을 앞두고 무송시내에서 며칠동안 공연활동을 하고있을 때 군벌당국이 아무 리유없이 나를 체포하여 감옥으로 끌고갔다. 몇몇 봉건주의자들이 우리의 공연내용이 자기들의 비위에 거슬린다고 나를 군벌당국에 밀고하였던것이다.
그때 소학교동창생인 장울화가 나를 석방시키느라고 무던히 애를 썼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설복하여 경찰당국이 우리 집을 수색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게 하였다. 장울화의 아버지는 우리 집에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과정에 의사가 소통하여 아버지의 친지가 된 사람이였다. 그는 거부이지만 량심적인 인간이였다. 우리 아버지가 무송에서 백산학교 복교를 발기하고 그 인가를 얻지 못해 애를 태울 때에도 그가 나서서 교섭을 하였다.
장울화의 아버지와 같은 세력가가 압력을 가하니 특별한 단서를 잡지 못하고있던 군벌당국도 어떻게 하는수가 없었다. 그때 무송에 있는 조선사람들이 군벌당국에 몰려가 나를 석방하라고 집단적인 항의를 들이댔다. 우리 어머니가 조직을 발동하고 군중을 추동하였다. 중국인유지들까지도 군벌당국의 처사를 비난하면서 나를 내놓으라고 하였다.
얼마후 군벌당국은 하는수없이 나를 석방하였다. 나는 경찰서에서 풀려나오자 연예선전대를 이끌고 푸수허 마을로 떠났다. 연예선전대는 푸수허마을에서 연 사흘동안이나 공연하였다. 우리의 공연을 이웃마을사람들까지 와서 구경하고 돌아가다나니 주변부락들에 소문이 굉장히 퍼지게 되였다.
두지동 사람들도 그 소문을 듣고 우리를 찾아와서 연예 선전대를 자기네 마을로 초청 하였다. 우리는 그 초청을 쾌히 수락 하였다. 두지동 에서의 공연은 대 성황을 이루었다. 우리는 부락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 예정했던 체류기일을 여러번 연장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첫 공연이 끝났을 때 새날 소년동맹위원장이 무대뒤로 뛰여와서 마을의 좌상 아바이가 나를 찾는다고 알려 주었다. 입에 골통대를 문 풍채좋은 중늙은이가 방금 우리가 공연을 한 그 집 울타리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인은 수북한 장미 밑으로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를 자기네 마을까지 안내한 두지동의 청년이 내곁에 다가와서 《차천리로인이요》하고 귀띔해주었다.
나는 차천리라는 말을 듣기 바쁘게 절을 하였다. 《로인님,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로인님께서 이웃동리에 나들이를 가셨다기에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내 나들이를 갔다가 연예대소문을 듣구 급히 뛰여왔네. 자네가 김형직선생의 자제 라는게 적실 한가?》《네, 그렇습니다.》
《자네 같은 아들을 두었으니 김선생이 지하 에서나마 마음을 놓게 되였네. 내 한평생 이렇게 훌륭한 연예는 처음 보았네.》 로인이 격식을 차려 깍듯이 대하는 바람에 나는 여간만 당황 해지지 않았다.
《로인님, 이러지 마십시오. 아들같은 사람을 앞에 세워두고 뭘 이러십니까.》
로인은 그날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 하였다. 나는 로인과 함께 그의 집으로 가면서 넌지시 이렇게 물었다.
《로인님, 이거 버릇없는 물음 이지만 로인님이 하루에 천리를 걷는다는 게 정말입니까?…》
《허허, 자네도 그 소문을 들었던가. 내 한창나이때에는 천리는 몰라도 오백리는 걸었네.》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차천리로인이 소문과 같이 대단한 독립운동자 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성밑에 본명대신 천리라는 별명이 붙은것이 다 일리가 있는 일이였다.
그 천리라는 이름때문에 로인은 만주지방의 조선 사람들 속에서 신비스러운 인물로 알려지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도 생전에 이 로인의 걸음걸이를 두고 탄복의 말씀을 한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때 천리라는 별명이 붙은것은 로인이 강계지방에서 의병활동을 할 때부터라고 말씀해주었다.
차천리는 만주에 건너온후 참의부에 소속되여 심룡준의 부하로 활동 하였다. 참의부가 상해 림시정부의 치하에 들어갈 때 그것을 제일 견결하게 반대한 사람이 차천리 였다는 말도 많이 들었는데 독립군 단체가 림시정부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던 정의부의 몇몇 인사들은 로인의 립장을 격찬 하였다.
지도부의 대다수가 군인 출신인 정의부 인물들 속에서는 문관위주의 림시정부를 시답게 보지 않는 경향이 지배하고 있었다.
차천리 로인은 그날 나에게 교훈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었다. 로인은 지난날 조선민족이 얼마든지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을 물리칠 수 있었고 독립국가의 당당한 인민으로 발전할 수 있었으나 부패무능한 봉건 통치배들 때문에 나라를 빼앗겼다고 통탄 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려면 말만 하여서는 안되며 손에 총을 잡고 왜놈을 하나라도 더 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아주 교활한 놈들 이기때문에 경각성을 높여야 한다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까지 들려주었다.
《자네 경성성냥공장이 망한 경위를 들어본적이 있나? 이 공장에서 만들어낸〈잰내비표〉성냥이 아주 유명했네. 성냥두 성냥이지만 상표가 특별해서 사람들의 눈을 끌었지. 잰내비가 복숭아가지를 메고있는 상표 였거든. 왜놈들이 조선에 와서 딱성냥공장을 차려 놓았지만 이 성냥 때문에 돈벌이를 할 수 없었다는구만. 그래 여러가지로 계책을 짜내던 끝에〈잰내비표〉성냥을 수만통 사가지고 어느 무인도에 가서 성냥가치를 모조리 물에 잠궜다가 말린 다음 시장에 내다 팔았다는 걸세. 그다음부터는 사가는 사람마다 불이 일지 않아 못쓰겠다고 하면서 왜놈들의 딱성냥만 사갔다지 않겠나. 경성 성냥공장은 상표를 왜놈 회사에 팔고 파산 당했네. 왜놈 족속들 이란 이래.》
사실 여부는 확증할 수 없었지만 일본제국주의를 리해 하는 데서는 만냥 짜리 이야기였다. 로인의 말이 자기는 한창나이때 화승대를 가지고 놈들이 5련발총으로 다섯발을 쏘는 사이에 세발은 쏘았는데 이제는 나이가 많아서 싸우지도 못하고 집에 들어박혀있자니 답답해서 견딜수 없다고 하였다.
로인은 그날 우리가 공연한 《단심줄》이라는 가무가 대단히 좋다고 하면서 지난날 의병활동이 흐지부지 돼버린 것도 힘을 합치지 못한 탓이며 독립군이 맥을 못추고 왜놈들에게 쫓겨다니는 것도 역시 힘을 합치지 못하고 제가끔 뿔뿔이 놀아나는 탓이라고 개탄 하였다. 《조선사람은 비록 셋이 모여도 단결하여 왜놈들과 싸워야 하네.》 로인은 격해서 이렇게 말했다. 차천리 로인의 말이 다 옳았다. 단결 하면 이기고 분렬 하면 망한다는 리치를 아프게 체험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런 말을 할수 없었다.
로인이 내 손을 붙잡고 자기는 나이가 많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울것 같지 못하다고 하면서 젊은 세대들이 잘 싸워달라고 당부할 때 나는 조선의 아들로서 인민의 기대에 어그러지지 않게 혁명을 잘 해야겠다는 숭고한 사명감을 느끼였다.
그날밤 차천리로인이 해준 말은 나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조선사람들은 비록 셋이 모여도 단결하여 일제와 싸워야 한다고 한 로인의 말은 그후 우리의 투쟁에서 큰 교훈으로 되였다. 연예선전대를 데리고 사람들속으로 들어가면 군중을 깨우쳐주기만 하는것이 아니라 이렇게 군중에게서 배우기도 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우리의 선생은 역시 인민이였다.
그래서 나는 일군들을 만날 때마다 인민들 속으로 들어가라고 간곡 하게 말하군 한다. 인민들속에 들어가는것은 보약을 먹는것과 같고 들어가지 않는것은 독약을 먹는것과 같다고 늘 강조하군한다. 인민들속에 들어가야 차천리 같은 로인도 만날수 있다. 인민들속에는 철학도 있고 문학도 있고 정치경제학도 있다.
차천리 로인은 참의부의 경호대장으로 활동하다가 자기의 상관인 심룡준에게 암살 당하였다고 한다.
나는 그 슬픈 소식을 듣고 조선사람은 비록 셋이 모여도 단결하여 왜놈들과 싸워야 한다던 차천리 로인의 말을 비분강개한 심정으로 되새겨 보았다. 로인의 좌우명 처럼 참의부의 지도자들이 서로 마음을 합치였더라면 이런 통탄할 불상사도 생기지 않았을것이다. 우리는 두지동 에서 그해 음력 설을 쇠였다.
설 명절이 지난후 나는 연예 대원들을 무송으로 돌려보내고 계영춘, 박차석과 함께 안도 땅으로 향하였다. 안도현 에는 조선사람들만 사는 내도산 마을이 있었다. 하늘아래 첫 동네라고 불리우는 백두산 기슭의 이 마을은 울창한 밀림 속의 산간벽촌 이였다. 내도산 이란 수림속의 섬 같은 산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중국사람들은 산모양이 젖꼭지 같이 생겼다는 의미에서 내두산 이라고도 한다.
이 산간 마을에 오래전부터 조선의 독립운동자들이 드나들었다. 독립군의 백전로장인 홍범도와 최명록도 한때 이 부락에 와있었다. 우리가 이미 《ㅌ. ㄷ》성원인 리제우를 내도산에 파견하여 그 일대의 청년들을 조직에 묶어세우도록 한것은 장차 백두산주변을 큰 혁명기지로 만들자는 타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리제우(리우)는 황해도태생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장백에 있을 때부터 우리 아버지와의 련계밑에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런 연고가 있었기때문에 리제우도 자연히 나와 함께 손을 잡을수 있었다. 화전에서 헤여진후 내가 리제우를 다시 만난것은 무송에서 백산 청년동맹을 결성 할 때였다. 나는 그때 그와 내도산부락에 백산청년동맹지부를 내올데 대한 문제를 의논하였다. 리제우는 롱절반 진담 절반으로 자꾸 과업만 주려 하지 말고 한번 와서 도와달라고 하였다.
무송에서 내도산 까지는 300리가 넘었다. 중국쪽에서 보면 만주땅의 마지막부락이지만 조선땅에서 보면 백두산너머 첫 마을이다. 이 내도산주변 100리안팎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 우리는 저녁 녘에 마을에 도착하여 리제우의 안내로 한의 노릇을 하는 최씨의 집에 들었다.
최씨의 말이 우리가 들어있는 방에 장철호가 두 번 와있었고 리관린 이도 있었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다녀가고 아버지의 친구들이 개척하던 고장에 오늘은 우리가 와서 혁명의 보습을 대게 되였다고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숙연해지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내도산 부락에 며칠 있어보니 리제우가 기어이 와달라고 하던 심정이 리해되였다. 내도산마을은 밖에서 들어온 사람이 발을 붙이기가 무척 어려운 고장이였다.
마을에는 주로 최가, 김가, 조가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는데 이들은 바깥세상과 담을 쌓고 서로 삼각혼사를 맺었다. 최씨네 딸은 김씨네 아들한테 시집을 가고 김씨네 딸은 조씨네 아들이 데려갔으며 조씨네 딸은 최씨네 며느리로 들어갔다. 좁은 골안에서 혼사가 이런 식으로 맺어지다나니 온 마을이 친척관계로 얽혀져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 《형님》, 《아재비》, 《사돈님》 하면서 돌아갔다.
이 마을사람들은 거의다 천불교를 믿었다. 천불교신자들은 하늘에서 99명의 선녀가 백두산천지에서 미역을 감고올라갔다는 전설에 기초하여 그곳에 《덩덕궁》이라는 99칸짜리 절간을 지어놓고 일년에 두번씩 찾아가 기도를 드리였다. 천불교신자들은 마을에도 《천불사》라는 절간을 지어놓고 열흘이나 한주일에 한번정도씩 가서 기도를 드리였다.
우리가 내도산에 도착한 다음날이 마침 천불교신자들이 절간에 가서 기도를 드리는 날이였다. 그날 우리일행은 리제우의 안내를 받아 절간 근처에까지 가보았는데 과연 장관 이였다. 신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고구려 사람들처럼 머리를 우로 틀어올리고 울긋불긋한 옷차림으로 한데 모여들어 꽹과리와 제금을 치고 북과 목탁을 두드렸는데 덩덕궁덩덕궁하는 소리가 아주 장엄하였다. 그래서 절간 이름마저 《덩덕궁》이라고 지었다는것이였다.
리제우가 하는 말이 내도산 일대 에서는 이 천불교가 골치거리 라는 것이였다. 그는 종교가 아편이라는 단순한 관념을 가지고 천불교를 곱지 않게 보고있었다. 무송에서 리제우의 말을 들었을 때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의식을 거행하는 천불교신자들의 진지한 모습과 웅장한 《덩덕궁》을 보고나서는 생각을 한번 더 깊이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날 나는 최씨의 안내를 받으며 리제우와 함께 천불교 교주 장두범을 찾아갔다. 장두범은 한때 독립군에서 싸우던 사람이였는데 독립군이 맥을 못추게 되자 총을 내던지고 내도산에 들어와 왜놈 들에게 천벌을 내리고 조선민족에게는 복을 내려달라고 백두산 천기에 빌면서 그것을 신앙으로 하는 천불교를 만들었다는 것이였다.
나는 교주와 담화를 하면서도 천정 밑에 매달려 있는 기장 이삭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최씨네 집에서 본 기장 이삭이 교주의 집에도 똑같은 모양으로 매달려 있었기때문 이였다. 종곡을 하려고 간수해두는가고 리제우에게 물었더니 그는 불공을 드릴 때 쓰는 기장이라고 시답지 않게 대답하였다.
논농사를 하지 못하는 이고장 사람들은 제 밥을 지을 때 흰쌀(입쌀)대신 기장 쌀을 썼는데 어느 집에서나 기둥이나 천정 같은데 기장 이삭을 매달아 두고 있었다. 먹을 것이 없어 끼니를 번지는 때에도 그들은 이 기장에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다. 다만 백두산 절간에 불공을 드리러 갈 때에만 그것을 절구에 정성껏 찧어 키질을 하고 나무숟갈로 싸래기와 풀씨, 뉘, 티검불을 고른 다음 똑같은 크기의 쌀알만 하나하나 모아 참지에 싸두었다가 깨끗한 샘물에 제밥을 짓군 하였다.
《그 망할놈의 천불교때문에 내도산사람들이 그만 다 환장하였소. 종교를 아편이라고 한 맑스의 말은 정말 명언 중의 명언 인것 같소. 이런 종교쟁이 들을 새 사상으로 개조 하는 것이 과연 필요하며 가능 하겠는 가 하는거요.》 리제우는 이렇게 푸념하면서 내도산 사람들의 얼을 다 뽑아가는 《덩덕궁》에 불을 지르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치밀 때도 있다고 고백 하였다. 나는 리제우의 관점이 협애 하다고 비판 하였다.
《종교를 아편이라고 한 맑스의 명제를 나는 물론 부정하지 않소. 그러나 이 명제를 어떤 경우에나 다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 이요. 일본에 천벌을 내리고 조선민족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비는 천불교 에다 그래 아편 이라는 감투를 함부로 씌울 수 있겠소? 나는 천불교를 애국적인 종교 라고 생각하며 이 교의 신자들을 다 애국자라고 생각하오.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이 애국자들을 하나의 력량으로 묶어 세우는 것뿐이요.》
나는 리제우와 앉아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그 과정에 천불교를 타도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반일 감정을 적극 지지해주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 하였다. 그래서 그곳에 한 열흘가량 머물러 있으면서 마을 사람들 과의 사업을 하였다. 종교를 믿는것 만으로는 조국을 광복하지 못한다는 나의 말을 천불교 신자들은 쉽게 긍정 하였다. 그해 겨울 내도산 사람들이 우리를 참으로 성의 있게 대해 주었다.
내도산 사람들의 주식은 감자 였다. 당콩을 넣은 감자밥이 별맛이였다. 계영춘은 방귀바람에 구들장이 깨지겠다고 우스개소리까지 하였다. 만일 그때 우리가 내도산에 가보지 않고 길림에 앉아서 리제우의 보고를 들었거나 지나가는 풍문이나 얻어듣고 사태를 판단 하였더라면 천불교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내도산에 가서 《덩덕궁》도 보고 기도를 드리는 신자들의 진지한 표정도 보고 집집의 대들보 밑에 달아 맨 기장 이삭들도 보았기 때문에 천불교와 그 신자들에 대한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있었다. 인민적 풍격과 인민의 리익에 부합되는 인민적인 사고방식을 지닌다는 것은 결코 탁상 앞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며 더우기 말공부 로써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사람들의 육성은 물론, 숨결, 눈빛, 표정, 말투, 손세, 몸가짐 까지도 자기의 눈과 귀로 직접 포착할 수 있는 인민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법이다.
우리는 마을 사람들을 계몽시키기 위한 정치사업을 선행시킨 다음 이 부락에 백산 청년동맹 지부를 내오고 소년탐험대를 꾸려주었다. 내가 길림으로 돌아온 후에는 우리 형권삼촌이 백산 청년동맹 사업을 책임지고 리제우와 함께 덕수, 독골, 절골, 약수동, 임수골, 지양개를 비롯한 장백 일대와 신파, 보천, 혜산, 갑산, 삼수 등 국내 여러 지방 들에 그 지부들을 조직 하였다.
동맹은 리제우에게 백산 청년동맹 장백지구 책임자의 임무를 맡기였다. 리제우는 그 중임을 훌륭히 감당 해냈다. 형권삼촌과 리제우는 백두산 일대를 혁명화 하면서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덕으로 우리는 후날 이 일대에서 혁명투쟁을 할 때 군중의 지원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배움을 잠시 중단하고 쉬는 때가 방학이지만 나는 그해 겨울방학에 책에서는 볼수 없는 많은것을 배웠다.
겨울방학을 마치고 길림으로 돌아온후 우리는 공청과 반제 청년동맹의 반년 간사업을 총화 하고 각계 각층의 청년들과 군중들을 망라하는 계층 별 대중 조직들을 더 많이 꾸릴데 대한 과업을 제기 하였다.
그 과업을 실행하기 위하여 김혁, 차광수, 최창걸, 계영춘, 김원우 등 공청핵심들이 흥경현, 류하현, 장춘현, 이통현, 회덕현 일대와 국내로 떠나갔다. 그들은 거기에 가서 공청과 반제 청년동맹을 비롯한 각종 대중 조직들을 빠른 속도로 늘여 나갔다.
나는 길림에 남아서 신안툰에 농민 동맹을 내오기 위한 사업을 하였다. 농민들을 조직에 결속 하는것은 그들을 혁명의 동력으로 준비 시키기 위한 사업이다. 특히 농민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있는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그들을 전취하는 문제가 혁명의 승패를 좌우하는 관건적 문제였다. 우리는 강동 마을에 나가서 농민동맹도 조직하고 반제 청년동맹 지부와 부녀회도 조직 하였으며 련이어 카륜과 대황구 에도 반제 청년동맹 지부를 무어주었다.
교하 지방에도 반제 청년동맹 지부를 조직 하였다. 내가 교하의 청년들과 인연을 맺게 된것은 려신청년회 조직부장 강명근을 만난 다음부터였다. 이 사람이 아마 장철호한테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모양이였다. 교하로 말하면 장철호의 중간정류소와도 같은 곳이였다.
그는 길림과 무송사이를 왔다갔다할 때마다 교하에 있는 강명근네 집에 들려 길림의 청년학생운동에 대하여 전해주고 길림에 돌아와서는 교하의 소식을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이렇게 되여 강명근이 우리를 알게 되였고 나도 교하지방의 청년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였다. 바로 그런 때에 강명근이 나를 만나려고 길림으로 찾아왔다. 내가 동대탄에 있는 장철호네 집에서 학교를 다닐 때였다.
나 보다 나이가 열살 이상 이나 더 든 사람이 《선생님》, 《선생님》하면서 자기가 겪고있는 사업상 고충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다 털어놓고 안타깝게 방조를 호소할 때 나는 그에 대한 동정을 금할 수 없었으며 길림에서 180리나 떨어져있는 교하에서 보통중학생에 지나지 않는 나한테까지 찾아온 그의 혁명가 다운 열정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교하현 에서는 랍법산을 경계로 서북쪽에서 려신청년회가 활동하고 동남쪽에서는 랍법청년회가 활동하였다. 교하일대의 조선 청년들은 대체로 이 두 청년단체에 망라 되여 있었다. 청년들은 처음에 큰 뜻을 품고 조직에 들었지만 자리다툼이나 하고 군자금 이나 거두어 들이는 민족주의 운동지도자 들의 소행에 점차 환멸을 느끼게 되였다.
그와 동시에 《프로레타리아혁명》과 《헤게모니》에 대하여서만 요란스럽게 떠들며 돌아치는 행세식 맑스 주의자 들의 빈말공부에도 어리둥절 해지고 말았다. 갈 길을 찾지 못해 좌왕우왕하게 된다는 강명근의 그 심정이 리해 되고도 남았다. 나는 길림 일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청년학생운동의 실태와 우리의 활동경험을 강명근에게 소개하였다.
그리고 교하에 돌아가면 반제 청년동맹 지부를 내올 수 있게 준비를 잘해보라고 하였다. 그가 돌아갈 때에는 여러권의 맑스ㅡ레닌주의서적도 주었다. 나로서는 성의를 다하여 깨우쳐 주느라고 하였지만 강명근이 돌아간 다음 교하의 일이 마음놓이지 않았다. 나는 벼르던 끝에 로일령을 넘어 교하 땅으로 찾아갔다. 그것이 아마 1928년 봄이였던것 같다.
강명근은 나를 보자 그러지 않아도 길림에 한번 다시 찾아갈 생각이였다고 하면서 여간 반가와하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이 길림 에서는 막힐것이 없을것 같았는데 정작 돌아와서 일을 하려고보니 걸리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였다. 교하의 농촌 청년들은 우선 조직을 어떻게 내오겠는가 하는 문제 에서부터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다.
어떤 청년들은 려신청년회가 민족주의자들의 조직이기때문에 당장 거기서 나와 뜻이 맞는 몇몇 사람들끼리 반제청년동맹을 뭇자고 하였으며 어떤 청년들은 려신청년회를 무작정 해산해치우자고 하였다. 조직에 어떤 사람들을 받아들이겠는가 하는 문제에서도 그들은 옳바른 견해를 세우지 못하고 누구는 《적대분자》이고 누구는 《동요분자》이기때문에 조직성원이 되기 곤난하다는 식으로 웬만한 청년들은 미리부터 다 대상에서 제껴놓고있었다.
나는 그날 마실방에서 목침을 베고 그들과 같이 한자리에 누워 조직을 내오려면 군중을 한 사람 이라도 더 많이 쟁취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사람들을 이편 저편 가르기전에 꾸준하게 교양하고 설복하는것이 중요하다고 말해주었다.
청년들이 민족주의자 들과 종파분자들의 물을 먹지 않게 만들며 려신청년회와 랍법청년회안에 있는 선진적인 핵심청년들의 역할을 높여야 한다는데 대하여서도 말해주고 그들이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토론해 주었다. 이렇게 한 다음 려신 청년회에 망라 되여있는 5명의 핵심 청년들을 선발 하여 교하 반제 청년동맹 지부를 무어 주었다. 나는 그후에도 교하 지방에 자주 나가 반제 청년동맹 성원 들과 사업 하였다.
나는 동만청총안에 있는 청년들도 우리 조직에 묶어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룡정에 와서 고학을 하고있던 조선청년들은 거의 모두가 동만청총에 망라 되여 있었다. 그들은 화요파의 영향을 받고있었다.
그런데 이 단체의 조직부장으로 사업하던 동흥중학교 학생 김준이 우리가 길림에서 발간한 잡지와 소책자를 보고 나를 찾아왔다.
그때 나는 김준을 통하여 룡정 일대의 청년운동 형편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김준은 길림에 왔다간 다음부터 우리와 련계를 가지고 대성중학교, 동흥중학교, 은진중학교를 비롯한 룡정시내 여러 학교의 청년 학생들 속에 우리의 사상을 선전 하게 되였다.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간도 지방과 회령, 종성을 비롯한 6읍 관내의 청년들을 선진사상으로 교양 하였다.
이 시기 나는 로동자들과의 사업에도 관심을 돌리였다. 당시 길림에는 화력발전소, 철도기관구, 성냥공장, 방직공장, 정미공장과 같은 크고작은 공장들이 적지 않았지만 로동계급을 망라하는 신통한 조직은 없었다. 다만 1927년 봄에 조선인 로동자 들의 취직과 생활편의를 도모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성회가 조직 되였을 뿐이였다.
우리는 길림화력발전소에 다니다가 농촌에 나온 한 청년을 교양하여 반제 청년동맹에 받아 들이고 그가 이전부터 일해 왔다는 길림화력발전소에 다시 들어가게 하였다. 그가 길림화력발전소에 발을 붙이고 선진적인 로동자들을 모으기 시작 하면서부터 우리의 발판이 생기였다.
우리는 류길 학우회 성원들을 발동하여 송화강 선창을 중심으로 로동자 야학을 조직하고 3.1인민봉기 기념일 이나 5.1절, 국치일 같은 때 그들을 찾아가 연설도 하고 연예공연도 하였다. 이런 준비사업에 기초하여 1928년 8월에 반일로동조합을 내왔다. 그 책임자는 반제 청년동맹의 핵심 성원 이였다. 청년학생들을 주되는 사업대상으로 삼고 그들의 의식화, 조직화를 다그쳐오던 우리가 활동 판도를 로동계급 속에까지 넓히고 그들을 조직에 묶어보기는 이때가 처음 이였다.
조선인 로동자들을 중심으로 무어진 이 반일 로동조합을 통하여 합법적 단체인 한성회를 움직이게 하였다. 한성회는 점차 정치적인 경향이 뚜렷해져갔다. 후에 한성회는 원산 로동자들의 총파업을 돕기 위해 동정금을 모아 원산 로동련합회에 보내였고 1930년 여름 조선에서 있은 수재 때에는 여러 조선인 단체들과 협동하여 구제회를 뭇고 수재민 들을 위해서 의연금을 수집 하였으며 길회선 철도 부설공사를 반대하는 투쟁 에서도 한몫 단단히 하였다.
길림과 교하 일대를 중심으로 민족주의자들과 종파분자들의 영향밑에 있던 청년단체들을 혁명적인 조직으로 개편하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매우 유익한 경험들을 축적 하였다. 혁명가의 생명은 군중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되며 군중을 떠날 때 끝이 난다고 할 수 있다.
《ㅌ. ㄷ》를 뭇던 화성의숙 시절이 나의 청년학생운동의 시작 이였다면 공청과 반제청년동맹을 조직하고 확대해나가던 길림 육문 중학교시절은 학생의 테두리를 벗어나 로동자, 농민들을 비롯한 각계 각층의 군중 속에 깊이 침투되여 도처에 혁명의 씨앗을 뿌려가던 나의 청년운동의 전성기 였다고 생각된다.
이 시기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의 활동과 그 영향력을 사람들은 《길림바람》이라고 하였다.
한(조선)반도 정세는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영화 '피바다'에서 발견한 정세인식의 준거 2. 정세발전단계를 구분하는 현상들3. '핵대결' 과정에서 형성된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4. 동맹의 외피를 제거하는 '핵대결'5. 반동체제를 제거하기 위한 국가보안법철폐투쟁 6. 경제성장의 외피를 제거하는 근로대중의 생존권쟁취투쟁7. 사회역사발전의 진입로에서 전개되는 투쟁국면
1. 영화 '피바다'에서 발견한 정세인식의 준거
북(조선)의 혁명예술영화를 대표하는 '피바다'는 일제식민지시기 어느 시골마을에서 가난한 살림을 꾸려 가던 을남이 어머니가 항일의 총을 잡은 투사로 일어서는 과정을 그린 대작이다. 항일혁명군의 진격로를 열어주기 위해 성문의 무거운 빗장을 들어내며 고개를 돌린 어머니의 강렬한 눈빛, 그리고 어머니의 손에 들린 권총 한 자루를 담은 감동적인 장면은 실로 혁명예술영화의 압권이다. 그 명장면은 북(조선)의 지폐에 인쇄되어 오늘도 북(조선) 동포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사회주의문예사조에 의하여 창작된 모든 혁명예술의 바탕에는 철학적 세계관이 흐르고 있는데, 혁명예술영화 자체가 사상성과 예술성의 변증법적 통일이다. 특히 북(조선)의 혁명예술영화는 주체의 철학적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하면 깊이 있게 감상하기 힘들다.
영화 '피바다'는 을남이 어머니를 중심으로 등장하는 극중 인물들의 생활과 투쟁을 통하여 두 개의 모순이 해결되어 가는 극적인 과정을 형상화하였다. 두 개의 모순이란 식민지조선의 민중 대 일제침략자들 사이의 적대적 모순, 그리고 식민지민중 내부에 존재하는 선진성 대 낙후성 사이에서 발생한 비적대적 모순이다.
을남이 어머니가 항일투사로 일어서는 과정은 식민지민중이 자기 안에 내재하는 비적대적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은 개인적 삶의 울타리를 박차고 민족·계급적 현실을 깨닫는 각성으로 치달아가고, 예속성에서 벗어나 자주성으로 개변됨으로써 새로운 질을 획득하는 주체의 자기실현과정이었다. 주목하는 것은, 식민지민중 안에 내재하는 선진성 대 낙후성 사이에서 발생한 비적대적 모순이 일제침략자들과의 적대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항일투쟁과정에서 극복되었다는 점이다.
민중이 자기 안에 내재하는 비적대적 모순을 자기의 적대적 대립물과의 투쟁을 통해서 해결·극복하였다는 변증법적 진리는 오늘 여러 가지 요인들이 얽혀 복잡하게 전개되는 한(조선)반도 정세를 읽는 데서 하나의 인식준거로 제시된다. 그 준거에 따르면, 오늘 한(조선)반도 정세의 변화과정은 적대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투쟁과정에서 민중이 자기 안에 내재하는 비적대적 모순을 해결해 가는 변증법적 운동과정으로 인식된다.
2. 정세발전단계를 구분하는 현상들
정세는 계기, 국면, 단계를 거치면서 끝없이 변화하고 발전한다. 그 변화발전의 복잡다단한 과정에서 계기, 국면, 단계의 성립과 작용은 순차적으로 분절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동운동으로 통일된다. 여러 계기들이 생겨나 상호작용하며 변화하는 국면이 있고, 여러 국면들이 생겨나 상호작용하며 발전하는 단계가 있다. 그러므로 한(조선)반도 정세를 읽는 데서 중요한 것은 계기, 국면, 단계를 각각 구분하여 고찰하고 그것들의 상호작용, 연관관계, 발전방향을 분석하는 일이다.
여기 한(조선)반도 정세의 발전단계를 구분하는 두 가지 현상이 있다. 조·미 '핵대결'과 남(한국)의 경제난이다. 변증법에 대해 무지한 대중언론들조차 그 두 가지 현상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대중언론보도에 따르면, 국제사회가 주시하는 한(조선)반도 정세의 초점은 '북핵위협'과 '노사분규'이며, 전세계 금융시장을 지배하는 뉴욕 월가의 금융자본이 한(조선)반도 정세와 관련하여 불안감을 느끼는 요인도 역시 북(조선)의 '핵문제'와 남(한국)의 '노동문제'라는 것이다.
먼저 조·미 '핵대결'이라는 현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핵대결'은 북(조선)과 미국이 북(조선)의 '핵문제'를 놓고 격렬하게 충돌하는 것인데, 그 본질은 사회주의국가의 반미자주역량 대 제국주의국가의 세계지배역량 사이에서 발생한 적대적 모순관계가 표출된 것이다. 제국주의국가인 미국은 자기가 장악·주도하는 제국주의 세계지배체제에 사회주의국가인 북(조선)을 강제로 편입시키려고 하고, 북(조선)은 제국주의 세계지배체제를 반대·배격하는 완강한 반제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조·미 '핵대결'은 미국이 장악·주도하는 제국주의 세계지배체제에서 발생한 가장 주요한 모순이 '핵문제'라는 외피를 쓰고 전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핵대결'이 정세발전단계를 구분하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그 현상이 발생하기 이전과 이후의 정세가 질적으로 달라졌기 때문이며, 또한 '핵대결'이 끝남으로써 한(조선)반도 정세가 새로운 단계로 진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적대적 모순이 해결되면 그 사물이 다른 사물로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지난 10년 동안 '핵대결'로 요동쳐온 한(조선)반도 정세는 사회주의국가의 반미자주역량 대 제국주의국가의 세계지배역량이 정치·군사적으로 충돌하는 여러 대결국면을 거쳐왔다. 긴박한 전쟁위기가 대결국면이었음을 말할 것도 없고, 조·미 양자회담, 3자회담, 4자회담, 6자회담 역시 대결국면이었다. 여러 형식의 정치회담을 대화국면이 아니라 대결국면으로 보는 까닭은, 전쟁위기만이 아니라 정치회담도 적대적 모순에 의해서 그 국면의 본질이 규정되기 때문이다. 조·미 사이의 적대적 모순은 전쟁위기에서 겉으로 드러나지만, 정치회담에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내적으로 관철된다. 정치회담에서 적대적 모순은 다른 성질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질을 내부에 은폐하는 것이다.
3. '핵대결' 과정에서 형성된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
북(조선)의 반미자주역량 대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역량 사이에서 발생한 적대적 모순은, 미국이 제국주의전쟁전략을 추진하고 그에 대응하여 북(조선)의 반제군사노선이 강화됨에 따라 긴박한 전쟁위기를 몰고 왔다.
미국의 제국주의전쟁전략에 의해서 촉발된 긴박한 전쟁위기는 한(조선)반도 전역의 핵참화를 예고하는 것이므로, 전쟁위기가 고조될 적마다 미국의 전쟁위협을 반대하고 한(조선)민족의 생존권을 수호하려는 의식이 남(한국) 대중 속에서 생겨났다. 그 결과 남(한국)과 북(조선)을 오랫동안 갈라놓았던 대미관의 경계선이 차츰 무너지게 된 것은 응당한 일이었다. 최근 남(한국) 대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미국이 조국통일을 저해한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60.2%로 나타났다.
남(한국)과 북(조선)을 갈라놓은 대미관의 경계선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그 진전속도가 느리고 전망도 불투명한 자연생장적인 현상이었는데, 그 무너짐을 목적의식적으로 추동한 요인이 있었으니 그것이 조국통일운동과 반미자주화운동이다. 조국통일운동은 6.15 공동선언이 발표된 것을 계기로 급진전되었으며, 반미자주화운동은 남(한국) 경제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 편입된 사태와 주한미국군 장갑차에 두 여중생이 피살된 사건을 계기로 급진전되었다.
6.15 공동선언의 기치를 든 조국통일운동이 진전됨에 따라 남(한국) 대중은 북(조선)에 대한 부정적, 반목적 관념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자기 민족을 미국보다 우선하는 존재로 보는 동족관념을 갖게 되었다. 반면에, 민족민주세력이 주도하는 반미자주화운동이 진전됨에 따라 남(한국) 대중은 미국에 대한 종래의 우호적, 의존적 관념에서 벗어나 미국을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보는 외세관념을 갖게 되었다.
조국통일운동과 반미자주화운동의 진전은 북(조선)과 남(한국)으로 나뉘어진 반미자주역량을 새로운 단계로 성장·전화시켰다. 둘로 나뉘어진 반미자주역량을 제국주의지배역량과 대립·투쟁하는 하나의 실체로 통일시킨 것이다. 제국주의지배역량과 대립·투쟁하는 하나의 통일된 실체를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이라고 부른다.
남(한국)과 북(조선)을 갈라놓았던 대미관의 경계선이 무너지는 변화국면에서 조국통일운동과 반미자주화운동이 그 변화국면에 작용한 결과, 한(조선)민족 안에 내재하는 비적대적 모순이 해결·극복되기 시작했으며, 그 비적대적 모순이 해결·극복되는 과정에서 한(조선)민족은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역량에 적대적으로 대립·투쟁하는 새로운 성질의 반미자주역량을 획득한 것이다.
한(조선)민족이 자기 안의 비적대적 모순을 해결·극복함에 따라 형성된 것이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립구도다. 6.15 공동선언 제1항에 명시된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는 정치적 의지가 '우리 민족끼리'라는 대중적 구호에 담겨 한(조선)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된 것은, 한(조선)민족이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역량과 대립·투쟁하는 새로운 성질의 반미자주역량을 획득하였음을 말해준다.
4. 동맹의 외피를 제거하는 '핵대결'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 대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역량 사이에서 발생한 적대적 모순이 가장 집중적으로 표출되는 곳은 군사부문인데, 거기에는 남(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지배와 북(조선)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위협이 상존한다. 미국은 한·미 동맹체제를 통하여 남(한국)을 군사적으로 지배하고 북(조선)을 군사적으로 위협한다. 남(한국)에 대한 제국주의국가의 지배와 북(조선)에 대한 제국주의국가의 군사적 위협은 한·미 동맹이라는 외피를 쓰고 전후 50년 동안 변함없이 유지되어온 것이다.
동맹의 외피 속에 싸여있는 제국주의지배체제는 남(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배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예속, 경제적 수탈, 사상문화적 동화를 추진하는 것과 더불어 군사적 위협으로 북(조선)의 사회주의체제를 제거하려는 반동체제, 다시 말해서 한(조선)민족 전체를 짓누르는 최대의 반동적 지배체제다.
그러한 제국주의지배체제 안에서 남(한국) 정권의 정치적 예속이 심화된다. 노무현 대통령을 수장으로 하는 현 정권이 미국 정치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숭미적인 발언을 늘어놓고 미국 정치권의 요구를 충실하게 추종하는 정치적 예속현상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일상화되었다. 이를테면 최근 해외순방길에 나선 노무현 대통령이 북(조선)이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장경제를 도입해 개혁·개방의 길로 나서야 하며, 6자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남북최고위급회담을 개최할 수 없다고 공언한 것은, 노무현 정권이 미국 정치권의 요구를 얼마나 충실하게 추종하는지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와 같은 친미예속성의 노골화 현상이 뜻하는 것은, 남(한국)에 대한 제국주의국가의 지배강도가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정치부문만이 아니라 경제부문에서도 제국주의국가의 수탈강도가 더 높아지고 있다. 남(한국) 경제가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에 편입된 뒤로 시장개방과 기업구조조정이 강제되는 국면에서 급속히 가중된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이윤수탈이 이제는 위험수위를 넘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남(한국) 대중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미국식 언어와 문화로 대체함으로써 대중의 사고구조와 생활방식을 미국화하는 사상문화적 동화작용이 맹렬하게 확산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체제에 대한 남(한국)의 예속이 부분적이 아니라 전면적이며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심화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동맹의 외피 속에 싸여있는 제국주의지배체제를 물리적으로 보호하는 존재가 있으니 그것이 주한미국군이다. 동맹의 외피 속에 감춰진 주한미국군의 진상은 남(한국)에 대한 제국주의국가의 지배를 유지하며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수탈을 안정화하는 제국주의점령군이다. 남(한국)의 금융시장을 점령한 제국주의독점자본이 부시 정부가 추진하는 주한미국군 감군계획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남(한국) 경제에 대한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수탈이 주한미국군에 의해서 그 안정을 보장받고 있음을 말해준다.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화운동이 일차적으로 주한미국군 철군운동에 주력해야 하는 까닭은, 제국주의지배체제를 물리적으로 보호하는 존재부터 제거해야 제국주의지배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지배체제는 그 체제를 보호하는 물리적 힘을 제거하고 그 체제의 존립근거인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폐기함으로써 마침내 종말을 고하게 된다.
'핵대결'은 제국주의지배체제를 싸고있는 동맹의 외피를 벗기고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 대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역량의 적대적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였다.
북(조선)이 6자회담이라는 형식으로 전개하는 '핵대결'은 한(조선)민족이 자기의 반미자주역량으로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키는 정치대결이며, 남(한국)에서 민주노동당, 민족민주세력, 진보적 대중단체들이 전개하는 주한미국군 철군운동 역시 한(조선)민족이 자기의 반미자주역량으로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키는 정치투쟁이다.
오늘 6자회담이라는 형식으로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키는 정치대결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에서 민주노동당, 민족민주세력, 진보적 대중단체들을 중심으로 주한미국군 철군운동을 전개하는 한(조선)민족은 그 대결과 투쟁의 과정에서 자기 안에 내재하는 선진적 반미자주역량과 낙후한 대미의존역량의 비적대적 모순을 해결·극복하는 중이다. 한(조선)민족이 자기 안에 내재하는 비적대적 모순을 해결·극복하여 반미자주역량을 하나의 통일된 역량으로 결집시켰을 때, 그 결집을 민족통일전선(national united front)이라고 부른다. 명백하게도, 한(조선)민족이 자기의 반미자주역량을 하나의 기치 아래 결집시켜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는 것은 '핵대결'에서 한(조선)민족의 정치적 승리를 이룩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5. 반동체제를 제거하기 위한 국가보안법철폐투쟁
제국주의지배체제와 친미예속체제는 동일체제의 두 측면이 아니라 비적대적 모순관계로 통일되어 있는 두 개의 반동체제다. 그 두 개의 반동체제가 비적대적 모순관계로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은 제국주의지배세력과 예속정권 사이에서, 제국주의독점자본과 예속자본 사이에서 때로 마찰과 갈등이 생기는 여러 현상들에 의해서 입증된다.
이를테면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역량이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을 약화·말살하려고 책동하는 과정에서 적대적 모순이 격화되는데, 모순이 격화되어 한(조선)반도 정세에 긴박한 위기국면이 조성되는 것은 그것이 남(한국)의 정치불안과 경제난을 악화시켜 친미예속정권의 존립기반을 뒤흔들기 때문에 예속정권과 예속자본의 이해관계에 배치된다.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역량이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과의 적대적 모순을 격화시켜 남(한국)의 정치불안과 경제난이 악화될 때마다 예속정권과 예속자본은 반발하게 된다. 이것이 한·미 관계에서 가끔 드러나는 마찰과 갈등의 원인이다. 한·미 관계에서 드러나는 마찰과 갈등의 현상은 남(한국)의 정권과 자본이 미국에 대해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지배체제와 친미예속체제라는 두 개의 반동체제가 비적대적 모순관계로 통일되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제국주의지배체제와 친미예속체제 사이에서 발생한 비적대적 모순은, 그 두 반동체제에게 공동의 대립물인 남(한국) 대중을 정치·군사적으로 지배하고 경제적으로 수탈하며 사상문화적으로 동화하는 지배와 예속의 심화과정에서 해결된다.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역량은 남(한국)의 정권과 자본을 예속화함으로써 자기의 대립물인 남(한국) 대중을 지배·수탈·동화한다.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역량이 자기의 지배체제를 유지·관리하기 위해서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예속화를 더욱 심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제국주의지배체제와 비적대적 모순관계로 통일되어 있는 반동체제는 친미예속성을 본질로 하는 정치권력(예속정권)과 사회적 권력(예속자본과 극우세력)에 의해서 무려 60년 동안 유지·관리되어 왔다. 60년의 역사는 그 반동체제를 제거하지 못하면 진정한 사회역사발전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 반동체제를 유지·관리하기 위하여 56년 전에 친미예속정권이 조작해놓은 법적 장치가 국가보안법이다. 반동체제를 유지·관리하기 위하여 조작해놓은 법적 장치를 제거하면, 그 반동체제의 존립근거가 결정적으로 약화될 것이다. 국가보안법철폐투쟁은 제국주의지배체제와 비적대적 모순관계로 통일되어 있는 반동체제를 제거하기 위한 투쟁이다.
지금 남(한국)에서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려는 사회정치세력과 그것을 유지하려는 사회정치세력이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려는 사회정치세력은 민주노동당, 민족민주세력, 진보적 대중단체들이다. 국가보안법 폐지안을 놓고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국회 안에서 벌이는 투쟁은 대중언론에 의해서 그 의미가 매우 부풀려져 있지만, 결국 양당의 당리당략적 야합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국가보안법은 그것이 존립시켜온 반동체제를 반대·배격하는 민주노동당, 민족민주세력, 진보적 대중단체들의 투쟁으로 철폐되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6. 경제성장의 외피를 제거하는 근로대중의 생존권쟁취투쟁
세계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의 내부모순은 세계적 규모에서 진행된 자본의 과잉축적과 상품의 과잉생산을 원인으로 하여 격화되었다. 세계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를 장악·주도하는 미국의 경제는 정부재정적자와 국제수지적자의 폭발적 증가로 거의 파산상태에 빠져들었다. 부시가 집권한 뒤로 미국에서 약 2백7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세계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에서 격화되는 내부모순이 돌출시킨 국제석유가격 폭등, 달러화 가치하락, 국제투기자본의 난동, 국제원자재가격 상승 같은 여러 악화계기들이 남(한국) 경제에 작용함에 따라서 남(한국)의 경제예속이 심화되고 근로대중에 대한 수탈이 가중되는 위기국면이 전개된다. 그 위기국면이 심화되면서 발생한 것이 경제난이다. 내수경기 침체, 수출경기 둔화, 가계부채 폭증, 실직·실업 증대, 비정규직 확대, 소비자물가 상승 등은 상호작용하면서 경제난을 악화시키는 여러 국면들이다. 그러므로 경제난은 대중언론이 이른바 경기악화라고 부르는 일시적 침체국면이 아니라 한(조선)반도 정세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모순관계에 의해서 발생한 하나의 단계로 규정된다.
경제난은 남(한국)의 예속경제를 파산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한때 '경제성장의 기적'을 이루었다고 자랑하였던 남(한국), 대만, 싱가포르 가운데서 대만과 싱가포르의 경제는 그토록 심각한 파산위기에 빠지지 않는데 유독 남(한국)의 경제가 가장 먼저, 전반적으로 타격을 받으면서 파산위기에 빠지는 까닭은, 남(한국)의 시장경제체제가 제국주의독점자본이 좌우하는 세계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에 가장 철저하게 예속되었음을 말해준다.
세계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의 내부모순이 격화됨에 따라 남(한국)의 경제에 대한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지배는 전면화되고 근로대중에 대한 수탈은 가중된다. 경제난 악화는 현상이고, 경제예속의 심화와 이윤수탈의 가중은 본질이다. 최근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남(한국)의 근로대중 66%가 열심히 일해도 잘 살 수 없다는 절망감을 갖고 있고, 59.7%는 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를 불신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상위 20%가 하위 20%보다 7.3배나 많은 소득을 얻는 빈부격차 심화현상이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정치적 무권리상태에 있는 노동계급, 근로농민, 영세사업자들에 대한 제국주의독점자본과 예속자본의 수탈이 가중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남(한국)의 경제난은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근로대중 대 제국주의독점자본 및 예속자본 사이에서 발생한 적대적 모순을 표출시킨다. 경제난으로 표출된 적대적 모순은 남(한국)의 근로대중이 자기를 수탈하는 제국주의독점자본 및 예속자본과 격렬하게 충돌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으니, 그 충돌현상을 근로대중의 생존권쟁취투쟁이라고 부른다. 근로대중의 생존권투쟁에 의해서 경제성장이라는 외피가 제거되고 그 속에 감춰져 있던 모순이 전면에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근로대중이 제국주의독점자본과 예속자본의 수탈에 저항하는 생존권쟁취투쟁만으로는 적대적 모순을 해결할 수 없으며 사회역사발전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모순은 제국주의독점자본 및 예속자본과 결탁하여 그들의 수탈을 보장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내는 제3의 대립물에 의해서 성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제3의 대립물이 노무현 정권이다.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요구에 발맞춰 노무현 정권이 추진하는 시장경제개방정책과 시장경제개혁정책은 노동계급의 대량실업사태, 근로농민과 영세사업자의 대량파산사태를 불러일으켰고, 비정규직 노동악법을 개악하고 노동계급의 총파업투쟁과 근로농민의 쌀시장개방반대투쟁을 폭력적으로 탄압함으로써 정권과 근로대중의 관계가 적대적 모순관계임을 드러냈다. 최근 해외순방길에 나선 노무현 대통령이 제국주의독점자본을 움직이는 대자본가들과 최고경영자들 앞에서 연설하면서 남(한국)의 전투적 노조가 '고립상태'에 있으며 정권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공언한 것은, 근로대중 대 노무현 정권의 모순관계가 적대적인 것임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모순의 격화는 생존권이 짓밟힌 근로대중이 노무현 정권을 중심으로 제국주의독점자본과 예속자본이 결탁한 반동적 3자동맹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데, 그 충돌현상을 대중정치투쟁이라고 부른다. 생존권쟁취투쟁이 대중정치투쟁으로 성장·전화하는 것은 근로대중이 대립물과의 투쟁을 통하여 자기 안에 내재하는 선진적 사회변혁역량 대 낙후한 현상유지역량 사이에서 발생한 비적대적 모순을 해결·극복해 가는 과정이다.
7. 사회역사발전의 진입로에서 전개되는 투쟁국면
두 개의 적대적 모순이 차츰 격화되고 있다. 그것은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 대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역량 사이에서 발생한 적대적 모순, 그리고 남(한국)의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형성된 근로대중의 투쟁역량 대 노무현 정권을 중심으로 제국주의독점자본과 예속자본이 결탁한 반동적 3자동맹 사이에서 발생한 적대적 모순이다. 전자는 '핵대결'이 격화되면서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화운동이 발전하는 현상으로, 후자는 남(한국)의 경제난이 악화되면서 근로대중의 생존권쟁취투쟁이 발전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핵대결'을 해결하는 주체는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이고, 남(한국)의 경제난을 극복하는 주체는 남(한국)의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근로대중의 투쟁역량이다. 지금 남(한국) 근로대중의 투쟁역량은 노무현 정권을 중심으로 제국주의독점자본과 예속자본이 결탁한 반동적 3자동맹을 반대·배격하는 전선, 곧 노동계급이 중심이 된 근로대중의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중이다.
'핵대결'이 격화되는 현상의 본질, 그리고 남(한국)의 경제난이 악화되는 현상의 본질을 모순관계로 해명하고 그 모순을 해결·극복하는 사회변혁의 길을 근로대중에게 명확하게 밝혀줌으로써 반미자주화운동을 추동하고, 노동계급이 중심이 된 근로대중의 통일전선을 대중정치투쟁으로 추동하는 것, 바로 여기에 현 시기 민주노동당과 민족민주세력이 맡아야 할 역사적 임무가 있다.
'핵대결'의 종식은 대중언론이 말하는 북(조선) '핵문제의 외교적 해결'이 아니라 한(조선)민족이 적대적 모순을 해결·극복하고 하나의 단계를 넘어서 발전된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남(한국) 경제난의 극복도 대중언론이 말하는 '경기회복'이 아니라 한(조선)민족이 적대적 모순을 해결·극복하고 하나의 단계를 넘어서 발전된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핵대결'과 남(한국)의 경제난은 한(조선)반도의 정세가 발전된 단계로 나아가는 사회역사발전의 진입로라고 할 수 있다. 그 진입로를 지나 발전된 단계에 이르려면 앞으로 여러 국면을 거쳐야 할 것이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계기들이 발생할 것이다.
2005년은 사회역사발전의 진입로에서 격렬한 투쟁국면이 전개되는 시점이다. 2005년의 투쟁국면에서 주목해야 할 현상은, '핵대결'에 의해서 동맹의 외피가 제거되고 모순이 격화됨으로써 주한미국군 철군운동이 대중적 추진력을 얻는 것, 제국주의지배체제와 비적대적 모순관계로 통일되어 있는 반동체제를 제거하기 위한 국가보안법철폐투쟁이 승리하는 것, 남(한국)의 경제난 악화에 의해서 경제성장의 외피가 제거되고 모순이 격화됨으로써 근로대중의 생존권쟁취투쟁이 대중정치투쟁으로 성장·전화되는 것 등이다.
'핵대결'과 남(한국)의 경제난이라는 사회역사발전의 진입로를 지나 장차 이르게 될 발전된 단계를 연방제 통일의 실현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연방제 통일이 '핵대결'과 남(한국)의 경제난에서 표출된 모순을 해결·극복하는 투쟁과정에서 실현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현 시기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기 위한 조국통일운동은 '핵대결'과 남(한국)의 경제난에서 표출된 모순을 해결·극복하는 투쟁과 분리되지 않는다.
2004년 11월 24일 금강산에 모인 남, 북, 해외의 수많은 대중단체들이 6.15 공동선언을 실천하는 상설적인 민족통일기구를 설립하여 조국통일운동을 전진시키기로 합의·결정한 것은, 한(조선)반도 정세가 사회역사발전의 진입로를 지나서 발전된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역사적 사변이다. 2005년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역사적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2004년 12월 10일 작성)
* 이 글은 서울에서 발행되는 진보적 영화시사 월간지 『COREA』(www.ncorea.co.kr) 2004년 1월 특집호에 기고한 것이다.
모순관계로 분석한 2004년 미국 대통령선거와 한(조선)반도 정세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부시 대 케리의 선거전에서 드러난 모순관계2. 북(조선)의 '핵문제'를 통하여 드러난 제국주의 세계지배체제의 모순3. 적대적 모순은 어떻게 해결되는가4. 3대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될 2005년 새해
1. 부시 대 케리의 선거전에서 드러난 모순관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부시가 재선되어 집권 2기에 들어섰다. 부시가 추진한 난폭한 대외정책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은 반부시 감정을 부시의 정적 케리에게 투사하였고, 그에 따라 케리를 지지하는 열기가 상당히 고조되었다. 그러나 선거결과는 케리가 반부시 감정확산의 반사이익을 받으며 당선될 것으로 보았던 대중의 기대심리를 좌절시켰다.
미국 대통령선거 같이 매우 복잡한 요인들이 얽혀있는 정치현상은 대중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어설픈 상식으로는 분석할 수 없으며, 전문지식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명백하게도, 정치현상을 분석하는 데 요구되는 전문지식은 진보적 사회과학에서 주어진다.
진보적 사회과학이 이룩한 성과에 비춰보면, 미국은 세계지배체제를 장악·주도하는 제국주의국가라는 사실, 그리고 제국주의국가가 직면한 두 가지 모순이 각각 격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돋보인다. 제국주의국가 미국이 직면한 두 가지 모순이란 제국주의 세계지배체제에서 발생한 모순과 제국주의국가 내부에서 발생한 모순이다. 그 두 가지 모순은 미국이 추진하는 여러 대내외정책에서 드러나는데, 특히 그 모순이 날카로운 쟁점으로 표출되는 계기는 대통령선거다.
부시 대 케리의 선거전에서 드러난 쟁점은 미국의 경제에 관한 문제, 그리고 북(조선)의 '핵문제'와 이라크 전쟁에 관한 문제였다. 미국 경제에 관한 쟁점은 제국주의국가 내부에서 발생한 모순이 표출된 것이며, 북(조선)의 '핵문제'와 이라크 전쟁에 관한 쟁점은 제국주의 세계지배체제에서 발생한 모순이 표출된 것이다.
이번 선거전에서 드러난 가장 주요한 쟁점은 제국주의 세계지배체제에서 발생한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 그리고 제국주의국가 내부에서 발생한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집중되었다. 주목하는 것은, 그 두 가지 쟁점을 표출시킨 두 가지 모순은 하나의 연관관계로 통일되어 있다는 점이다. 제국주의 세계지배체제에서 발생한 모순이 미국의 요구대로 해결하여야 미국 내부에서 발생한 모순을 해결할 수 있으며, 또한 미국 내부가 안정되어야 세계지배체제를 계속하여 장악·주도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부시 대 케리의 선거전에서 드러난 주요한 쟁점, 곧 제국주의 세계지배체제에서 발생한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쟁점은 이라크 침략전쟁과 북(조선)의 '핵문제'에 관련된 것이었다. 북(조선)의 '핵문제'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논하기로 하고, 우선 이라크 침략전쟁에 관한 쟁점을 논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의 정치세력은 그 쟁점과 관련하여 각자 이해관계에 따라 대체로 세 갈래로 갈라졌다. 세 갈래란 이라크 침략전쟁에 대한 지지세력, 비판적 지지세력, 반대세력으로 갈라진 것을 뜻한다. 그 가운데 이라크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진보적 정치세력은 선거진영을 형성하지 못하고 정치권 밖의 사회적 저항세력으로만 존재하였으므로, 반대세력의 목소리는 선거전에서 들리지 않았고 지지세력과 비판적 지지세력의 각축전만 요란하였다.
명백하게도, 부시진영을 형성한 정치세력은 이라크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세력이었고, 케리진영을 형성한 정치세력은 그 전쟁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세력이었다. 비판적 지지란 전략적으로 지지하면서 전술적으로만 비판하는 것을 뜻한다. 부시의 이라크 침략전쟁에 대한 케리의 전술적 비판은, 부시 정부가 이라크 침략전쟁을 독단적으로 밀어 부치는 바람에 프랑스, 독일, 캐나다를 비롯한 전통적 동맹국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라크 침략전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동맹국들의 지지와 동참을 이끌어 내는 외교전술을 선호한 것을 제외하면 부시와 케리의 차이는 없다.
이라크 침략전쟁에 대한 전략적 지지와 관련하여 부시진영과 케리진영이 같은 목소리를 냈다는 사실은, 선거전에서 정적이 되어 싸웠던 그 두 세력이 실제로는 이라크 침략전쟁을 도발한 경제적 동기를 제공하였던 제국주의독점자본에 각각 의존하고 결탁되어있음을 말해준다. 부시진영과 케리진영이 의존하고 결탁되어 있는 제국주의독점자본이란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져서 미국 경제를 마음대로 좌우하게 된 군수공업자본과 석유자본을 뜻한다.
이른바 '미국식 애국주의(American patriotism)'라는 현란한 깃발을 휘두르면서 대결했던 부시의 선거진영과 케리의 선거진영이 '미국식 애국주의'를 자극하는 대중선동의 막 뒤에서 벌였던 보이지 않는 암투는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이익을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는 정치능력을 서로 과시하기 위한 치열한 각축전이었다. 선거용지를 손에 쥔 미국 인민들은 '미국식 애국주의'의 대중선동에 현혹되어 열광하는 바람에 선거전의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한 채 투표소로 향했다.
부시 대 케리의 선거전에서 드러난 또 하나의 쟁점은 제국주의국가 내부에서 발생한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제국주의국가 내부에서 발생한 모순이란 독점 대 경쟁의 관계에서 발생한 모순인데, 이번 선거전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 정치세력은 그 모순을 해결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유달리 날카로운 충돌양상을 보였다. 제국주의국가 내부에 독점 대 경쟁의 모순이 존재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부시 대 케리의 선거전에서 그 모순이 상당히 격화되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부시 대 케리의 선거전은 미국 정치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독점 대 경쟁의 모순이 첨예하게 표출된 정치현상이었다. 그러나 대중언론은 제국주의국가 내부에서 발생한 모순이 정치권의 대립으로 표출된 현상만 주목하면서 부시 대 케리의 선거전이 과열양상을 보였다는 식으로 모호하게 묘사하였다.
국가기구의 경제관리기능을 강화할 것을 요구하는 정치세력은 부시진영을 형성하였는데, 그 세력은 대체로 금융자본, 군수공업자본, 석유자본과 결탁되었다. 그에 비해서 자본의 자유경쟁기능을 강화할 것을 요구하는 정치세력은 케리진영을 형성하였는데, 그 세력은 대체로 민수산업자본, 정보기술산업자본과 결탁되었다. 금융자본, 군수공업자본, 석유자본은 제국주의국가의 침략적 대외정책에 명운을 걸고 세계적 판도에서 축적되고, 국가기구의 경제관리(재정부의 금융감독, 국방부의 군비조달감독, 동력자원부의 동력자원수급감독)에 따라 독점적 지위를 차지한 자본들이므로, 당연히 국가권력에 대한 유착정도가 매우 강하다.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무기거래, 제국주의무력의 증강, 제국주의침략전쟁의 도발은 세계금융시장에 대한 지배, 세계석유자원에 대한 약탈과 더불어 제국주의국가의 침략적 대외정책에서 근간을 이루는 구성요소들이다.
부시 대 케리의 선거전에서 부시진영이 승리한 것은, 제국주의국가의 경제관리기능을 강화할 것을 요구하는 정치세력이 승리한 것이다. 그러한 정치현상이 뜻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금융자본, 군수공업자본, 석유자본에 대한 미국 경제의 의존도가 더 심화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며, 둘째는 제국주의국가 내부에 존재하는 독점 대 경쟁의 모순관계가 금융자본, 군수공업자본, 석유자본의 독점적 지위를 더욱 강화하고 경제에 대한 국가기구의 관리기능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부시 대 케리의 선거전에서 드러난 위와 같은 변화는 미국 경제가 통화수축(deflation)이라는 고질적인 경제난에 빠져들고 있음을 입증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발생하는 경제난이 모두 그러하듯, 미국의 경제난 역시 도시중산층을 양극으로 분해하여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극도로 심화시킨다. 계급모순의 격화가 빈부격차라는 현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미국 경제난의 원인은 이미 1990년대에 발생된 되었고, 약 10년 동안 수많은 계기를 통해서 누적되어왔다. 1990년대부터 국제전자통신망의 비약적 발달로 금융자본의 전세계적 인수합병이 가속화되고,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의 생산력이 크게 발전하면서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 세계적 규모의 상품생산이 급속히 진전된 나머지 결국 축적과 생산의 포화상태에 이르러 과잉축적, 과잉생산의 위기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2000년 4월 14일 뉴욕증권시장에서 주가가 폭락한 사태는 그러한 위기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불길한 신호였다.
지금 미국의 도시중산층에게 퍼지고 있는 것은 경제난이 악화되므로 경제에 대한 국가기구의 관리기능을 한층 강화하지 않으면 결국 파산할지도 모른다는 사회적 불안감이다. 이번 선거전에서 부시진영이나 케리진영을 가릴 것 없이 '강한 미국', '위대한 미국'을 외치는 대중선동에 줄곧 매달렸고, 그러한 선동이 먹혀 들어갔던 배경에는 경제난의 불길한 조짐을 목격하는 도시중산층의 불안감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국제사회의 호된 비판과 제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라크 침략전쟁을 일으킨 전쟁지휘관의 강한 모습을 부각시킨 부시의 선거전술은 경제난이 촉발한 불안감에 휩싸여 '강한 미국', '위대한 미국'을 찾는 대중심리에 적중하였다. 미국의 정치권이 이른바 '네오콘(neocon)'이라는 악명이 붙은 극우세력의 입김에 휘둘리는 특이한 현상은 그러한 대중심리를 배경으로 나타난 것이다. 미국의 경제난이 악화되어 파국으로 침몰하는 경우, 그러한 대중심리는 광적으로 확산될 것이다. 1929년 10월 28일 뉴욕증권시장에서 주가가 폭락하는 사태를 시작으로 세계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를 강타한 대공황의 폭풍 속에서 경제파탄으로 무너지는 독일제국을 구하자는 반동적 민족주의가 독일인민의 불안한 대중심리에 파고들면서 파시스트 독재자 히틀러를 제국총리로 내세웠던 공포와 광란의 시대가 21세기에 미국에서 재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마저 생긴다.
2. 북(조선)의 '핵문제'를 통하여 드러난 제국주의 세계지배체제의 모순
북(조선)의 '핵문제'는 핵무기 개발사업을 어떻게 중단시키느냐 하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제국주의 세계지배체제에서 발생한 주요모순의 표출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 장악·주도하는 제국주의 세계지배체제에서 발생한 모순이 북(조선)의 '핵문제'를 통하여 드러난 것이다. 제국주의 세계지배체제를 장악·주도하는 제국주의국가 미국과 제국주의 세계지배체제를 단호히 반대·배격하는 사회주의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의 첨예한 정치·군사적 대결이 '핵대결'이라는 외피를 쓰고 전개되는 것이다. 따라서 '핵문제'는 현상이며, 제국주의 세계지배체제의 모순은 그 현상의 본질을 이룬다.
제국주의 세계지배체제에서 발생하여 '핵대결'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는 주요모순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는 데, 북(조선)의 사회주의자주역량 대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세력의 모순, 그리고 남(한국)의 반미자주화운동 대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세력의 모순이다. 북(조선)의 사회주의자주역량과 남(한국)의 반미자주화운동이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세력을 공동의 대립물로 인식할 때, 북(조선)의 사회주의자주역량과 남(한국)의 반미자주화운동은 제국주의 미국에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하나의 실체로 통일된다. 그 통일된 대립적 실체를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제국주의 세계지배체제에서 발생하여 '핵대결'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는 주요모순은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 대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세력의 관계에서 발생한 적대적 모순으로 규정된다.
그 적대적 모순을 해결하는 데서 대결과 투쟁은 전략이고 대화와 협상은 전술이다. 지난 10년 동안 조·미 관계에서 발생하였던 한(조선)반도의 정치·군사적 위기와 남(한국)에서 전개된 반미자주화투쟁은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이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세력을 대상으로 벌여온 전략적 대결과 투쟁이었으며, 양자회담, 3자회담, 4자회담, 6자회담은 전술적 대화와 협상이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부시가 집권한 뒤에 진행된 6자회담은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 대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세력의 관계에서 발생한 적대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전술적 정치협상으로 인식된다. 6자회담은 적대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정치타협이 아니라 전략적 대결과 투쟁의 전술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적대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대결이 격화되면 그 대결은 군사적 대결로 전화되는데,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관계에서 발생한 적대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대결이 최고로 격화되어 군사적 대결이 벌어질 긴박한 전쟁위기가 조성된 때는 클린턴 집권기였다. 그러나 부시 집권기에는 그처럼 긴박한 전쟁위기가 조성된 적이 아직 없다. 그 까닭은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관계에서 발생한 적대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미국이 전쟁을 벌이는 경우, 전쟁 쌍방이 모두 재앙적인 피해를 입고 공멸하리라는 점을 미국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부시 정부에게 남아있는 선택 가능한 대안은 클린턴 집권 초기에 한(조선)반도에서 긴박한 전쟁위기를 조성한 것과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6자회담으로 시간을 끌면서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을 약화시키는 것이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부시 정부는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이 약화되면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관계에서 발생한 적대적 모순이 이완될 것이며, 모순이 이완되어야 제국주의지배체제가 현재 상태로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6자회담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자꾸 공전하는 것은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을 약화시키려는 미국의 속셈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을 약화시키는 방도는, 사회주의국가 북(조선)을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자본주의시장에 대한 개방과 시장경제적 개혁으로 유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북(조선) 사회 내부에서 개방과 개혁에 대한 인민의 기대와 요구가 제기되어야 한다. 개방과 개혁에 대한 인민의 기대와 요구가 제기되려면 북(조선) 인민의 사회주의적 의식을 자본주의에 친화적인 의식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그러한 의식전환에 요구되는 것이 바로 제국주의경제봉쇄와 제국주의심리전이다.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세력은 사회주의계획경제를 외부에서 봉쇄하여 자립적 발전을 저해하고 곤궁에 빠뜨리는 한편, 북(조선) 인민의 '인권문제'에 관련한 심리전을 전개하면 북(조선) 인민의 사회주의적 의식을 자본주의에 친화적인 의식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다.
이전에 미국이 추진하였던 대북(조선)적대정책의 내용은 경제봉쇄와 전쟁위협의 결합이었다. 그런데 미국은 전쟁위협이 북(조선)에게 압박효과를 내지 못할 뿐 아니라, 북(조선)과 남(한국)의 대중들에게 격렬한 반미감정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함에 따라 군사적 대결을 유지하고 고조시키되 긴박한 전쟁위협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행동은 자제하게 되었다. 그 대신 경제봉쇄와 심리전을 결합한 적대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대량파괴무기확산방지구상(PSI)'에 따른 다국적 해상합동훈련 실시와 '북(조선) 인권법' 제정은 그러한 적대정책에 의하여 생겨난 현상들이다.
명백하게도, 부시가 추진하는 6자회담은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을 약화시키는 제국주의경제봉쇄와 제국주의심리전을 전개할 시간을 벌어보기 위해서 추진하는 책략이다. 부시 정부에게 있어서 경제봉쇄와 심리전은 전략이고 6자회담 추진은 전술이다.
이라크 침략전쟁에 대해서 부시진영이 지지세력으로, 케리진영이 비판적 지지세력으로 각각 갈라졌듯이, 북(조선)의 '핵문제'에 대해서도 그러하였다. 선거전에서 케리는 6자회담을 추진해온 부시와 달리, 자기가 집권하면 조·미 양자회담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지만, 케리의 머리 속에 구상되었던 조·미 양자회담은 공전하는 6자회담을 양자회담으로 대체하여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을 약화시키는 시간을 벌어보려는 책략이었다.
부시는 때로 북(조선)의 '핵문제'를 6자회담을 통하여 평화적으로, 외교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을 '평화적으로', '외교적으로' 약화시키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시 정부의 한(조선)반도 정책은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 말살을 궁극적으로 지향하되 현재로서는 점진적으로 약화시켜간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그 정책은 소련과 중국에게 적용하여 결국 사회주의진영의 반제자주역량을 제거하였던 이른바 '냉전구도의 점진적 해체정책'과 궤를 같이한다. 선거전에서 승리한 부시가 대소련 외교정책 전문가로 통했던 콘돌리자 라이스를 국무장관으로 지명한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부시 정부의 한(조선)반도 정책은 대결전략과 협상전술이 비적대적 모순관계로 통일되어 있는 반미자주역량 약화정책이다. 미국의 대결전략은 반미자주역량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제국주의경제봉쇄와 제국주의심리전을 노골적으로 강화하는 것이고, 미국의 협상전술은 반미자주역량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6자회담을 지속하는 것이다.
3. 적대적 모순은 어떻게 해결되는가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 대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세력의 관계에서 발생한 적대적 모순은 제국주의 세계지배체제의 모순구도에서 매우 중요한 측면을 이룬다. 진보적 사회과학의 시각에서 보면, 제국주의 세계지배체제의 모순구도는 사회주의 반제자주역량 대 제국주의지배세력의 적대적 모순, 제3세계 민족주의세력 대 제국주의지배세력의 적대적 모순, 제국주의국가들 사이의 비적대적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 가지 모순이 집중된 제국주의 세계지배체제의 모순의 결절점이 바로 한(조선)반도다. 사회주의국가인 북(조선)은 명백하게 사회주의 반제자주역량의 범주에 속하고, 남(한국)의 반미자주화운동은 사회주의 반제자주역량의 범주와 제3세계 민족주의세력의 범주 사이의 폭넓은 중간지대에 걸쳐있다. 다른 한편, 북(조선)의 '핵문제'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각각 얽혀있으므로 한(조선)반도 정세에는 제국주의국가들 사이의 비적대적 모순도 존재한다.
주목하는 것은, 21세기의 한(조선)반도 정세에 얽혀있는 세 가지 모순이 오랫동안 이어진 상대적 불활성상태에서 벗어나 계속 격화되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모순이 격화되면 위기가 발생하고 심화된다. 한(조선)반도에서 모순의 격화는 피할 수 없으며, 따라서 위기의 발생과 심화도 피할 수 없다. 지난 10년 동안의 한(조선)반도 정세변화가 그것을 현실로 입증한다. 지금 조용하게 느껴지는 한(조선)반도 정세는 위기의 발생과 심화가 미국 대통령선거라는 계기 때문에 잠시 지체되는 현상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모순의 해결이 제국주의지배세력의 요구대로 해결되어서는 안 되고, 또 그렇게 해결될 수도 없으며, 반드시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의 요구대로 해결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위기는 모순이 격화되는 것만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위기는 모순격화와 주체역량강화라는 양대 요인에 의해서 극복된다. 모순이 격화되어 위기가 발생했어도 강한 주체역량이 존재하지 않으면 위기는 극복되지 않는다.
북(조선)의 '핵문제'를 통하여 표출된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 대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세력의 모순이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의 요구대로 해결될 것으로 전망하는 결정적인 근거는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이 비상히 강화되어온 현실에서 발견된다.
한(조선)반도 정세에 얽혀있는 세 가지 모순이 격화되어 발생한 위기가 극복되는 시나리오는 북(조선)의 '핵문제'를 둘러싸고 북(조선) 대 미국의 정치대결이 날카롭게 전개되는 한편, 남(한국) 대중의 반미성향이 확산되는 가운데 남(한국)의 반미자주화운동이 비약적으로 강화·발전되어 남(한국)의 반미자주화운동 대 미국의 정치대결이 날카롭게 전개되고, 그와 더불어 6자회담에 참가한 남(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이해관계가 미국의 이해관계와 상충되어 미국이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 가지 방향에서 한꺼번에 위기가 발생하여 한(조선)반도 정세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가장 극적인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극적인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남(한국) 대중의 사회적 의식이 이전에 비하여 미국을 비판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비판적 의식의 많은 부분은 아직 잠재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을 비판하는 사회적 의식이 잠재상태에 머물러 있는 조건이므로, 민족민주세력이 주도하는 반미자주화운동이 대중적 추진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2002년 6월 13일 주한미국군 장갑차가 여중생 두 사람을 깔아 죽인 사건에 격분한 수 십 만 명의 대중이 반미촛불집회에 나선 이후, 남(한국)의 반미자주화운동은 공세적 투쟁계기를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지적하는 것은,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 대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세력의 격렬한 정치대결이 반드시 여중생 살해사건으로 촉발된 반미촛불집회 같은 직접적 계기에 의해서만 촉발되는 것은 아니며, 남(한국)의 노동자와 농민이 중심이 된 기층민중의 생존권쟁취투쟁 같은 간접적 계기에 의해서도 촉발될 수 있다는 점이다. 기층민중의 생존권쟁취투쟁은 반미자주화 구호 아래 전개되는 직접적인 반미투쟁이 아니지만, 그 투쟁이 반미자주화투쟁으로 전화되는 계기를 지녔음은 명백하다. 기층민중의 생존권쟁취투쟁이 반미자주화투쟁으로 전화되는 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한국)의 경제난 악화는 기층민중의 생존권을 더욱 가혹하게 짓밟고 있다. 남(한국)의 경제난은 세계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의 내부모순으로 발생한 세계적 규모의 자본과잉축적과 상품과잉생산이라는 구조적 요인에 의해서 악화되는 것이어서 노무현 정권과 예속자본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경제난은 기층민중에게 희생을 강요할 뿐 아니라, 기층민중을 투쟁으로 불러일으킨다. 조직화되지 못한 기층민중은 경제난으로 희생을 강요당하며 고통을 겪지만, 조직화된 기층민중은 투쟁의 길에 나선다. 경제난이 악화될수록 노동조합, 농민회, 각종 대중단체 등으로 조직된 기층민중이 전개하는 생존권쟁취투쟁이 날로 격렬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경제난이 악화되어 기층민중의 경제투쟁이 양적으로 폭발적 성장을 보이는 경우, 투쟁의 성격이 질적으로 변화된 대중정치투쟁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경제난 악화로 촉발된 생존권쟁취투쟁이 양적으로 폭발하는 것은 그 투쟁이 대중정치투쟁으로 전화되는 결정적 계기이다. 반미자주화투쟁은 남(한국)의 기층민중이 전개하는 대중정치투쟁에서 전략적인 구성부분을 이룬다.
둘째, 1997년 말 외환위기로 치명상을 입은 남(한국) 경제가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로 편입된 이후, 제국주의독점자본은 남(한국) 예속자본의 수탈분량을 앞지르면서 기층민중의 이익을 전면적으로 수탈해오고 있으며, 노무현 정권은 시장경제의 전면개방과 경제체질의 전면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제국주의독점자본이 남(한국) 기층민중의 이익을 수탈하도록 방치하거나 보장해주고 있다. 제국주의독점자본 대 기층민중의 적대적 모순은 여러 가지 복잡한 현상 뒤에 감추어져 전면에 뚜렷이 드러나지 않고 있으나, 그 모순의 심화와 극복이 한(조선)반도 정세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제국주의독점자본 대 기층민중의 적대적 모순이 격화되는 오늘 남(한국)의 현실은 기층민중의 생존권쟁취투쟁이 제국주의독점자본 반대투쟁으로 전개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기층민중이 전개하는 제국주의독점자본 반대투쟁은 반미자주화운동으로 직결된다.
셋째, 기층민중의 생존권쟁취투쟁이 제국주의독점자본 반대투쟁으로 전개되고 더 나아가서 반미자주화운동으로 전화될 수 있는 주체적 조건은 반미자주화운동을 주도해오고 있는 남(한국) 민족민주세력의 투쟁에 의해서 성숙된다.
민족민주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세력과 진보적 대중역량의 집결체인 민주노동당도 기층민중의 생존권쟁취투쟁을 자기의 투쟁으로 여기고 그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민족민주세력과 민주노동당이 생존권쟁취투쟁에 결합하는 정도에 따라 그 투쟁이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성장·전화되는 가능성이 결정된다. 남(한국)의 반미자주화운동은 민족민주세력과 민주노동당이 기층민중과 결합한 대중정치투쟁으로 전개될 때 가장 위력적인 힘을 발휘한다.
4. 3대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될 2005년 새해
남(한국)에서 모순이 격화되는 것은, 진보세력 대 반동세력의 투쟁이 격화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한국(조선)전쟁 이후 반세기 동안 남(한국) 정치권과 사회 각계각층에서 권력을 독점적으로 장악해왔던 반동세력이 요즈음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주한미국군 철군문제, 국가보안법 폐지문제, 노동자 총파업문제, 6.15 공동선언 실현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반동세력은 친미예속적이며 반민중적이며 반통일적인 소동을 벌이고 있다. 진보세력과 반동세력이 서울 도심에서 각각 대규모 정치집회를 동시에 개최하는 경우, 쌍방이 물리적으로 충돌하지나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반동세력은 몰락과 파멸로 밀려갈수록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칠 것이다.
주목하는 것은, 중산층의 지지를 받고 등장한 노무현 정권에게는 반동세력의 광란적 소동을 진압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원래 체질이 허약하고 지지기반이 협소하기 때문에 반동세력이 격렬하게 반발·저항하는 경우, 끝까지 투쟁하여 진압하려는 의지를 뒤로 물리고 그 세력과 적당히 타협·절충하여 자기의 정권을 안정화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 이처럼 중산층의 기회주의적 속성이 중산층 정권에 그대로 전이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반동세력에 맞서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이는 것은 그 세력과 적대적 모순관계에 있는 민족민주세력과 민주노동당과 진보적 대중역량이 맡아야 할 고유한 몫이다. 민족민주세력과 민주노동당과 진보적 대중역량은 오랜 세월동안 반동세력에 맞서 싸운 투쟁경험으로 강인하게 단련된 유일한 사회정치세력이며, 반동세력진압을 자기의 전략목표로 삼고 있는 유일한 사회정치세력이다.
2005년에는 한(조선)반도 정세에 얽혀있는 모순이 격화되어 격렬한 투쟁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그 투쟁은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 대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세력 사이에서, 그리고 남(한국)의 진보세력 대 반동세력 사이에서 벌어질 것이다.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과 남(한국) 진보세력이 분산된 역량을 결집하여 투쟁하면, 사회역사의 발전을 앞당기고 조국통일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놓기 위한 자주, 민주, 통일의 3대투쟁은 승리로 이어질 것이다.
한(조선)민족의 반미자주역량에게 주어진 당면과제는 반미자주화운동의 전술을 마련하고 역량을 조직·확대하는 것이며, 남(한국)의 진보세력에게 주어진 당면과제는 민중생존권쟁취투쟁과 대중정치투쟁의 전술을 마련하고 역량을 조직·확대하는 것이며, 한(조선)민족의 조국통일운동세력에게 주어진 당면과제는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기 위한 전술을 마련하고 역량을 조직·확대하는 것이다. (2004년 12월 4일 작성)
* 이 글은 도쿄에서 일본어로 발행되는 월간지 『통일평론』 2005년 1월호에 기고한 것이다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글을 시작하며2. 남(한국)이 실시한 비밀핵물질실험의 진상3. 1998년부터 2000년까지의 한(조선)반도 정세와 2000년 1-2월의 비밀핵물질실험4. 정보유출 여론공작은 누가 무슨 목적으로 추진하였을까? 5. 글을 맺으며
1. 글을 시작하며
1백37개 나라들이 회원국으로 가입해 있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무총장 무하맷 엘바라데이(Muhamad el-Baradei)는, 핵무장을 공식선언한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다섯 나라 이외에 현재 40여개 이상의 나라들이 핵무기 생산기술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2004년 9월 20일자) 5대 핵무장국 이외에도 일본,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스웨덴, 스위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네덜란드, 벨기에 같은 나라는 핵무기 개발기술만이 아니라 고농축 우라늄과 플루토늄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제원자력기구가 핵무기 개발기술을 갖고 있는 40여개 이상의 나라들이 비밀핵무기개발을 추진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떤 나라가 비밀핵무기개발을 추진하지 못하도록 감독·사찰하는 것은 국제원자력기구의 몫이지만, 어떤 나라가 추진하는 비밀핵무기개발에 관한 정보를 캐내어 국제사회에 폭로하고 국제원자력기구에 제공함으로써 국제원자력기구로부터 특별사찰 또는 강제사찰을 받도록 통제하는 것은 미국이 자의적으로 맡은 몫이다. 그 어떤 나라 또는 국제기구도 미국에게 그러한 통제권을 위임한 적이 없고, 그 어떤 국제협약도 미국에게 그러한 통제권을 부여하지 않았지만, 미국은 제국주의국가답게 자기 마음대로 전세계 나라들의 핵무기 개발을 통제하는 권한을 불법적으로 행사하고 있다.
미국이 그러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전세계 모든 나라를 대상으로 하여 핵무기 개발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방대한 첩보망을 가동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만일 미국에게 그러한 첩보망이 없었다면 핵무기 개발기술을 가진 40여개 나라들이 비밀하게 핵무기를 개발하더라도 그것을 밝혀낼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러므로 어떤 나라가 국제원자력기구의 특별사찰대상 또는 강제사찰대상에 오르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국제원자력기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미국이 결정하게 된다. 주목하는 것은, 미국이 어떤 나라를 국제원자력기구의 특별사찰대상 또는 강제사찰대상으로 지목하는 과정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자의적으로 그리고 음모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이다.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문제를 미국이 자기 마음대로 좌우하는 것은, 이스라엘과 일본의 경우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스라엘은 일찍이 1950년대에 이스라엘 남부 네가브 사막(Negav Desert)의 디모나(Dimona)에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원자로를 가동하는 네가브 핵연구소(Negav Nuclear Research Center)를 세워놓고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으며, 지금은 약 3백기나 되는 핵탄두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이스라엘은 국제원자력기구에 가입하지 않은 채, 제 마음대로 핵무기를 대량 생산하여 실전에 배치해왔는데도, 그리고 이미 1986년에 네가브 핵연구소의 기술자였던 모르데차이 바누누(Mordechai Vanunu)가 영국 일간지 『썬데이 타임스(Sunday Times)』에 이스라엘이 제조한 핵탄두를 촬영한 사진과 관련정보를 공개하여 핵무기 보유사실을 입증·폭로하였는데도,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받기는커녕 미국의 물질·기술적 지원과 정치·군사적 비호를 받으면서 계속하여 핵전력을 증강해오고 있다.
다른 한편, 핵발전소 52개를 가동하고 있는 일본은 미국의 비호와 국제원자력기구의 지원·방조를 받으면서 제 마음대로 우라늄을 농축하고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다. 이바라키현(茨城縣) 도카이무라(東海村)에서는 우라늄 농축시설이 가동중이며, 1985년에 아오모리현(靑森縣) 로카쇼무라(六個所村)에서 착공된 거대한 플루토늄 재처리시설은 곧 완공될 것이다. 이처럼 일본은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면 당장이라도 핵탄두 수백기를 만들 수 있는 엄청난 양의 무기급 핵물질을 가지고 있는데도, 1977년부터 2002년까지 플루토늄을 2백6kg이나 '분실'하였다고 신고하였는데도, 국제원자력기구로부터 특별사찰을 받기는커녕 기존의 정기사찰마저도 제대로 받지 않게 되었다. 최근 일본 문부과학성의 발표에 따르면, 2004년 9월 15일부터 일본에 있는 1백7개의 핵시설과 5천여개의 관련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의 정기사찰 횟수를 절반 이하로 줄이는 '통합보장조치'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일본에게 적용된다고 한다. (『연합뉴스』 2004년 9월 15일자)
중동평화를 짓밟는 깡패국가 이스라엘과 아시아 침략무력을 증강하는 전범국가 일본에게 그처럼 상식에도 어긋나는 불법적인 특혜와 특권이 주어지는 것은, 전적으로 미국의 묵인과 방조에 의해서 가능한 일이다.
반면에, 미국은 핵무기는 고사하고 재래식 무장도 변변하게 갖추지 못한 이라크를 국제원자력기구의 강제사찰대상으로 올려놓고 사찰을 명분으로 자주권을 짓밟았고, 자주권 침해에 저항하는 사담 후세인 정권에 대해서 기다렸다는 듯이 무력공격을 가하여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라크를 강제로 점령한 바 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횡포와 압박을 견디다 못한 리비아는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미국에게 굴복하여 국제원자력기구의 특별사찰을 받아들였다. 이라크를 침략하고 리비아를 굴복시킨 미국이 그 다음으로 노리는 대상은 이라크와 숙명적 대결관계에 있는 인접국 이란이다. 지금 미국은 이란을 국제원자력기구의 강제사찰대상에 올려놓으려는 정치음모를 꾸미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미국이 국제원자력기구를 앞세워 반미성향의 아랍국가들에게 핵사찰 광풍을 몰아치는 가운데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동방에서 터졌으니, 그것이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이 국제사회에 폭로된 사건이다. 예상치 못한 지역에서 예상치 못한 시기에 일어난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 폭로사건은 한(조선)반도 정세에는 물론 국제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국제사회의 의혹에 찬 눈초리는 노무현 정부에게 집중되었으며, 조·미관계와 남북관계, 그리고 6자회담 추진문제는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두 가지 문제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남(한국)이 실시한 비밀핵물질실험의 진상을 파악하는 문제, 그리고 누가 무슨 목적으로 비밀핵물질실험을 국제사회에 폭로했는지를 추적하는 문제다.
2. 남(한국)이 실시한 비밀핵물질실험의 진상
내외언론의 보도내용을 종합하면, 남(한국)은 1982년 4-5월과 2000년 1-2월에 각각 비밀핵물질실험을 실시하였다. 18년 시간격차를 두고 실시되었던 두 종류의 핵물질실험이 2004년 9월초에 누군가에 의해서 한꺼번에 폭로되었다. 내외언론의 보도내용을 종합하여 재구성한 핵물질실험의 진상은 다음과 같다.
먼저, 1982년에 실시된 비밀핵물질실험은 전두환 정부의 지시에 따라 실시되었으며, 그 실험에서 추출된 플루토늄의 양과 순도는 비밀로 취급되었다. (『아사히신붕(朝日新聞)』 2004년 9월 9일자) 전두환 군사독재정부의 승인 또는 지시에 따라 1982년 4-5월에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었던 한국원자력연구소(Korea Atomic Energy Research Institute)에서 실시된 플루토늄 추출실험은 트리가(TRIGA)라는 이름이 붙은 연구용 원자로에서 나온 폐연료봉에서 적은 양의 플루토늄을 추출한 것이었다. 그 연구용 원자로는 1995년에 수명이 다해 가동을 중단하였고, 해체작업이 거의 완료된 상태에 있다. 해체과정에서 나온 핵물질과 해체된 시설은 미국으로 거의 옮겨졌다. 그 연구소 시설은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대상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정기사찰을 받아왔다.
노무현 정부가 밝힌 바에 따르면, 1982년 4-5월에 실시된 플루토늄 추출실험은 1983년에 국제원자력기구에 신고되었는데, 신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작성담당자가 실수로 사용후 핵연료를 새로운 핵연료라고 잘못 적어 넣었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는 1982년에 실시하였던 플루토늄 추출실험에 관한 자료와 추출된 플루토늄이 남아있지 않으며, 당시 추출된 플루토늄은 밀리그램 단위의 극소량이라고 밝혔다. (『뉴욕타임스』 2004년 9월 9일자)
사찰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지난 시기에는 정기사찰을 실시했어도 플루토늄 추출실험을 실시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다가, 환경견본추출조사(environmental sampling test)라는 새로운 기법이 개발되어 정기사찰에 도입된 뒤에 정기사찰을 실시하게 되니까 22년 전에 실시되었던 플루토늄 추출실험이 적발된 것이다.
국제원자력기구가 한국원자력연구소 시설에 대한 정기사찰에 환경표본조사기법을 처음으로 도입하였던 때는 1997년이었는데, 그 조사에서 플루토늄 추출실험이 실시되었다는 단서를 발견하고 1998년에 김대중 정부에 사실확인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그 추출실험에 관한 자료를 찾을 수 없다고 밝혔다. 국제원자력기구는 2003년에 다시 환경표본조사를 실시하고, 노무현 정부에게 사실확인을 요청하였으나, 노무현 정부는 극소량의 플루토늄이 추출되었음이 밝혀졌다고 답변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2004년 3월 플루토늄 추출실험에 관한 보고서를 국제원자력기구에 제출하였고, 국제원자력기구는 2004년 8월 29일부터 9월 4일에 세 번째로 7명으로 구성된 사찰단을 남(한국)에 파견하여 환경표본조사를 실시하였다. (『연합뉴스』 2004년 9월 9일자, 『뉴욕타임스』 2004년 9월 9일자) 국제원자력기구는 2004년 9월 19일부터 26일까지 네 번째 사찰을 실시하였으며,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2004년 11월말에 열리는 국제원자력기구 이사회에 제출할 것이다.
주목하는 것은, 1982년에 전두환의 지시로 실시되었던 비밀핵물질실험이 이전에 박정희의 지시로 추진되었던 핵무기 개발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1970년대 초 미국은 핵무기 개발사업을 비밀히 추진하기 시작한 박정희에게 압력을 가해 1975년에 핵확산금지조약을 비준하도록 강제하였고, 1976년 1월 22일 서울에 급파된 국무부 관리들은 박정희가 미국의 뜻과 어긋나게 핵무기 개발을 계속 추진할 경우, 남(한국)의 핵발전소에 대한 핵연료 공급을 중단하고 주한미국군의 핵무기를 철수하겠다고 협박하였다. (『프레시안』 2004년 9월 3일자) 그러나 박정희는 핵무기 개발사업을 계속 밀고 나갔고, 결국 핵물질 생산시설 설계가 완성된 시기인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쏜 총탄에 살해되었다. 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의 배후에서 미국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물적 증거는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으나, 핵물질 생산시설 설계를 완성한 시점과 박정희가 살해된 시점이 일치하는 것은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저지하려고 하였던 미국이 살해사건에 개입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박정희 피살 직후에 군사정변을 일으켜 집권한 전두환 군사독재정부가 처한 매우 불안정한 정세는 박정희 군사독재정부가 처했던 정세보다 더 악화되었으면 악화되었지 나아진 것이 없었다. 위기상황에 빠져있던 전두환은 미국이 해체·폐기하라고 압력을 가했던 핵무기 개발사업을 3년 동안 그대로 붙들고 있었다. 1980년 12월 전두환은 서울에 있는 한국원자력연구소를 대전의 대덕단지로 옮기고, 1976년 12월에 설립된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을 그 연구소에 흡수·통합시킨 뒤에 한국에너지연구소라는 위장간판을 달아놓았으며, 1982년 4-5월에 플루토늄 추출실험을 실시하도록 지시하였다.
1980년대 전반기에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일했던 미국 정부관리의 말을 인용한 『아사히신붕』 2004년 9월 9일자 보도에 따르면, 당시 레이건 정부는 전두환의 지시로 플루토늄 추출실험이 실시되었다는 정보를 파악하고 즉시 중지하라고 요구했으며, 전두환은 1983년 11월 남(한국)을 방문한 레이건에게 플루토늄 추출실험을 중지하겠다고 약속하였다고 한다.
다음으로, 2000년에 실시된 비밀핵물질실험의 진상은 다음과 같다. 『뉴욕타임스』 2004년 9월 9일자 보도에 따르면, 우라늄을 농축하기 위하여 동위원소(isotope)를 분리하는 핵물질실험은 2000년 1-2월에 실시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우라늄을 농축하기 위해서 동위원소를 분리한 핵물질실험이었으며, 대덕단지에 있는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실시되었다. 이것은 종전과는 다른 종류의, 첨단기술을 동원한 비밀핵물질실험이 김대중 정부 시기에 실시되었음을 말해준다.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원자력연구소에서 플루토늄 추출실험이 실시되었던 1982년에 다른 나라에서 수입한 인광석에서 추출된 천연우라늄이 원자력연구소에 공급되었는데, 원자력연구소는 그 천연우라늄을 변환하여 1백50kg의 금속우라늄을 만들었다. 2000년 1-2월에 실시된 비밀핵물질실험은 원자력연구소가 18년 동안이나 보관해오던 금속우라늄 가운데서 3.5kg을 분리실험에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 남아있는 금속우라늄은 1백34kg밖에 되지 않으므로, 12.5kg은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행방이 묘연한 12.5kg의 금속우라늄이 분실된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비밀핵물질실험에 사용된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1982년의 비밀핵물질실험이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실시되었던 것과 달리, 노무현 정부는 2000년에 실시된 비밀핵물질실험이 핵과학자들의 학문적 호기심이 발동하여 진행한 연구활동이었으며, 김대중 정부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2000년에 실시된 비밀핵물질실험이 노무현 정부가 주장한 것처럼, 과연 김대중 정부와 무관한 것일까? 비밀핵물질실험을 핵과학자들의 단순한 연구활동으로 보느냐 아니면 남(한국) 정부당국의 지시 또는 승인에 의하여 추진된 정책적 연구활동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사건의 본질은 완전히 달라진다.
2000년 1-2월에 실시된 비밀핵물질실험과 관련하여 내외언론들이 보도한 내용을 종합·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1) 노무현 정부는 남(한국)을 방문한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에게 이전에 밝히지 않았던, 레이저를 사용한 핵연료 농축프로그램(nuclear fuel enrichment program)에 관한 정보를 넘겨주었다. (『넬슨 리포트(Nelson Report)』 2004년 9월 1일자)
2) 레이저를 사용한 핵연료 농축프로그램이란, 전문용어로 말하면, 원자핵 증발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atomic vapor laser isotope separation)를 이용한 기술을 뜻한다. 이 기술의 원형은 원래 핵무기 제조기술을 개발하는 미국의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Lawrence Livermore National Laboratory)에서 개발된 것인데, 나중에 미국 농축회사(U.S. Enrichment Corporation)로 이전되었다. 이 회사는 원자핵 증발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기술을 2004년까지 상용화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개발사업을 추진했으나, 1999년 6월에 경제성이 없다고 판명되어 기술개발을 중단한다고 발표하였다. 그 기술을 개발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17억 달러 이상을 투자한 미국 동력자원부(Department of Energy)는 핵무기 개발을 위해 그 기술을 사용할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 그 기술은 프랑스, 일본, 러시아에서도 연구되어왔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원자핵 증발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는 설비와 공정을 은폐하기 쉬울 뿐 아니라, 경비가 너무 많이 들어가고 고도의 정교한 기술을 요구하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에, 민수산업에는 적합하지 않고 정부가 추진하는 핵무기 개발사업에 포함된다. (『뉴욕타임스』 2004년 9월 3일자)
3) 국제원자력기구 외교관들은 2004년 9월 둘째 주간에 있었던 여러 차례의 언론대담에서 남(한국)의 핵과학자들이 얻어낸 우라늄 농축도가 이란이 얻어낸 우라늄 농축도보다 네 배나 높은 것이었다고 밝혔다. 2002년에 이란의 핵과학자들은 우라늄을 약 15%로 농축하였던 것에 비해서, 2000년에 남(한국)의 핵과학자들은 우라늄을 77%로 농축하였는데, 그것은 핵폭발에 요구되는 수준의 고농축에 성공한 것이었다. (『워싱턴포스트』 2004년 9월 12일자) 그러나 남(한국) 정부당국은 우라늄을 고농축하였다는 것을 부인하였다. 과학기술부 원자력국장 조청원은 2004년 9월 2일 공식발표에서 우라늄 농축도를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4년 9월 3일자)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은 우라늄 농축도가 평균 10%밖에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남(한국) 정부당국은 추출한 농축우라늄이 겨우 0.2g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으나, 문제는 얼마나 많은 양을 추출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핵폭발에 요구되는 수준의 고농축 기술개발에 성공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4) 국제원자력기구 외교관들은 이란이 우라늄농축실험을 실시하기 2년 전에 남(한국)이 핵확산금지조약을 위반하면서 그러한 핵물질실험을 실시하였으며, 이란의 우라늄농축실험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 2년 동안 그런 실험을 실시하였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워싱턴포스트』 2004년 9월 12일자)
5) 남(한국) 정부당국은 핵물질실험을 은폐하고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방해하였다. 국제원자력기구 외교관들은 국제원자력기구가 1998년 이후 지난 6년 동안 남(한국)이 핵확산금지조약을 위반하였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고 밝혔다. 국제원자력기구는 2003년 12월에 남(한국) 정부당국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남(한국) 정부당국은 2000년에 비밀핵물질실험을 실시한 뒤에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공식적으로, 반복적으로(officially and repeatedly) 방해하였을 뿐 아니라 국제원자력기구에게 허위사실을 신고하였다. (『워싱턴포스트』 2004년 9월 12일자) 국제원자력기구가 2001년에 한국원자력원구소에 대해 사찰을 실시하려 하자 김대중 정부는 이를 거부하였다. 남(한국) 정부당국은 2001년부터 2년 동안 적어도 두 차례나 국제원자력기구의 정기사찰을 거부하였다. 남(한국)은 2004년 2월 국제원자력기구 안전조치 추가의정서를 비준하였고, 그에 따라 지난 시기에 실시한 핵물질실험에 관하여 솔직하게 보고하였다. 2004년 8월 29일부터 9월 4일까지 국제원자력기구가 사찰을 실시하는 동안, 노무현 정부는 이전에 핵물질실험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에 관한 자료를 제공하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 2004년 9월 12일자) 이러한 남(한국) 정부당국의 태도는, 남(한국) 정부당국이 국제원자력기구에게 자발적으로 협조하였다고 칭송하였던 미국 정부관리들의 말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2004년 9월 12일자)
일련의 사건에서 드러난 의혹은 다음과 같다.
1) 1999년 6월에 미국 농축회사가 원자핵 증발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기술을 상용화하는 것을 포기하고 기술개발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때로부터 여섯 달 뒤인 2000년 1-2월에 남(한국)의 핵과학자들이 그 기술을 사용하여 비밀핵물질실험을 실시하였다. 남(한국)의 핵과학자들은 국제정보에 어두워서 미국에서 여섯 달 전에 개발사업이 중단된 것도 모르고 핵물질실험을 실시하였을까?
2) 원자핵 증발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에는 많은 경비가 들어가고 고도의 정교한 기술이 요구된다. 그런데 남(한국)의 핵과학자들은 왜 그처럼 힘든 실험을, 그것도 미국이 개발을 중단한다고 발표한 뒤에 실시하였을까? 학문적 호기심이 발동하였기 때문이었을까?
3) 우라늄 농축실험은 국제사회에 매우 민감한 정치문제를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미국을 심히 자극하여 한·미 관계에 심각한 파장을 일으킨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들도 알만한 상식인데, 남(한국)의 핵과학자들은 그런 상식도 모르고 핵물질실험을 실시했을까? 아니면 남(한국)의 핵과학자들은 그런 상식쯤은 무시하고 만용을 부렸던 것일까?
4) 만일 2000년의 비밀핵물질실험이 핵과학자들의 단순한 연구활동이었다면, 남(한국) 정부당국은 왜 그 연구활동을 감추려고 하였을까? 남(한국) 정부당국이 국제원자력기구의 정기사찰을 거부하면서까지 연구활동을 감추려고 하였다는 사실은, 그것이 단순한 연구활동이 아니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5) 원자핵 증발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기술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고, 미국을 비롯한 몇몇 기술선진국들에서 개발 중인 것이다. 그 기술을 개발하는 데는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공정이 요구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남(한국)의 핵과학자들이 어떻게 그러한 고도의 기술을 사용하여 핵물질실험을 실시할 수 있었을까? 한국원자력연구소는 미국의 관련 연구기관으로부터 지원과 방조를 받지 않고 그러한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핵물질실험을 실시할 수 있었을까?
미국 정부관리들의 말에 따르면, 미국 정부당국은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참가한 핵과학자들이 미국의 핵시설에서 훈련을 받았는지, 그리고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사용된 기술이 미국으로부터 도입된 것인지를 별도로 조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워싱턴포스트』 2004년 9월 3일자)
다른 나라의 경험을 보더라도 핵물질실험은 몇몇 핵과학자들의 호기심이 발동하여 추진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과 극소수의 최고위급 관리들 몇 사람이 극비의 정치적 결정으로 추진된다. 남(한국)도 예외가 아닐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2000년의 비밀핵물질실험을 사전에 승인하였는지 또는 그 실험결과에 관한 사후보고를 받았는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의혹에 쌓여있는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제원자력기구에게는 김대중 정부가 그 핵물질실험에 개입하였는지를 조사할 권한이 없다.
내외언론들은 국제원자력기구가 몇 해 전에 새로 도입한 환경표본조사에 의해서 1982년 4-5월에 실시된 플루토늄추출실험이 처음으로 드러났다고 보도하였지만, 미국 국가정보기관은 당시에 그 비밀실험에 관한 정보를 파악하였고 전두환에게 압력을 넣어 실험을 중단시킨 바 있었다. 그런데 문제의 심각성은, 2000년 1-2월에 실시된 우라늄분리실험이 국제원자력기구의 환경표본조사로도 밝혀낼 수 없는 것이고, 미국 국가정보기관만이 파악하고 있다는 데 있다. 미국 국가정보기관은 2000년의 우라늄분리실험에 관한 정보를 오래 전에 파악하였으면서도 최근에 미국 국방부 고위관리의 여론공작에 의해서 그 정보가 언론에 폭로되기 전까지 묵인해왔다. 극비의 흑막 뒤에 감추어져 있는 남(한국)의 핵물질실험에 관련된 정보는 미국의 여론공작에 의해서 때로 한 귀퉁이를 드러내곤 하는 것이다.
3. 1998년부터 2000년까지의 한(조선)반도 정세와 2000년 1-2월의 비밀핵물질실험
지난 시기의 경험은, 남(한국) 정부가 위기상황에 처할 때마다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였음을 말해준다. 세상에 알려진 대로, 1970년대 초 위기상황에 처한 박정희 군사독재정부는 핵무기개발을 시도하였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닉슨 정부가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중국과 수교를 전제로 한 정치회담을 시작하면서 주한미국군을 일방적으로 감군하였던 급격한 정세변화 속에서 박정희 군사독재정부는 심각한 위기상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주한미국군 감군조치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하였던 박정희 군사독재정부는 1972년에 남북대화를 추진하면서 막후에서는 비밀핵무기개발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국무부 정보분석국 관리는 1972년 7월 7일자 보고에서 주한미국군 감군은 남(한국)의 대북(조선) 입지를 완전히 침식해버릴 것이므로 주한미국군의 규모에 어떤 변동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부분적인 감축도 박정희의 대북(조선) 협상력과 정치적 지위를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므로 결국 미국 정부와 의회 모두 주한미국군의 추가감군을 추진하기는 극히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미 국무부 비밀문서로 밝혀진 7.4 남북공동성명 내막-박정희 권력욕, 미 압박이 대북협상 물꼬 텄다」, 『신동아』 2004년 1월호) 당시 박정희가 주한미군 감군조치에 대해 얼마나 심하게 반발하였는지는 그가 1971년 9월 20일 닉슨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있다.
1972년에 박정희 군사독재정부가 처했던 상황이 총체적인 위기상황이었던 것처럼, 2000년에 김대중 정부가 처했던 상황도 그에 못하지 않은 위기상황이었다. 2000년 전후의 한(조선)반도 정세의 겉모양만 훑어보아서는 당시 김대중 정부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의 기간에 김대중 정부에게 발생하였던 정치, 군사, 경제적 위기는 다음과 같다.
1) 당시 김대중 정부는 군사적 위기에 빠지고 있었다. 그 위기감은 북(조선)과 미국에 의해서 각각 조성된 것이다. 북(조선)은 1998년 5월 파키스탄에서 지하핵폭발실험을 성공적으로 실시하고, 같은 해 8월 인공위성 광명성 1호를 탑재한 우주발사체 백두산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하였다.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와 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가 현실로 입증된 1998년은 북(조선)의 군사력이 남(한국)의 군사력에 비해 전략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이 드러난 시기였다.
다른 한편, 미국 국방부의 최종평가실(Office of Net Assessment) 책임자인 노회한 군사전략가 앤드류 마샬(Andrew W. Marshall)의 지휘 아래 학자, 전직 정부관리, 현직 국방부 관리들로 구성된 전략연구집단이 작성한 군사전략보고서 「아시아 2025(Asia 2025)」가 1999년 여름에 발표되었다. 그 보고서는 주한미국군과 주일미국군의 철군을 예견하면서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첫째, 코리아의 통일이 실현되는 것과 더불어 민족주의적 감정이 휘몰아치면, 통일된 코리아는 미국을 몰아낼 것(expel)이다. 둘째, 일본은 자국의 안보와 자율성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과 협상을 추진하면서 주일미국군 철군에 동의할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2000년 3월 17일자) 주한미국군 철군을 예견하는 전략보고서가 작성된 것이야말로 김대중 정부에게 커다란 심리적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2) 당시 김대중 정부는 정치적 위기에 빠지고 있었다. 북(조선)은 제2차 인공위성 발사를 준비하면서 클린턴 정부를 강하게 압박하였다. 결국 클린턴 정부는 1999년 5월 하순 대통령 특사 윌리엄 페리(William J. Perry)를 평양에 급파하였고, 같은 해 9월 초 베를린에서 열린 조·미 정치회담에 나왔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조·미 관계개선을 목표로 하는 이른바 '페리보고서'를 연방의회에 제출하였다. 이것은 북(조선)의 강한 압박공세로 궁지에 몰린 클린턴 정부가 김대중 정부를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조·미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한(조선)반도의 정치·군사문제를 해결하는 협상과정에서 완전히 소외당하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의 시각에는 그러한 정치·군사적 정세변화가 한·미 동맹체제의 동요로 비쳤을 것이다.
3) 당시 김대중 정부는 경제적 위기에 빠져 있었다. 남(한국) 경제는 1997년 말에 발생한 외환위기로 치명타를 입었으며, 1998년에는 국제통화기금(IMF)에게 경제주권을 넘겨주는 비극적인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파산상태에 빠져 들어간 남(한국) 경제는 회복 가능성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주목하는 것은, 김대중 정부의 대통령과 고위관리들이 1999년부터 주한미국군 주둔문제를 집중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남(한국) 정치사에서 김대중 정부는 주한미국군 문제를 공개적으로 가장 심각하게 검토한 최초의 정부였다.
한(조선)반도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는 경우, 비무장지대에 유엔평화유지군을 주둔시키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으로 작성한 외교통상부 내부문건이 언론에 유출된 것은 1998년 12월의 일이었다.
1999년 4월 1일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임동원은 기자들에게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하면서 "북한이 큰 소리를 내고 있으나 주한미군 철수 주장은 주민통제를 위한 레토릭(수사)이다. 사실 북한은 남한이 북침할 것을 우려해 미군이 남북 간의 안전판 역할을 해주길 바라고 있다. 다만 현재 북한과 미국이 적대관계에 있기 때문에 문제다. 북한은 미군이 적군이 아닌 평화유지군으로 남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주한미군의 지위변경 문제는 4자회담에서 논의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4월 6일에도 비슷한 내용을 되풀이하면서 "미국은 이를 비밀로 하려고 한다. 노출되면 협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협상하려는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한편, 1999년 4월 6일 김대중은 청와대에서 육군, 공군 장성들로부터 진급 및 보직신고를 받는 자리에서 "북한은 미군이 평화군이라면 (한국에) 주둔해도 좋다며 미군의 존재를 인정하는 말을 했다.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고 있지는 않지만 북한이 처음으로 이러한 의사를 표시했다. 북한도 그 동안 미군철수를 주장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중·일 간의 극한 대립이나 동북아의 세력균형 붕괴를 우려, 이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의 침략을 막는 것뿐 아니라 동북아의 세력균형과 현상유지를 위해 통일 후까지도 미군이 주둔해야 한다. 미군이 없을 때 중국과 일본의 군비경쟁이 심해지며 그 경우 우리가 가장 큰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동북아, 한반도, 우리 민족을 위해서도 미군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1999년 4월 8일자)
그로부터 이틀 뒤인 4월 8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47차 국가안보회의 상임위원회는 주한미국군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밝히는 보도자료를 배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주한미군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주둔하는 것으로, 이는 전적으로 한·미 간의 문제이며 남북 간에나 미북 간에 논의될 사안이 아니다. 한반도에 침략의 위험이 있는 한 주한미군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2) 평화체제 구축문제에 실질적인 진전이 이루어질 때 한반도의 모든 군대의 구조나 배치문제 논의가 가능하다. 이때에는 남북한의 군사력과 주한미군을 함께 논의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는 4자회담에 임하는 한·미 공동의 입장이다.
3)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구축되고 통일이 이루어진 후에도 미군이 동북아지역의 안정자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한반도에 주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김대중 정부의 대통령과 고위관리들이 주한미국군 문제에 관하여 그처럼 횡설수설 쏟아내었던 말들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을 쏟아낸 것은, 1998년에 북(조선)의 지하핵폭발실험과 우주발사체 발사가 성공한 이후, 조·미 관계가 북(조선)의 전략에 따라 변화되어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주한미국군이 철군하지나 않을까 하는 안보불안을 반영한 행동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주한미국군의 영구주둔에 매달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당시의 정세는 김대중 정부에게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2000년 1-2월에 실시된 비밀핵물질실험이 김대중 정부가 심각한 위기상황에 빠져 있었던 가운데 실시되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2000년 3월 9일에 독일을 방문하고 있던 김대중이 남북경제협력을 위한 남북당국자회담을 개최하자는 '베를린 선언'을 발표하였고, 같은 날 싱가포르에서 조선아세아평화위원회와 국가정보원이 각각 파견한 인사들이 극비회동을 진행하였던 원인과 배경을 따져보면, 김대중 정부에게 그 동안 없었던 조국통일에 대한 의지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1998년 이후 심화되어온 총체적 위기상황을 남북대화로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이었다.
명백하게도, 남(한국)은 레이저기술을 이용한 비밀핵물질실험을 통하여 무기급 우라늄을 농축하는 첨단기술을 개발하였다. 30년 전 박정희 군사독재정부 시기의 핵물질생산기술과 비교해서, 김대중 정부 시기의 핵물질생산기술은 훨씬 앞선 것이었다. 남(한국)은 그 동안 미국의 비호와 지원 아래 핵물질생산기술을 축적해왔던 것이다. 이것은 남(한국) 정부당국이 언제든지 정치적 결정을 내리기만 하면 자체의 기술로 무기급 핵물질을 생산할 수 있는 높은 기술수준에 도달하였음을 뜻한다.
물론 무기급 핵물질을 생산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무기급 핵물질을 개발하는 것과 더불어 정교한 기폭장치도 개발해야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 남(한국)의 군사과학기술수준으로 보아서, 정교한 기폭장치를 개발하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만일 남(한국) 정부당국이 미국의 감시를 피할 수만 있다면, 자체의 기술로 비밀하게 핵무기를 제조할 가능성이 있음을 뜻한다. 원자핵 증발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기법은 비교적 손쉽게 은폐할 수 있는 것이므로, 남(한국) 정부당국이 미국의 감시를 따돌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미국이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대해서 크게 우려하면서 남(한국)의 핵공학 연구활동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의 통제를 더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2004년 9월 27일 국제원자력기구의 외교소식통들이 전한 바에 따르면, 국제원자력기구는 2000년 1-2월에 실시된 비밀핵물질실험이 지난 1970년대에 추진하다 미국의 압력으로 중단된 핵무기 개발사업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국제원자력기구는 김대중 정부가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진 과거 정부가 추진한 핵무기 개발사업에서 얻은 기술을 유지하기 위해 비밀연구활동을 계속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연합뉴스』 2004년 9월 28일자)
4. 정보유출 여론공작은 누가 무슨 목적으로 추진하였을까?
세상에 알려진 대로,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을 국제사회에 폭로한 것은 미국이다. 미국이 전세계에 있는 모든 핵시설과 전세계 핵과학자들의 핵공학 연구활동을 감시하는 방대한 첩보망을 가동하고 있으므로,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정보도 그 첩보망에 포착되었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미국이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을 국제사회에 폭로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모호한 표현이다. 누가 어떤 경로로, 무슨 목적으로 폭로하였는지를 밝혀야 하는데, 그 폭로사건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조금 낯선 이름의 전자언론매체는 『넬슨 리포트(Nelson Report)』다.
인터넷매체 『토킹 포인츠 메모(Talking Points Memo)』의 편집자인 조쉬 마샬(Josh M. Marshall)이 미국 연방의회 소식지인 『힐(The Hill)』 2003년 2월 12일자에서 묘사한 대로, 『넬슨 리포트』는 "워싱턴 디씨에서 아시아정책을 다루는 사람들 사이에서 경전으로 통하는 일간소식지(a daily newsletter that is the bible of D.C.'s Asia Policy hands)"다. 전자우편(email)을 통해서 전달되는 『넬슨 리포트』의 편집자 크리스토퍼 넬슨(Christopher Nelson)은 현재 쌔뮤얼스 인터내셔널(Samuels International)이라는 기업의 수석부사장이다. 그는 38년 전인 1966년부터 워싱턴 정가에서 연방의회 외교문제 분석가로, 전문언론인으로 일해오고 있으며, 카터 정부시기에 연방상원 다수당 대표의 수석고문으로, 연방상원 민주당 정책위원회와 연방하원 아시아 외교소위원회에서 중·미 관계 정상화 정책에 관여한 경력을 가졌다.
『넬슨 리포트』라는 특수한 정보전달매체에 주목하는 까닭은, 그 매체가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정보만이 아니라 북(조선)의 우라늄농축에 관한 '정보'도 공개하였기 때문이다. 그 매체는 2003년 1월 7일자 보도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클린턴 정부관리들이 업무인수에 나선 부시 정부관리들에게 북(조선)의 우라늄농축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였고, 동시에 『넬슨 리포트』 편집장 크리스토퍼 넬슨에게 그 '정보'를 넘겨주어 보도하도록 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넬슨 리포트』가 북(조선)의 우라늄농축에 관한 '정보'를 보도한 때로부터 일주일 뒤에 클린턴 정부의 또 다른 고위관리가 조쉬 마샬에게도 그 '정보'의 핵심부분을 확인해주었다고 한다. (Josh Marshall, "Big Talk and Little Stick: Our North Korean Folly", The Hill, 2004년 2월 12일자)
2004년 9월 1일 『넬슨 리포트』는 '비밀핵프로그램'이라는 매우 자극적인 표현이 들어간 「남(한국), 국제원자력기구에게 비밀핵프로그램을 밝히다(S. Korea Discloses Secret Nuclear Program to IAEA)」라는 제목으로 작성된 기사를 내보냈다. 그 기사에서 주목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노무현 정부가 국제원자력기구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2000년에 실시한 비밀핵물질실험은 정부가 운영하는 실험실에서, 정부의 재정지원이나 허락을 받지 않고 진행된 '일탈프로그램(rogue program)'이었다고 한다.
2) 미국의 전문가들은 2000년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보도를 접하고 당황(consternation)과 놀라움을 표시하였으며, 현재 노무현 대통령이나 이전의 김대중 대통령이 비밀핵물질실험을 인지하였거나 승인하였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3) 『넬슨 리포트』는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정보를 부시 정부의 최고위급 관리 소식통들(the highest official sources)로부터 확인(confirm)할 수 있었다.
4) 관련 소식통들 가운데 한 소식통은, 이란의 핵문제가 매우 민감해진 상황에서, 그리고 북(조선)의 핵문제를 위한 6자회담을 진행하는 조건에서 드러난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은 "거대한 지정학적 파장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정치적 돌발사건(political bombshell)"이라고 묘사하였다.
『넬슨 리포트』가 남(한국)의 우라늄농축실험에 관한 사실을 보도한 때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2004년 9월 8일 부시 정부의 고위관리는 남(한국)이 20여년 전에 플루토늄 추출실험을 비밀히 실시하였다는 정보를 『합동통신(Associated Press)』에 흘려주어 보도하게 하였다.
이러한 정보유출이 부시 정부의 고위관리들이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진행한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들이 추진한 것은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을 정치문제로 부각시키려는 여론공작이었다. 그 이후의 사태는 그들의 의도대로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은 매우 민감한 정치문제로 떠오르면서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부시 정부의 고위관리가 『합동통신』에게 남(한국)이 20여년 전에 플루토늄 추출실험을 비밀하게 실시하였다는 정보를 흘려주어 보도하였던 날, 『로이터통신(Reuters)』은 부시 정부 고위관리의 말을 인용하여 "남(한국)이 4년 전에 실시했던 우라늄 농축실험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다루어질 것 같다. 그 문제를 유엔안보리에 회부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그것은 남(한국)에 제재를 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비확산에 대한 일관된 접근태도를 확립하고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하였다. 『워싱턴포스트』 2004년 9월 10일자 기사도 국제원자력기구가 유엔안보리에 보고될 수 있는, 남(한국)이 위반한 6가지 사항을 파악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군비통제협회(Arms Control Association) 사무총장 대릴 킴벌(Daryl G. Kimball)은 남(한국)이 1975년에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하였다고 할지라도, 핵선택권(nuclear option)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는 의혹을 받았다고 지적하였다. (『뉴욕타임스』 2004년 9월 8일자)
국제원자력기구 사찰관 출신으로 현재 워싱턴의 과학 및 국제안보연구소(Institute for Science and International Security) 대표인 데이빗 올브라이트(David Albright)는 "남(한국)이 우라늄 농축프로그램을 보고하지 않고 유지하였을 뿐 아니라, 무기급에 근접한 핵물질을 실제로 제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핵무기 제조능력을 개발하기를 원했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하고, 남(한국)의 플루토늄 추출실험에 대한 의혹이 명백하게 해소되지 않는다면 남(한국)은 '작은 이란'이 될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워싱턴포스트』 2004년 9월 3일자, 『연합뉴스』 2004년 9월 10일자)
사태가 매우 심각하게, 그리고 자기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직감한 노무현 정부는 2004년 9월 9일 1982년 4-5월에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었던 한국원자력연구소(현재는 대전으로 이전되었음)에서 플루토늄 추출실험이 실시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2004년 9월 18일 노무현 정부는 '핵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4원칙'을 발표하여, 핵무기 개발의사가 없음을 확인하였다. 그것은 비밀핵물질실험이 폭로되어 궁지에 몰린 노무현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그렇다면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극비정보를 미국 언론에 흘려준 여론공작은 누가 추진한 것일까? 다른 나라의 핵물질실험에 관한 극비정보를 다루는 것은 미국 정부의 아무 단위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극비정보를 다룰 수 있는 단위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미국 국방부 산하 국방정보국(DIA), 미국 국무부 산하 정보조사국(BIR, Bureau of Intelligence and Research)이다. 여론공작을 추진한 대상에 대한 혐의는 중앙정보국, 국방정보국, 정보조사국으로 좁혀진다.
그런데 미국 정부 당국자의 말을 인용한 『아사히신붕』 2004년 9월 7일자 워싱턴발 보도에 따르면, 일단 정보조사국은 그 혐의대상들 가운데서 제외되는 것으로 보인다. 『아사히신붕』은 노무현 정부가 2004년 8월말 외교통상부 관리를 극비리에 워싱턴으로 급파하여 우라늄 분리실험문제에 관하여 미국 국무부에 해명하였으며, 또 다른 당국자는 우라늄 분리실험문제에 관한 해명이 남(한국) 정부당국의 요청으로 국무부 이외에 다른 정부부처에는 전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가 2004년 8월말에 정부관리를 파견하여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해서 해명하였다면,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문제는 『넬슨 리포트』에 보도되기 이전에 이미 미국 정부당국이 그 문제를 노무현 정부에게 제기하였던 것이 분명하며, 또한 노무현 정부가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해서 미국 국무부에게만 해명하였다는 사실은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 정부당국이 국무부라는 점을 강하게 뒷받침해준다.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이 폭로된 직후 미국 국무부가 보여준 반응을 살펴보면, 국무부가 이미 노무현 정부로부터 해명을 받았으므로 그 문제를 더 이상 정치문제로 삼지 않으려고 한 것이 드러난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 리처드 바우처(Richard A. Boucher)는 "남(한국)이 과거에 행한 것은 행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것은 제거되어야 할 행동이었다."고 지적하면서도, "우리는 남(한국)이 투명한 방식으로 그 문제를 처리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만족하게 생각한다."고 말함으로써(『뉴욕타임스』 2004년 9월 8일자),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을 정치문제로 삼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또한 미국 국무부의 한 당국자는 플루토늄 추출실험이 핵무기 개발계획이었다는 증거는 없다고 지적하면서 미국 정부는 당시 남(한국)에는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요구되는 장비, 기술, 물질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2000년에 실시된 우라늄 분리실험도 1982년에 실시된 플루토늄 추출실험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4년 9월 10일자) 그의 발언에서는 파문을 일으킨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을 수습하려는 인상마저 풍겼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할 때, 2004년 9월 1일 『넬슨 리포트』에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정보를 흘려준 "미국 정부의 최고위급 관리 소식통들"은 정보조사국으로부터 관련정보를 얻는 국무부 관리가 아니라 국방부정보국으로부터 관련정보를 얻는 국방부 관리 또는 자체의 정보망을 가동하는 중앙정보국 관리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의 판단으로는, 남(한국)의 핵물질실험에 관한 극비정보를 미국 언론에 흘려준 여론공작은 국방정보국으로부터 극비정보를 얻은 국방부 고위관리의 소행으로 보인다. 그렇게 추정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미국 중앙정보국의 고위관리는 미국 언론에 자기의 신원을 노출하면서 극비정보를 폭로하는 식의 저급한 여론공작은 하지 않는다. 중앙정보국은 언론에 전혀 노출되지 않는 고급한 첩보공작이나 정치공작을 전문으로 하는 국가정보기관이다. 중앙정보국이 여론공작을 추진하는 경우, 언론에 자기의 신원을 전혀 노출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전문공작에서 지켜지는 철칙이다. 자기의 신원을 노출하면서 추진되는 정보유출 여론공작은 국무부나 국방부 고위관리들이 관행처럼 되풀이하는 저급한 수준의 공작이다.
2) 미국 국방부와 국무부가 치열한 경쟁관계, 갈등관계에 있다는 것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는 그 두 부처가 서로 경쟁·갈등관계에 있음을 알면서도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해서 국무부에게만 해명하였다. 이것을 국방부 고위관리들이 모를 리 없다. 국방부 고위관리들은 노무현 정부가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해 해명하면서 자기들을 배제한 행동이 자기들의 권위를 무시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더욱이 미국 국방부 고위관리들은 자기들이 추진하는 주한미국군 감군조치에 대해서 노무현 정부가 은근히 반대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최근 미국 국방부와 노무현 정부 사이에서 어긋난 정황을 보면, 국방부 고위관리가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을 폭로하여 노무현 정부를 궁지에 빠뜨린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생각된다.
3) 국제원자력기구와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부처는 국방부가 아니라 국무부다.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을 폭로한 여론공작의 결과는, 국무부와 국제원자력기구에게 그 실험의 진상을 파악하고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 정치적, 실무적 부담을 안겨주었다. 국무부에게는 자기에게 엄청난 정치적, 실무적 부담만 안겨줄 비밀핵물질실험을 폭로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4) 국무부가 주도하는 6자회담에 대해서 회의적 또는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국방부는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이 폭로되어 6자회담 추진에 장애가 조성되는 것에 대해서 개의치 않는다. 반면에, 파월-아미티지-켈리로 이어지는 국무부 인맥은 6자회담 이외에는 대안이 없으므로 그 회담의 지속적인 추진에 매달려 있다. 그러한 국무부가 6자회담의 지속적인 추진에 장애를 조성하게 될 여론공작을 추진하지 않은 것은 명백하다.
5) 2002년 10월 3-5일 평양에서 조·미 정치회담이 열린 직후, 그 회담에 미국 정부대표로 참석하였던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제임스 켈리(James A. Kelly)의 보고를 받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근 10일 동안이나 내부논란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 시사주간지 『뉴 리퍼블릭(New Republic)』 2002년 11월 4일자 보도에 따르면, 부시 정부의 고위관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켈리의 보고내용을 일간지 『유에스에이 투데이(USA Today)』의 북(조선) 담당 전문기자 바버라 슬레이빈(Barbara Slavin)에게, 그리고 『넬슨 리포트』의 크리스토퍼 넬슨에게 각각 넘겨주었다. 슬레이빈은 2002년 10월 16일 오전에 "부시 정부의 대북(조선)정책을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그 정보를 얻었다고 밝혔다. 켈리의 보고내용에 관련된 정보가 미국 언론에 흘러나가자, 조·미 정치회담 대신에 '핵소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미 정치회담을 반대하는 국방부 고위관리들이 저지른 전형적인 정보유출 여론공작이었다. 2002년의 정보유출 여론공작과 2004년의 정보유출 여론공작은 동일한 국방부 고위관리의 소행이었다.
6) 미국 국방부에서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극비정보를 취급하는 고위관리라면, 국방장관이나 국방차관일 것이다. 그런데 정보유출 여론공작에 국방장관이 직접 나서는 경우는 없으므로,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극비정보를 가지고 미국 언론을 상대로 저급한 여론공작을 추진한 고위관리는 국방차관 폴 월포위츠(Paul D. Wolfowitz)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보유출 여론공작 추진자는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극비정보를 오래 전부터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가 22년 전에 있었던 플루토늄 추출실험에 관한 극비정보를 오늘에 와서 언론에 흘려준 것으로도 입증된다.
정보유출 여론공작은 집요하게 추진되었다. 먼저 우라늄 분리실험에 관한 극비정보를 언론에 흘려주고, 뒤이어 플루토늄 추출실험에 관한 극비정보를 언론에 흘려주는 방법으로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을 폭로하였다. 불과 일주일 간격을 두고 이어진 그의 폭로행위에 공작추진자의 의도가 들어있는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정보유출 여론공작 추진자는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을 왜 이제 와서 폭로한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면,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을 폭로한 여론공작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언론유출 여론공작이 국제사회에 일으킨 파문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된다.
1) 정보유출 여론공작은 북(조선)에게 6자회담을 거부할 명분을 줌으로써 6자회담 추진일정을 교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2004년 9월 27일 최수헌 외무성 부상은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한국의 비밀스러운 핵관련 실험이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는 심각한 상황에서 우리는 핵무기 프로그램을 논의하기 위한 대화에 참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4년 9월 28일자)
2) 정보유출 여론공작은 미국이 이란의 우라늄농축실험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면서 이란을 압박해 들어가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3) 정보유출 여론공작은 그렇지 않아도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는 노무현 정부를 궁지에 빠뜨렸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여론공작이 6자회담 추진일정을 교란하고 이란에 대한 압박책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여론공작은 결과적으로 '핵문제'를 가지고 북(조선)과 이란을 압박하는 미국의 대외정책 추진에 정치적 손실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부시 정부의 어떤 고위관리가 미국의 대외정책에 손실을 끼치고, 노무현 정부를 궁지에 빠뜨리면서 여론공작을 추진한 것은, 상식적으로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여론공작에는 6자회담을 추진하고 이란을 압박하는 대외정책을 추진하는 것만큼 중요한 또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자회담을 추진하고 이란을 압박하는 대외정책 추진하는 것만큼 중요한 또 다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주목하는 것은, 정보유출 여론공작이 노무현 정부를 궁지에 빠뜨림으로써 노무현 정부가 비밀핵물질실험을 재개할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봉쇄한 것이다. 여론공작 추진자는 국제사회로 하여금 노무현 정부에게 강한 여론압박을 가하게 만들어 노무현 정부가 핵물질실험을 재개할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고, 국제원자력기구로 하여금 남(한국)의 핵물질연구활동에 대한 감시와 사찰을 이전보다 더 엄격하게 받도록 통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물음은, 여론공작 추진자는 왜 2004년 9월이라는 특정한 시점에 이르러 노무현 정부에 대한 통제를 더 강화하여야 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그 까닭은, 그가 혹시 노무현 정부가 국제원자력기구의 감시를 따돌리고 비밀핵물질실험을 실시하지나 않을까 우려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러한 우려는 공작추진자의 개인적 우려가 아니라 그가 속해있는 미국 국방부의 고위관리들이 내린 정책적 판단에서 비롯된 우려였을 것이다.
미국 국방부가 그러한 정책적 판단을 내린 까닭은, 지금 노무현 정부가 1999년에 김대중 정부가 겪었던 것보다 더 심각한 총체적 안보불안에 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겪고 있는 총체적 안보불안이란 주한미국군 감군으로 한·미 동맹체제가 동요하고, 경제파탄위기가 심화되는 것을 주된 원인으로 하여 발생한 것이다. 주한미국군 감군과 경제파탄위기 심화가 노무현 정부에게 얼마나 심각한 사태를 몰고 오는지에 관해서는 2004년 8월 15일자로 작성한 나의 글 「남(한국)의 경제위기와 주한미군 철군, 그리고 연방통일국의 경제건설」에서 논하였으므로 재론을 생략한다.
주한미국군이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감군되면서 한·미 동맹체제가 동요하고, 국제독점체들에 대한 예속이 심화되면서 남(한국)의 경제가 파탄위기에 밀려가는 것이 노무현 정부가 겪고 있는 총체적 안보불안의 주된 원인이라면,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에 대한 중산층 지지기반이 붕괴되고, 민족민주세력과 기층민중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중운동의 투쟁역량이 강화되고, 민주노동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기반이 확대되는 것은 노무현 정부가 겪고 있는 총체적 안보불안을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들이다. 또한 6자회담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북(조선)의 대미압박공세가 가중되고 그에 따라 조·미 관계의 대결국면이 더욱 날카로워지는 국면에서 노무현 정부가 느끼는 불안은 심각하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의 기간에 김대중 정부는 위기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 남북대화를 추진하였고, 북(조선)은 김대중 정부의 남북대화 추진을 남북최고위급회담으로 격상시켜 조국통일의 새로운 전환을 이룩하였으나, 지금 노무현 정부에게는 남북대화 추진이라는 마지막 남은 돌파구마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가 겪었던 것보다 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으므로, 비밀핵물질실험을 추진할 가능성도 그만큼 더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은 노무현 정부가 심화되는 정치·군사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재래식 무력을 증강하게 될 것이지만 비밀핵물질실험은 추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견해는 두 가지 고정관념 위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첫째, 친미예속정부는 미국의 핵확산금지체제에 자발적으로 순응하기 때문에 영원히 비핵정부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이다. 둘째, 총체적 위기상황에서 미국의 감시망을 피해 비밀핵물질실험을 실시하는 핵무기 개발추진은 지난 시기 군사독재정부 시기에나 발생하였던 특수현상이라는 고정관념이다.
그러나 그런 고정관념은, 박정희-전두환 친미예속정부가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였다는 사실에 의해서, 그리고 파키스탄과 인도의 핵무기 개발이 군사독재정부 시기에 추진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의해서 부정된다.
노무현 정부에게도 핵물질실험을 추진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은 명백하다. 워싱턴의 여론공작 추진자가 간파한 것은 바로 그러한 가능성이었고, 그는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 그 가능성이 현실화될 수 있는 모든 경로를 사전에 차단·봉쇄해야 했다. 그가 6자회담 추진과 이란에 대한 압박공세에 장애를 조성하면서까지 추진하였던 여론공작의 목적은, 위기상황에 빠진 노무현 정부가 재개할지도 모르는 핵물질연구활동을 사전에 완전히 차단·봉쇄하는 것이었다.
5. 글을 맺으며
미국의 시각에서 보면,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극비정보를 언론에 흘려준 여론공작은 노무현 정부가 재개할지도 모르는 핵물질연구활동을 재개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봉쇄한 것이었지만, 민족민주세력의 주체적 관점에서 그 사건을 바라보면, 그런 여론공작을 추진해야 할 정도로 노무현 정부의 위기상황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음이 드러난다.
1970년대에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였던 박정희와 1980년대에 플루토늄 추출실험을 실시한 전두환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동원하여 민족민주세력과 보수야당세력을 탄압하였고, 우라늄 분리실험이 실시된 2000년에 김대중은 국가보안법을 존치한 상태에서 남북대화를 추진하였으나, 오늘 노무현은 국가보안법을 붙들기도 힘들게 되었고, 남북대화의 길도 찾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현 정부가 더 심각한 위기상황에 빠졌다고 보는 것이다.
위기는 정체하지 않는다. 위기상황은 정상화가 아니면 악화를 택한다. 위기상황을 반전시키는 정상화는 힘들고, 위기상황을 악화시키는 속도는 훨씬 빠르다.
노무현 정부가 위기상황을 반전시킬만한 정상화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미국 국방부 고위관리들은 노무현 정부의 위기상황이 핵무기 개발욕구를 자극할 소지가 있음을 간파하고 여론공작을 벌었으나, 그 공작은 원래 목적과 상관없이 노무현 정부의 위기상황을 악화시키는 결과만 가져왔다.
강한 압박을 받은 노무현 정부는 2004년 9월 18일 발표한 '핵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4원칙'에서 "핵의 평화적 이용범위를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노무현 정부의 고위당국자가 지적한 대로, "핵주권을 확보해 핵의 모범적 이용국가를 지향"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연합뉴스』 2004년 9월 19일자) '핵의 평화적 이용'과 '핵주권 확보'를 추구하는 것은, 핵무기는 개발하지 않으면서 핵공학기술을 발전시킨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핵공학기술의 발전은 핵무기 개발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 남(한국)의 핵활동에 대한 미국의 감시와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이 강화된다고 해도 '불씨'는 남아있는 것이다.
만일 주한미국군이 전면적으로 철군하고 한·미 동맹체제가 와해되는 경우, 미국의 제국주의적 군사력에 의존해온 친미예속정부는 주한미국군 철군에 의해서 발생한 전력공백을 메운다는 명분을 내걸고 핵무기 개발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남(한국)의 핵무장은 그것이 동족인 북(조선)을 적대하고 분단체제를 지키려는 전략적 무력증강이라는 점에서, 민족 내부의 군사적 대치상태를 더욱 날카롭게 만들고 분단체제를 고착시킬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주한미국군 철군은 주한미국군 철군운동을 전개해온 정치세력이 집권하는 정권교체와 연계되어야 한다. 그 정권교체가 자주적 민주주의정부 수립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자주적 민주주의정부는 주한미국군이 완전히 철군한 조건에서 비핵화 원칙을 지키면서 분단체제를 허물고 조국통일위업을 수행하는 통일정부다. 자주적 민주주의정부가 비핵화 원칙을 지킨다는 말은, 그 정부의 자주권을 지키는데는 핵무장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주적 민주주의정부는 남(한국) 근로대중의 힘으로 자기의 자주권을 지킬 것이며, 북(조선)의 사회주의정부와 손잡고 분단체제를 허물고 연방통일국을 세움으로써 한(조선)민족의 자주성을 완성할 것이다.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는 길은 연방통일국 건설밖에 없다. (2004년 10월 5일 작성)
평양의 지하 도시와 300m 깊이의 과학적 계산:
유대자본은 북한의 지략에 깨끗이 졌습니다
News by Whang Kil Gyoung
질문
저번때 황길경님께서 두개의 전쟁전략때문에 바쁘셔서 답변을 마저 하지 못하셨던 북한의 지하요새에 대한 황길경님의 의견을 듣고싶습니다.
북과 유대세력과의 싸움에서 공격력은 비슷할지 몰라도 방어력이 훨씬우위에 있는 북의 이점에 의해 전쟁시 북의 승리로 귀결될수밖에 없다고 황길경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황길경님께서 황장엽의 글을 인용해서 쓴 지하요새에 관한 글도 읽어보고 실제로 인터넷 돌아다니면서 황장엽이 직접 방송하는 자유북한방송에도 들어가서 보았습니다만 실제 황장엽이 한 이야기와 기사화 된 이야기가 많이 다르더군요..지하 300미터까지 깊게 들어간 것도 아니라 하고 새파란 풀이 있는게 아니라 지하에 가스가 있어서 불을 붙여놓아 새파란 불이 있다고 말한거더군요..불을 풀로 알아듣고 잘못쓴 오보기사였습니다.
그리고 황장엽말의 신빙성이 있는줄은 모르겠지만 소련군사대표단이 실제 북한 지하요새를 둘러보고 칭찬을 많이 했다고 하면서도 수소폭탄을 사용하면 지하 몇백미터에 상관없이 다 박살나기 때문에 수소폭탄에 견딜만한 요새는 없다고 말했다더군요
비록 변절자(황장엽)의 말이라지만(물론 황길경님께서는 다르게 주장하시는걸로 알고있습니다만) 제가 여러 군사사이트에서 토론하고 꽤나 이름있는 분들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들었던 내용과 비슷했습니다.아무리 화강암반에 지하 수백미터에 들어가더라도 깰려고 마음먹고 대형수폭 떨구면 충분히 부술수 있다고 말들을 하더군요.
물론 소위 군사전문가 분들도 벙커버스터능력이 상당히 과장된점과 화강암의 견고함으로 깨기가 쉽지만은 않은점은 다들 인정합니다.
답변
좋은 질문입니다. 다만 '카더라 통신'에 따른 질문이라서 아쉽습니다. 근거가 없는 이야기들이지요. 님의 질문의 요지는 "1)북한의 '지하300m 지하도시'가 실재로 존재하는가?.. 2)미국의 대형수소폭탄으로 300m지하라도 파괴할 수 있다"로 해석됩니다.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북한에 지하도시가 있는지 실재로 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설입니다. 다만 여러 진술과 정황을 근거로 그렇게 판단하고 있으며, 또 결과론적으로 미국의 수세적 입장이 지하도시의 실체를 보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가설이 옳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4대군사노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 1962년 12월 북한은 군사분야에서 주체사상을 구현하여 자체의 힘으로 국가를 보위해야 한다는 국방자위 정책을 내걸고, 이를 구체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행동노선으로 ① 전인민의 무장화 ② 전국토의 요새화 ③ 전군(全軍)의 간부화 ④ 장비의 현대화 등 4대군사노선을 채택하였다. ]
지하도시와 관련이 있는 것은 '전국토의 요새화'입니다. 1962년부터 시작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1962년부터 땅을 팟다는 뜻이 됩니다. 상식적인 측면에서 미국이 수소폭탄이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 방어도 되지 않는 땅을 왜 40년 이상을 팟단 말입니까? 북한이 미쳤습니까? ^^*..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방어가 되기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팟지 않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말입니다. 북한의 4대군사노선은 오늘날 전인민이 무장화 되었고, 전군이 간부화 되었으며, 장비의 현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전국토의 요새화만 안되었다고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황장엽 비서께서는 "평양에 은폐된 지하세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즉 '지하도시'이지요. 그의 발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황장엽 “평양에 은폐된 지하세계 있다” 지하 300m 4통8달, 남포등 80㎞연결...김정일 유사시 중국으로 탈출>
“평양 지면 아래 약 300m 지점에 지하철도와는 다른 제2의 지하세계가 존재한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가 최근 자유북한방송과 가진 대담에서 이같이 밝히고 “이 땅굴은 휴전 이후 김일성이 노동당 서기(비서)로 재직하던 53~72년 사이에 착공되었다”고 설명했다.
황 전 비서는 “김일성이 서기로 있던 시절 책임부관이 경비대 대장으로 발령이 나서 지하철도 공사를 책임진다는 보고가 있었다”며 “어느날 그 경비대장이 찾아와 병사들과 대학생 간의 폭행사건 처리를 부탁하면서 지하철 공사현장에 초대했다”고 증언했다.
황 전 비서가 현장에서 목격한 것은 지하철도가 아니라 그보다도 한참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비밀 땅굴. 황 전 비서는 “지하철도로 내려간 뒤 그 곳에서부터 또 지하철도 깊이만큼 더 내려갔다”며 “이와 같은 지하철도 아래의 땅굴과 지하시설은 평양 곳곳에 많았다”고 설명했다.
이 땅굴은 평양뿐만 아니라 평안남도 순천, 영원, 남포 등 주요 거점지역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도 알려졌다.
황 전 비서는 “평양 방향에서 순천의 자모산(山)에 오르는 길은 조그마한 소로(小路) 하나뿐으로서 산 위에는 논밭과 부락이 있다”며 “약 40km 직선거리로 평양에서 이곳까지 땅굴이 뚫렸다”고 밝힌 뒤 “자모산까지 가는 땅굴 속에는 깨끗한 샘물과 새파란 풀이 존재했다”고 대담에서 회고했다. 또 “영원까지도 연결되었는데 당시 지도를 펼쳐놓고 계산해보니 직선거리로 약 50km 거리였다”고 덧붙였다.
영원은 비난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장소. 올해 8월 김정일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접견한 묘향산이 있다.
황 전 비서는 “이 땅굴은 북한 해군 서해함대사령부가 소재하고 있는 남포항까지도 연결되어 있다”며 “이곳을 통해 (김정일 등이) 유사시 중국으로 도주할 수 있다”고 밝혔다.
공사 당시 김정일은 73년 초부터 이 휴양소에서 근무하던 황 전 비서에게 집무실 이전을 요구했던 것으로도 전해졌다.
한편 일본 시사주간지 겐다이(現代)는 지난 2003년 탈북한 북한군 3성 장군의 증언을 인용 “삼석구역 국사봉 지하 12m 지점에 철봉각으로 일컬어지는 폭 9m, 높이 4.5m, 길이 600m 규모의 ‘김정일 지하궁전’이 있으며, 남포까지 약 80km에 걸쳐 땅굴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 - 뉴데일리 2009.12.08 17:20
이러한 뉴스는 [황장엽 새파란]이라는 검색어로 뉴스를 검색해 보십시요. 쭉 깔렸습니다. 황장엽 비서는 분명히 위의 기사와 같이 "깨끗한 샘물과 새파란 풀이 존재했다"라고 발언했습니다. 그런데 '새파란 불'이라니요? 새파란 불이 지하도시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황장엽 비서가 바보가 아닌한 "새파란 불이 있다"고 중요하지도 않고 스스로 얘기하고자 하는 방향에도 부합하지 않는 얘기를 했다는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님께서는 누구에게 무슨 얘기를 듣는지 모르겠지만 엉뚱한 얘기를 듣고 오셨군요.
황장엽 비서께서는 북한의 지하도시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얼마나 견고한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황장엽 비서가 본 것은 전체가 아니라 일부를 본것에 불과하겠지요. 그 일부에 대한 진술이 전체를 상상할 수 있게 만듭니다. '깨끗한 샘물과 새파란 풀'이란 지하의 도시가 상상을 초월하고 있음을 한마디의 문장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지하낙원'이랄까..
미 의회 산하 '미국에 대한 미사일 위협 조사위원회'(위원장 도널드 럼스펠드 전 국방장관)의 비밀보고서에는 "북한은 지하시설을 건설하는 분야에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 실제로 직경 50피트, 깊이 200피트의 공간을 하루에 파낼 수 있는 기계를 개발하는 등 고도의 굴착기술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 1998.7.29)
1 피트(ft)는 0.3048 미터(m)이므로 위의 기사는 지름 15.25 미터(m)의 길이 60.96 미터(m)를 하루에 파낸다는 뜻입니다. 2달 남짓이면 10리(4km)를 판다는 결과에 이릅니다. 놀라운 기술인데, 40년 이상을 터널 파 왔으니 그러한 기술이 있을만합니다. 황장엽 선생의 진술과 미국 조사위원회의 진술은 그 맥락이 일치합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편 다른 정황으로서 미국이 북한의 '지하도시방어체계'에 대응하여 구축한 '광역미사일방어체제(WMD)'를 구축하려 하였다는 점입니다. 미사일을 미사일로 쏘아 떨군다는 것인데 허구이고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은 이미 그들 스스로 실토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미국도 지하도시를 건설했어야 전략적으로 북한에 대적할 수 있는 방어수단이 되는 것인데 미국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넓은 미국 땅에 지하도시를 건설한다는게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북한의 지략에 말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북한의 지략은 무엇일까요?
북한은 평상시 잘 지내다가도 서방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들어오면 다죽어가는 척 합니다. 영양실조에 걸린듯한 아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쌀도 달라고 하고, 비료도 달라고 하고, 탈북자는 막 생기고, 황장엽 선생은 탈출하고, 전기도 공급하지 않고.. 누가봐도 곧 망할것 같습니다. 또 북-중 국경을 중심으로 시장경제를 일부러 허용하여 헛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2개의 전쟁전략>이 끝나자 곧바로 화폐개혁을 실시해서 싹 거두어 들입니다. 모든 것은 북한의 전술입니다.
저는 <2개의 전쟁전략> 제6부에서 다음과 같이 이러한 북한의 전술을 설명하였습니다.
[ 북한은 유대자본에게 곧 망할 것 같은 이미지를 심어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건드리기만 하면 대폭발을 일으킬 것처럼 또 다른 이미지를 심어줍니다. 마치 벽난로 위에 축 늘어진 독사와 같습니다. 유대자본의 입장에서 축 늘어진 저놈의 독사가 곧 벽난로에 떨어져 죽을 것만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안 떨어집니다. 독사의 존재 때문에 벽난로의 따뜻하고 아늑함을 만끽하기에는 무척 신경 쓰이는 일입니다. 독사를 제거하고자 가까이 가면 이빨을 드러내고 덤벼들 태세입니다. 물리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떨어져 죽을 것 같으니 차라리 물러서서 기다립니다. 독사는 신묘한 맹독을 충진하고 있고, 때가 되면 스프링처럼 튀어 자기를 물어 죽일 것인데도 말입니다.
미국에게는 언제나 북한이 곧 망할 것 같아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북한에 의해 기획된 것입니다. 북한은 쌀을 구걸하는 것도 마다 않았고, 탈북자도 일부러 방치했고, 국경의 혼란도 내버려 두었으며, 지하 핵시설에서 생산되는 전기도 꺼내 쓰지 않았고, 심지어 외교관의 망명도 내버려 두었습니다. 중국 단둥에 침투한 스파이들에게는 오히려 정보를 흘렸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 미국에게 희망을 품게 하여 다른 결정을 하는데 방해를 하게 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6자회담 방안은 또 다른 기막힌 전술이었습니다. 미국은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을 지렛대로 북한을 움직이게 하거나 망하게 할 수 있다고 믿고 희망을 품게 될 것이나, 북한은 6자회담을 통해 시간을 끄는 것입니다. 결국 6자회담은 유대자본이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한 채 북한에게 시간만 흘려 보내다가 어느 순간, "보복성전이 시작되었다"라는 발표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
미국은 무장력에서도 북한에게 졌지만 지략에서도 북한에게 졌습니다. 김계관 부상은 6자회담장에서 6년동안 미끼를 던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자본은 북한이 곧 망할 것이라는 허상에 속아 실질적인 방어수단을 구축하는 동기를 결여토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북한과 마찬가지로 지하도시를 구축하면 될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늦었지요. 북한이 그렇게 하도록 방치하지 않습니다. 북한은 적이 방어수단을 구축하기 전에 바로 때려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최후의 수단으로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전략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만 죽고 너는 안죽으면 자살행위입니다. 설사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래서 무엇을 남기는가라는 문제에 들어서면 무모한 일입니다. 유대자본에게는 또다른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3대유대자본과 이스라엘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3대유대자본이란 미국, 영국, 유럽 유대자본입니다. 북한과 한판 붙어서 미국 유대자본과 북한 둘만 동시에 죽는다면 좋겠지만 북한은 4곳 모두를 겨냥하고 있어 4곳 모두 깨끗이 사라집니다. 지구가 깨어집니다. 3대 유대자본 측은 미국 유대자본을 내어주더라도 이 위기의 국면에서 협상을 통해 살아남는 것이 더 이득입니다. 북한은 그것까지 계산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북한의 전략전술은 "제갈공명 저리가라"입니다. 대단하고 치밀합니다. 0.0001mm의 오차도 없이 유대자본을 조아 온 것입니다. 유대자본은 북한의 지략에 말려 든 것입니다. 이때 중국의 협력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자바오가 "却顧所來徑 蒼蒼橫翠微 (각고소래경 창창횡취미)"라고 한 것입니다. 저는 <2개의 전쟁전략>을 쓰면서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치밀할 수가 있나?"라고 말입니다. 지금 님이 북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북한의 계획에 따른 것이어서 미국과 마찬가지로 허상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북한의 지하도시를 미국은 파괴할 수 있을까요? 즉, 화강암반 밑에 있는 지하 300m의 지하도시를 파괴할 수 있을까요? 현존 가장 위력이 높은 핵폭탄은 수소폭탄입니다. 위키백과사전에 의하면 1953년 소련의 건식수소폭탄 차르 폭탄(58메가톤급)을 실험하였는데, 지금까지 실험 중 최대입니다. 이러한 전제하여 다음을 살펴보겠습니다. 미국에서는 캐슬브라보 수소폭탄(15Mt)을 실험한 바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캐슬브라보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다.)
[그림#1]은 충돌 구덩이 형성에 관하여 충돌설을 지지하는 유력한 근거가 됩니다. 지구에서 만들어진 운석 충돌 구덩이나 폭탄 구덩이의 지름과 깊이와의 관계(H/D)는 달의 운석구덩이의 지금과 깊이의 관계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구덩이는 H/D가 0.2에 가깝고, 지름이 어느 크기 이상이 되면 0.1이 됩니다. 이런 관계는 모든 지구형 행성의 구덩이에서 성립합니다.
그래프가 비례하지 않고 제곱근과 유사한 곡선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소폭탄의 경우 그 규모가 크므로 H/D=0.1로 적용하면 57Mt급 소련의 차르 수소폭탄이 10km의 구덩이를 만들었다고 하므로 위의 그림 그래프를 적용하면 약 1km의 깊이가 파였다고 계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재로 차르 수소폭탄에 의해 1km의 깊이로 패였다는 정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즉 실재로는 그렇게 깊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즉 폭발은 약한 쪽으로 압력이 집중되기 마련이므로 공중과 연약한 지반인 지표면을 수평으로 밀어내게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의 15Mt급 캐슬브라보 수소폭탄의 경우 차르에 비해 1/4의 규모이므로 2.5km의 구덩이가 만들어졌다고 가정했을 때 위의 그림 그래프를 적용하면 약 250m의 깊이가 패인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즉 '250/2500=0.1'로 됩니다.
더구나 북한의 지형은 단단한 화강암 지질로 되어 있습니다. 저의 계산이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북한이 바보가 아닌 이상 피폭의 후과를 과학적으로 정밀하게 계산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300m의 지하'라는 황장엽 선생의 발언에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계산의 범위가 거의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국의 캐슬브라보 수소폭탄은 미사일 탑재가 불가능 하고 항공기로 투하 하여야 합니다. 무사히 평양 상공까지 날아 올 수 있을까요? 설사 날아와서 떨어뜨렸다고 하더라도 그 피해의 범위는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미국이 캐슬브라보를 항공기에 싣고 이륙한다면 그 순간 미국은 깨끗이 사라질 것이고 그 항공기가 무사히 북한 상공에서 수소폭탄을 떨어뜨린다고 해도 북한의 지하도시는 파괴되지 않거나 극히 일부를 파괴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유대자본이 쥐새끼 취급 받아도 북한의 은혜를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이고 영국과 유럽의 유대자본은 1조달러를 바치는 것입니다. 미국 본토와 이스라엘을 내어주고 영국과 유럽의 유대자본이 생존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그게 서로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조선이 없는 지구는 필요 없다"라고 했습니다. 미안하지만 유대자본은 김정일 위원장의 지략에 졌습니다. 완패입니다.
- 2010년 5월18일, 황길경 드림 -
미국이 북한의 HEU(고농축우라늄)에 극도로 집착하는 이유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당시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대통령 특사로 방북한 자리에서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으로부터 HEU 프로그램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주장하면서 2차 북핵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금창리 지하수직갱에서의 핵활동을 첩보를 수집했던 미국에서는 사상최대의 관람료인 3억달러, 현물인 곡물25만톤의 관람료를 지불하며 이에대한 일차적인 확인에 들었갔었습니다.
신동아의 탐사기획 자료에 따르면 1999년 인민군 작전부국장을 지냈다는 이춘선씨가 중국으로 탈출해 북한의 핵물질 생산 기지(HEU)는 금창리에서 30km 떨어진 천마산 지하터널 속에 있다고 증언했고 국내의 모기관이 국정원에 첩보를 접수하지 않고 미 CIA 에 제보해서 시작되었다고 판단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미국은 왜 플로토늄보다도 더 HEU 사활적인 딴지를 걸고 있느냐 하는 궁금점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HEU(High enriched uranium, 고농축우라늄) 은 뭐에 쓰이는 물질이고 왜 문제를 삼는지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농축우라늄 [高濃縮uranium] <화학> 우라늄 235의 존재비가 20% 이상인 농축 우라늄. 90% 이상인 것은 군사용으로 사용한다.
농축우라늄 [濃縮uranium]
<화학> 천연 우라늄보다 우라늄 이백삼십오의 함유율을 인위적으로 높인 우라늄. 고농축 우라늄 이백삼십오를 천연 우라늄에 가하거나 필요한 농도까지 농축하여 만든다. 핵폭탄에는 93% 이상, 일반 동력용 원자로에는 3~4%의 것을 쓴다.
이미 89년 무기급 플로토늄 추출해 성공해 93년 지하핵시험을 준비했던 북한에서 다량의 플로토늄을 생산, 탄두화 시켰다는것은 누구나 알수 있는 사실이 되어버렸습니다.
1998년 파키스탄에서의 마지막 핵실험은 플로토늄에 의한 북한의 핵실험이었습니다. 파키스탄의 핵의 아버지라 불리는 칸박사는 우라늄 원심분리기(P-1)과 원심분리에 필요한 노하우를 제공하고 북한의 탄도미슬인 노동급미슬의 운반체와의 거래가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칸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에 있는 노동급미슬에 소형화된 핵탄두가 장착되어 있는 모습을 직접보았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우선 이번에는 고농축 우라늄에 대한 이야기 이므로 소형화 핵탄두는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
북한은 P-1,P-2 설계도를 가지고 역설계에 성공해 나름대로의 고농축 우라늄에 대한 생산에 설계했다고 합니다.
자 이제 고농축우라늄은 어디에 쓰이는지 알아보죠. 상업용과 군사용으로 나뉘게 됩니다. 상업용의 경우는 국내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전력생산으로 이용되는 저농축우라늄이 이용되고 있습니다. 군사용 고농축우라늄의 90%이상의 농축으로 우라늄탄두 제작에 이용되고 있으며, 잠수함 추진연료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잠수함 추진제로 이용되는 고농축 우라늄은 90-95% 이상의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해 잠수함 신조시부터 폐기연한인 25-30년간 연료의 교체없이 이용되도록하고 있습니다.
(과 학 기 술 정 책 연 구 원, 북한의주요분야별과학기술현황조사, 2001)
마. 조선공업
북한은 1975년부터 자체기술로 잠수함을 생산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미사일잠수함을 자력으로 설계·건조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1998년 6월 북한 잠수정이 동해안에 침투했다가 꽁치 유자망 그물에 걸린 적이 있다. 이 잠수정은 이중 스크류를 사용하고 있어 남한측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다. 북한의 조선공업은 6개년계획기간( 71∼ 76년)에 40배의 성장을 이룩하는 장족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북한의 대표적 조선소는 남포조선소와 김책조선소이다. 남포조선소는 북한최대의 조선소이며 연간 최대건조량 5.04만 톤이고 최대 3만 톤급 선박을 건조할 수 있다. 최근 북한은 200마력, 400마력엔진, 2,500마력 중속엔진, 3,000마력 고속엔진 등 각종 엔진을 자력으로 생산하고, 어선과 1만 4,000톤급, 2만 톤급 화물선을 비롯한 각종 선박이 건조되고 있다. 또 수산업과 대외 화물운송, 수상운수를 발전시키기 위한 조선기지의 건설, 확충이 진행되어 디젤기관 생산기지, 1만 4천 톤급의 대형모선, 3,750톤급 선미 트로올선, 1,000급, 480톤급 어선과 대형 화물선 등 각종 선박을 건조하고 있다.
(정리)
이미 북한은 2000년 이후로부터 핵잠수함 발사용 탄도 미슬인 SS-N-6(BM-25) 미슬의 생산 및 배치, 그리고 이란으로 수출도 되었다는 객관적인 사실이 보도되었습니다.
잠수함 발사용 탄도 미슬의 생산 및 배치 이의 수출을 하고 있는 기술력,그리고 미국이 끝까지 물고 늘어지고 있는 HEU는 북한의 9.9절 미림비행장에 등장(미국에 일부러 보여주기위한 쇼타임, 결국 행사에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하고 이란에 수출되었던 SLBM의 존재로 미루어 보아 북한의 HEU는 원자력추진 잠수함용 연료라는 것이 설득력을 가질수 있습니다. 굳이 농축우라늄으로 핵탄두를 제작할 이유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수소폭탄에 대한 논의는 제외합니다.)
나름대로의 판단으로는 북한은 아직까지는 잠수함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에 HEU 프로그램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느냐 하는것입니다. 미국도 HEU의 용도에 대한 물음에 대한 정확한 언급은 없었던것으로 기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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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에너지 패권이군요.전세계의 농축 우라늄 생산을 막기에는화석연료가 너무 빠르게 고갈되어 갑니다.모든 나라에 연료를 무상 공급하지는 못할테니까결국 대안없이 무대뽀로 힘으로만 막는 것도 한계가 있겠지요.2,600만톤/ 가채량 500만톤을 자유로이 생산하고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에너지 짱은 통일 한국이 먹게되는 거군요.그것을 도적놈들로부터 지켜내려면SLBM을 10,000기는 가져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조선강국으로 거듭난 한반도에서에너지가 더 이상 필요없는 초대형 선박들을팡팡 찍어낸다면 더 없이 좋은 날이 되겠습니다.
214급 3대에 이어 수상함의 전력증강보다는
2018년까지 6척의 214급의 추가보유를 하기된 남한의 전략적인 결정에도
일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됩니다.
바다물과 바닷속 매장량까지 이용한다면40억년을 쓸 수 있다던 옛날의 과학 교과서는 다 어디로 가 버리고지금은 우라늄도 고작 수십년 쓰면 고갈된다고 가르치니참 아이러니가 따로 없습니다. 쉬~발리애들 !
위 동영상에도 나오지만 북한이 [국가적인 사업] 으로
구소련 연방해체시기에 극동지방 잠수함(SLBM포함)을 사올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하였을까요?여러분들의 상식으로 판단해야 할듯 합니다.
사올 수 있었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며느리도 알고 행근이도 알죠.
볼프네 마리/ 또한 카피 기술이 예술이니 극동 지방 잠수함을 카피 해서
지금 쯤 미사일 장착 전략 잠수함을 가지고 있겠죠..
베트남 전에서 미제의 휴대용 대공 미사일을 뇌획 후 성능 더 좋게 카피해서
지금 신나게 수출 하고 있죠..
공식적으로는 구소련의 이글라 맨패드 형식의 대공미슬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말씀하신 자료를 암시하는 자료가 따로 있으신가요?
볼프네 마리/ 유용원 홈피에서 화승이라는 인민군의 휴대용 대공 미사일에 대해
자세히 분석한 자료가 있던데 그걸 참고 했습니다..
보통 러시아 이글라 카피로 알고 있는데 사실 베트남서 노획한
미제 휴대용 대공 미사일 카피라더군요..
한호석 소장도 그렇게 얘기 한 것으로 기억 합니다...미군제 카피라고...러시아제 말고 미군제 카피 한 이유는 성능이 더 좋거나
카피에 용이해서 그런 것 같다고 보여지네요...
이런걸 오바질이라고 하지..양키들이 지랄지랄하는건..
HEU건 플루토늄이건 모두 핵무기에 사용되기 때문이야.뽀글이네가 장거리 발사체도 갖췄겠다..
여기에 탑재할 핵물질만 보유한다면 그야말로 확실한 핵보유국가가 되는거거든..북한이 플루토늄을 생산하는것보다는 우라늄을 농축하는것을 통해
무기용 핵물질을만들고 있기때문에 HEU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는거란다.SSBN이라는게 잠수함이 있고 승조원이 있고 미사일이 장착되면
끝나는걸로 생각하는니 쎈쓰가 참 얼척업ㅂ구나~~
화승은.. 베트남전에서 북괴애덜이 직접 노획해서 개량한건 아니다.베트남전에서 미국의 redeye를 입수한 쏘련이 그걸 개량해서 SA-7(stela-2)
녀석을 만들었고..
이걸 도입한 북한애덜이 지네 나름대로 화승이라는 이름을 붙인거다..
ㅁㅁㅁ 159.226.92.x 작성일 2006년11월24일 18시06분
볼프네 마리님께/ 참고가 되시런지요...북한의 릉라888의 삼지연지도국 산하 하신파철수거회사가 1998년부터
구소련에서 7대의 중고잠함을 사들였습니다.
토막으로 잘라서 대만에 역수출한다는 계약으로 말입니다.
11대의 헬기도 같이요
물론 구입이 끝나자마자 역수출은 커녕 하신회사는
곧 파산되여 사라졌습니다.
상황을 이해하시리라 봅니다.
삼지연지도국산하에 그당시 이런 유령회사가 1년에도 몇개씩 생겨서
구소련과 우크라이나 등지를 넘나들다가는
조용히 흔적도 없이 '파산'되군했습니다.
참고로 무역국으로 되여있는 릉라888산하에는
전자장치연구소만 5개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GPS 교란장치만 전문으로 연구하는 연구소이고 자체안에
6층인쇄기판제작기지를 따로 가지고있습니다.
시험전파가 못나가게 늄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안골체육촌에 들어앉아있습니다
공개목적은 GPS장치를 주체화하는것이라고 되여있다나요 ㅎㅎㅎ
파리/ 유용한 정보 고맙다..그런데 북괴라니? 심히 거슬리는구나...
ㅁㅁㅁ/GPS 장치라하면
러시아의 GLONASS 위성을 이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시험전파가 못나가게 늄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안골체육촌에 들어앉아있습니다" 는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구체적으로 알수 있겠습니까?
아~ 그리고 1998년 부터 고철목적으로 도입한 7대의 중고잠함은 양키급을
말씀하시는 것 맞습니까?
"릉라888산하에는 전자장치연구소만 5개가 있습니다"
민감한 문제가 아니라면 공개 부탁드리겠습니다.
17
미국은 현재 하와이와 괌을 미군사력 투사의 거점으로 육성하고 있습니다.
특히 괌의 경우 동북아에 위치한 전략적인 목표물과 근시간내에
접근할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그 중대성은 점점더 커지고 있습니다.
현재 전략정보자산인 최신의 글로벌 호크와 최신의 원자력추진
잠수함인 버지니아급의 숫자에 증가를 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특히나 버지니아급의 증강배치는 중국의 원자력잠수함 확충과 맞물려
가고 있는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본인이 파악하기에는 북한의 전력증강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우리해군의 전략급 무기체계의 육성도 그와 연관되어 있다고 판단되어집니다.
볼프네 마리/ 제말을 이해못하셨군요
GPS 장치연구란 명목이고 실지는 GPS 교란입니다.
정확히는 GPS 로 유도되는 크루즈나 통합직격탄의 수신시스템을
혼란시키는 작업입니다. 이미 계열생산시작했고 버젼이 많이 올라갔습니다.
ㅁㅁㅁ/감사합니다.
혹시 북의 ECM/ECCM 에 대한 정보를 혹시 가지고 계시면 공유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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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유도 폭탄과 군용기를 운용하는데 필요한 위성신호를 교란하는 장치는
일부 국가만이 만들 수 있을 만큼 복잡하고
고난도의 기술을 요하는 시스템이라고 한다.
미ㆍ러간에는 이미 이러한 연구와 대비도 상당히 진척되어 있는 걸로 보인다.
한편 GPS교란장치는 군사적인 효과는 있을 수는 있어도
유사시에 인구밀집지역으로 미사일을 오도하게 된다면 더 큰 재앙을 초래할
지도 모를 일이다.
-----------------------------------
미국은 여러 곳에서 발진한 공군기와 해군기,
그리고 여러 기지에서 발사한 미사일이 거의 같은 시간에
목표물을 가격하도록 함으로써 이라크군이 받는 ‘충격과 공포’를 극대화했는데,
이는 GPS 위성이 보내준 시간 정보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GPS 위성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GPS 위성의 주파수(1227MHz와 1575MHz)가 만천하에 공개돼 있고,
대기권 밖에서 신호를 쏘다 보니
지상에 도달한 GPS 위성의 신호가 미약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이 주파수대로 강력한 방해전파를 쏜다면
그 지역에서는 GPS 신호를 받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토마호크와 전투기들은 엉뚱한 곳을 오폭하게 된다.
이라크전 초기인 2003년 3월24일 미 백악관의 플라이셔 대변인은
“러시아 회사들이 GPS 교란장치를 이라크군에 공급했다.
이 문제를 놓고 부시 미국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화로 설전을 벌였다”고 발표했다.
플라이셔 대변인이 말한 GPS 교란장치는 1999년 파리 에어쇼 때
처음 공개된 것이다.
당시 러시아의 에이비어컨버시아 사는 직경 150~200km의 지역에
걸쳐 GPS 방해전파를 송출할 수 있는
무게 10kg 정도의 교란장비를 공개했었다.
이라크전 초기 미국이 쏜 토마호크가 엉뚱하게도
사우디와 이란으로 날아가 폭발한 적이 있는데,
이는 이라크가 GPS 교란장치를 수입해 사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일로 부시 대통령은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에게 이 장비의 판매 금지를
요구했고, 러시아는 미국의 협조 덕에 경제가 유지되는 터라 이를
수용해 ‘이라크의 항전’은 조기에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처럼 GPS 신호가 손쉽게 교란될 수 있다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큰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미 공군은 전파교란을 받지 않는
신형 GPS 위성을 개발해 2003년부터 2010년 사이 기존의 GPS 위성과
교체할 예정이다.
아울러 미군이 사용하는 GPS 수신기도 교란신호를 제거하며 GPS 신호를
수신할 수 있도록 개량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KH-12와 라크로스 정찰위성 마지막으로 설명할 정찰위성(intelligence satellite)은
우주 전력의 대명사로 불려온 것이다.
정교한 지상 사진을 찍는 것이 주임무인 정찰위성은 300~1000km의
저고도에서 초속 8km의 속도로 지구의 남·북극 궤도를 하루 14.7회
회전하며 정찰 임무를 수행한다.
정찰위성에는 흑백 및 컬러사진을 찍을 수 있는 전자광학 카메라,
물체에서 나오는 열을 촬영하기 때문에 야간에도
촬영이 가능한 적외선(IR) 카메라, 그리고 지상으로 레이더파를 쏜 후
반사된 레이더파를 수신해 영상을 만드는
합성개구레이더(SAR : Synthetic Aperture Radar)
장치 등이 탑재될 수 있다.
미 공군 우주사령부가 운용하는 정찰위성의 대표는 KH-12이다.
KH-12 정찰위성에는 전자광학 카메라와 적외선 카메라만 탑재한다.
이 위성은
‘열쇠 구멍(Key Hole)’을 통해 비밀을 엿본다 하여 KH라는 이니셜을 얻었다고
하는데, KH 시리즈 중에서도 최신형이 ‘Improved Crystal’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KH-12이다.
이 위성은 강한 기동력을 가진 로켓 엔진을 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료를 제외한 순수 무게만 무려 10t인데,
로켓 연료를 탑재하면 무려 18t까지 올라간다.
이렇게 많은 연료를 탑재하다 보니 KH-11 같은 과거의 군용 정찰위성보다
수명이 훨씬 더 길어졌다.
군용 정찰위성과 상용 정찰위성의 차이점은 타원 궤도를 돌 수 있느냐에 있다.
상용 정찰위성은 일정한 원형 궤도만 돈다.
그러나 군용 정찰위성은 원형궤도를 돌다가 필요시에는
큰 타원 궤도를 형성한다.
타원 궤도를 돌게 되면 지구상의 어느 지점에서는 매우 멀어지나
그 대척점을 지날 때는 구심력 때문에 지상과 매우 가까워진다.
따라서 특별히 자세히 봐야 할 곳이 있을 경우 군용 정찰위성은
탑재한 엔진의 출력을 높여 타원 궤도를 돎으로써
특정 지역을 정밀 촬영하는 것이다.
우주전력이 없는 나라라면 정찰위성의 촬영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 우주전력을 갖춘 나라라면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전투기 등에 레이저 등의 무기를 탑재해
이 위성이 낮게 내려왔을 때 공격할 수도 있다.
이를 ‘위성 요격 공격(anti-satellite interceptors)’이라고 하는데,
이 공격을 피하려면 위성은 아주 빨리 달아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KH-12는 강력한 추력과 막대한 연료 덕분에 이러한 공격을 피할 수 있다.
KH-12 정찰위성이 찍는 흑백사진의 최고 해상도는 무려 10cm이다.
이 말은 가로 세로 10cm의 물체를 점으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으로
노트 크기의 물체를 모두 판별해낸다는 뜻이다.
KH-12가 촬영한 사진은 통신위성인 Milstar의 중계로 지상 수신소로
전송되는데,
이 정보는 즉각 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산하의 국가정찰국
(NRO : National Reconnaissance Office)으로 보내져
판독 작업에 들어간다.
ㅁㅁㅁ
작성일 2006년11월24일 18시06분
볼프네 마리님께/ 참고가 되시런지요...북한의 릉라888의 삼지연지도국 산하 하신파철수거회사가 1998년부터
구소련에서 7대의 중고잠함을 사들였습니다. 토막으로 잘라서 대만에
역수출한다는 계약으로 말입니다. 11대의 헬기도 같이요물론 구입이 끝나자마자 역수출은 커녕 하신회사는 곧 파산되여 사라졌습니다.상황을 이해하시리라 봅니다.삼지연지도국산하에 그당시 이런 유령회사가 1년에도 몇개씩 생겨서
구소련과 우크라이나 등지를 넘나들다가는 조용히 흔적도 없이 '파산'
되곤했습니다.참고로 무역국으로 되여있는 릉라888산하에는 전자장치연구소만 5개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GPS 교란장치만 전문으로 연구하는 연구소이고 자체안에
6층인쇄기판제작기지를 따로 가지고있습니다.
시험전파가 못나가게 늄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안골체육촌에 들어앉아있습니다공개목적은 GPS장치를 주체화하는것이라고 되여있다나요 ㅎㅎㅎ
볼프네 마리 (mariappa)
작성일 2006년11월24일 18시10분
ㅁㅁㅁ/GPS 장치라하면 러시아의 GLONASS 위성을 이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시험전파가 못나가게 늄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안골체육촌에
들어앉아있습니다" 는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구체적으로 알수 있겠습니까?
볼프네 마리 (mariappa)
작성일 2006년11월24일 18시18분
아~ 그리고 1998년 부터 고철목적으로 도입한 7대의 중고잠함은 양키급을
말씀하시는 것 맞습니까? "릉라888산하에는 전자장치연구소만 5개가 있습니다"
민감한 문제가 아니라면 공개 부탁드리겠습니다.
볼프네 마리 (mariappa)
작성일 2006년11월24일 18시31분
미국은 현재 하와이와 괌을 미군사력 투사의 거점으로 육성하고 있습니다.
특히 괌의 경우 동북아에 위치한 전략적인 목표물과 근시간내에 접근할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그 중대성은 점점더 커지고 있습니다.현재 전략정보자산인 최신의 글로벌 호크와 최신의 원자력추진 잠수함인
버지니아급의 숫자에 증가를 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특히나 버지니아급의
증강배치는 중국의 원자력잠수함 확충과 맞물려 가고 있는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본인이 파악하기에는 북한의 전력증강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우리해군의 전략급 무기체계의 육성도 그와 연관되어 있다고
판단되어집니다.
[1/5] 大 道 (greattao)
작성일 2006년11월24일 20시57분
공익을 위해 허락없이 퍼 올린 것에 대해 먼곳에서님께 양해를 구합니다.(__)더하여 본글로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5] //
작성일 2006년11월24일 21시16분
전자 부품 덩어리 이동식 레이더 자체 생산해 시리아에 수출 하고
GPS 교란 장치도 개발 생산 하고...전자 기술 대국 이구만....
평양에 삼성전자 수원 반도체 공장 규모의 반도체 생산 공장이 있다는
한호석 소장의 주장이 맞구만...
[3/5] ㅇㅇ
작성일 2006년11월24일 22시02분
북한은 소프트웨어쪽이 우리 보다 앞서있고 우리는 하드웨어쪽에 앞서있지요~`
[4/5] 볼프네 마리 (mariappa)
작성일 2006년11월25일 11시16분
위에 제가 글로나스 위성이야기를 한것은 팩트의 흐름으로 보아
전략무기공유정도의 국가간의 관계라면 GPS 위성이용에 관한 그리고
지상과 해양을 감시할수 있는 정보자산도 공유할수 있을것 같아 그리
말씀드린것입니다.GPS교란장치는 이미 일부의 국가에서는 전략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듯 합니다.
물론 그것을 만들수 있는 기술력을 소유한 국가는 한정적이라고 하더군요.
[5/5] 볼프네 마리 (mariappa)
작성일 2006년11월25일 13시06분
금수산의사당 경리부(북한내 공식명칭) = 릉라888(대외명칭
구글은 미국의 첩보기관인가?
미국인터넷 저작권법 폐기와 미디어의 주역 교체
<米ネット著作権法の阻止とメディアの主役交代>
2012年1月25日 타나카 사카이 (田中 宇)
최근, 미국 의회의 상하원에서, 인터넷상의 불법 복제 방지를 위해, 저작권 옹호에 관련된 2개의 법안이 심의되었으나, 인터넷계의 반대 운동에 의해, 2개의 법안 모두가 표결이 무기한 연기되었고, 사실상 폐기되었다. 2개의 법안은, 하원의 SOPA와 상원의 PIPA로서, 이 2개의 법률은 거의 비슷하다. 둘 다, 저작권자의 허가를 얻지 않고 컨텐츠(문서, 화상, 음악, 동영상등)를 다운로드할 수 있게 되어 있는 웹 사이트에 대해, 검색 엔진, 요금 결제, 광고 대리점등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SOPA/PIPA...What's the big fuzz?)
위 2개의 법안은, 미국의 매스컴과 엔터테인먼트 업계로부터의 강한 요청으로 제기되었다. 유튜브등에는, 텔레비전 영상을 녹화한 파일 등이 무허가로 업로드되고 있다. 파일 교환 툴을 잘 사용하면, 전세계의 PC로부터 음악과 동영상 파일을 무료로 얻을 수 있다. 이것들의 대부분은, 매스컴과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저작권을 침해하고 있다.
종래에는, 저작권자가 이 저작권 침해를 중지시키려면 , 위법으로 업 로드된 컨텐츠를 게재하고 있는 웹 사이트(유츄브등)에 연락해, 컨텐츠를 삭제하도록 하는 방법을 취해 왔다. 신 법안은, 이 종래형의 방어책에 추가하여, 저작권자의 제소에 응하는 형식으로, 미 당국이, 문제의 사이트에 대한 링크가 검색 결과에 나오지 않게 하도록, 구글등의 검색 엔진에 명령하거나 크레디트 카드 결제 업계나 광고 업계에 대해, 문제의 사이트에 대한 서비스 제공을 중지하라고 명령할수 있게 된다.
(PIPA 법안에는, 문제 사이트의 IP주소를 도메인명으로 변환한다는, 웹의 움직임의 근간을 이루는 DNS 서버의 변환 리스트에서, 문제된 사이트의 저작물을 삭제하는 것을 당국이 명령할 수 있는 조항도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미 국내법으로 규제할 수 있는 것은, 미국내의 DNS 서버 뿐이어서, 미국내와 미국외의 서버가 다른 리스트를 가지게 되는 상황이 되어, 단일해야만 하는 인터넷에 혼란을 부를 수도 있다는 기술적인 지적을 받았다. PC측에서 사용하는 대책 툴도 벌써 개발되었기 때문에, 이 조항은 삭제되었다)(PROTECT IP Act From Wikipedia)
저작권 침해에 대한 종래의 대책은, 사이트상에서 불법침해한 컨텐츠만을 삭제시키는 것이지만, 신법안의 방식은, 그 사이트 자체를 제한하는 것이다. 유튜브에 단 1개의 불법 텔레비전 녹화가 업 로드된 것만으로도, 유튜브 전체가 정지 당할 수도 있다.
문서 게재의 경우, 인용과 표절의 경계선(문서 전체와 인용 개소의 관계성으로 정해진다)이나, 사실과 창작물의 경계선(사실의 범위를 어떻게 해야할 까)은, 여러가지(애매한) 판단이 가능한 경우가 많다. 미 당국이 매스컴의 편에 서서 판단을 내린다면, 시사관련 블로그내에는 표절이 많이 포함되어있다고 간주할 것이며, 정부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하는 웹 로그가 모여 있는 사이트등이, 폐쇄되기 쉬워질 것이다. 이것은, 저작권 단속이라고 칭한 언론 자유의 탄압이 될 수 있다.
그 때문에 유튜브나, 유튜브의 모회사인 구글, 위키페디아 영문판, 레디트(투고 사이트)등의 미국 사이트가 SOPA와 PIPA의 법제화에 반대해, 미 의회에서 심의가 본격화한 1월 19일부터, 미국의 많은 사이트를 잠정 폐쇄하는 등의 항의 행동을 실시했다. 미 의회에서도, 법안에 찬성하던 의원들이 반대로 돌아섰기 때문에, 상하원, 모두 1월 20일에 심의를 중지하고, 법안의 필요성이 인정될 때까지, 표결을 연기한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무기한 연기로 보도되었다. (SOPA and PIPA postponed indefinitely after protests)
▼ SOPA 폐기는 미디어 주역교체의 상징
SOPA와 PIPA, 이 2개의 법안이 폐기된 상황은, 매스컴과 엔터테인먼트라는 구닥다리 미디어가 가졌던, 정치력의 감퇴와 그것을 대체하며 등장하고 있는 인터넷 ( 신미디어)이 가진 정치력의 확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1월 19일 전후, 인터넷상에서 여러 사이트들의 블랙 아웃(항의문의 페이지가 표시된다)운동 등 「사상 최대 규모의 항의 행동」이 거행되어, 그 위력에 압도 된 미국 의회가 태도를 바꾸었던 것이라는 「시민운동의 승리」를 강조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불과 몇일 뿐이었던 항의 행동이 사태를 극적으로 변화시켰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시민들의 항의 운동은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 등 다른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행해지고 있지만, 사태를 커다랗게 바꿀수 있는 상태에는 이르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의 법안폐기의 의미는, 낡은 미디어로부터 새로운 미디어로의 권력이행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구미디어 업계와 인터넷 업계에는, 이 문제로 이전부터 대립이 있어 왔으며, 점차 인터넷 측이 우세하게 되었다. 1월 20일로 예정되어 있던 법안 표결을 위한,인터넷 업계의 로비 활동이 의회에 압력을 가한 결과, 표결이 중지되었다고 지적되고 있다. (Lobbying campaign scuttles piracy bills)
미국과 영국,호주에서 매스컴 기업을 운영하는 루펏트・머독은, 미국 정부가 2개의 법안에 소극적이므로 「오바마는, 실리콘밸리의 자금 공급자에게 영합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는, 미 정계에 거액의 헌금을 하고 있는 것은, 인터넷 업계보다, 구미디어의 일부인 엔터테인먼트 업계이다. 따라서, 인터넷 업계는, 헌금액이 적었어도, 커다란 정치력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매스컴은, 미국이나 그 외의 근대적인 제국에서, 국가적인 목표를 따르게 하는 국민들의 가치관 형성이라는 임무를 가진 선전 기능이다. 특히 제2차 대전 후의 미국에서는, 매스컴이 소련과 공산주의, 알카이다 등, 적대국의 "악(惡)"을 가능한 한 침소봉대해, 사람들의 「선악관」을 미국의 국가 전략에 따른 형태로 재편해 나가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매스컴은 공식상으로는 「사회정의」를 표방하여, 정부와 정치가를 감시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그러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쉽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매스컴은, 2003년의 미군의 이라크 침공에 즈음해, 이라크가 대량 파괴 무기를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날조해 미국의 개전사유를 만드는 미 당국의 전략에 따라, 엄청난 왜곡 보도를 자행했다. 그 전후로, 테러 대책과 이란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의 왜곡을 함으로써, 미국 매스컴에 대한 신뢰는, 미국내외의 많은 사람들에게 대부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뢰의 상실이, 매스컴을 미국이라는 국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기능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매스컴이 국가 기능의 숨겨진 일부인 이상, 매스컴의 정치력이 감퇴한다는 상황은 있을 수 없다. 국가가 감추고 있는 기능으로서 인터넷 업계가 매스컴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매스컴이 시대에 뒤떨어지는 이유
미국이라는 국가의 숨겨진 기능으로서 인터넷 업계가 매스컴을 대체했다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은 것인가. 그런 관점에서 인터넷 업계를 바라보면, 대체되었다고 생각되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게된다.
신문에 대항하는 것으로서, 구글 등의 뉴스 부문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열람하게 되어, 텔레비전보다 유튜브의 동영상을 열심히 보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다. 구글과 야후 등, 포털 사이트와 검색 사이트가 링크혹은 보관, 유지하고 있는 컨텐츠(기사등)안에는, 매스컴이 제작한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 매스컴 이외의 일반 블로거등이 제작한 것이 훨씬 많다.
매스컴은, 해설 기사등에 의해, 뉴스에 의미를 부여할 때, 국가 전략에 따른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독자의 가치관을 국가의 편익에 맞추어 간다(미국 매스컴은 적극적으로 이렇게 하고 있지만, 일본의 매스컴은 초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최근, 일본의 매스컴은, 의미부여를 표면적으로만 함으로서, 일본사람이 사건의 본질에서 소외되는 상황을 만들어, 대미 종속인 국가 전략 유지에 공헌하고 있다).
대조적으로, 포털과 검색 사이트의 기능에 숨겨진 가장 중요한 점은, 검색 결과를 통해, 무수히 많은 컨텐츠 중에서 어떤 것을 표시하는지, 어떠한 순서로 표시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무수한 컨텐츠 가운데, 어떤 종류의 경향을 가진 정보를, 우선적으로 최상위에 노출 하는 방법으로 「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교묘하게 각색된 정보가 주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하나다」 「사실을 가르쳐 달라」고 하지만, 실제의 경우, 사물(사건)의 사실성은 상대적인 것이며, 특히, 정치 경제사회의 분야에서는, 다양한 "사실" 이 주장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하나」라고 맹신하는 상태에서, 매스컴은 기사의 내용을 통해, 인터넷 업계는 무수한 컨텐츠 중 어떤 것을 우선적으로 표시하는 가에 의해서「이것이 유일한 사실」이라고 보는 사람이 느끼게 만드는 내용을 표시해, 사물(사건)의 「사실성」을 교묘하게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종래의 매스컴에서는, 연봉 1억 몇천 전후의 기자들이, 해외출장과 전세 자동차에 의한 「심야와 새벽의 기습취재」등, 비용을 넘칠정도로 많이 써서 기사를 제작했으므로, 코스트가 매우 비싸다. 대조적으로, 매스컴 이외의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리는 기사(컨텐츠)는, 대부분이 무상으로 제작되고 있어서, 코스트가 제로에 가깝다. 포털과 검색 사이트에서는, 비용이 많이 들어간 매스컴의 기사가, 반드시 최상위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매스컴의 유료 기사를 읽지 않고, 매스컴 이외의 사람들이 올린 인터넷상의 무료 기사만을 읽어 봐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간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정보와 지식을 얻는 정도가 늘어나는 만큼, 신문과 잡지가 팔리지 않게 되어, 인건비 삭감으로 인해 기자의 급료가 줄어 들고 일인당 업무량이 증가하고, 기사의 질도 떨어져 신문과 잡지는 더욱 더 팔리지 않게 된다. 매스컴의 기사는, 고용된 기자가 직업으로서 쓰여지고 있지만, 인터넷의 기사는 「무상이라도 쓰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의 기분(의지)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에 코스트가 싸다.
이 대조적인 현상은, 프랑스 혁명의 전후, 유럽 제국의 군대가 가졌던 존재방식과 닮아 있다. 프랑스 혁명전의 유럽 제국 군대는 "직업군인"과 전의(戰意)의 낮은 강제적인 징병 군인으로 구성되어 있어,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강력한 국방정책이나 전쟁을 할 수가 없어, 그다지 강한 군대를 육성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으로, 국가가 「일반 사람들의 것(주권 재민)」이 되자, 국가의 주인공이 된 사람들(국민)은, 무상의 의지(애국심)를 발휘해, (자신들의)국가를 위해서 병사가 되어 기꺼이 죽었고, 기꺼이 납세했으며, 전비를 조달하게 되었다.
세계 최초로 국민 국가의 「근대적」인 군대를 갖게된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직업군인이나 강제 징병원으로 구성된 다른 유럽 제국의 「전근대적인」의 군대와의 전투에서, 훨씬 강했다. 유럽 제국의 왕후 귀족은, 다투어 자국을 국민 국가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결국, 프랑스 혁명(국민 국가 혁명)이, 전세계의 제국을 「근현대화 」로 나아가도록 만든 것이다. 따라서, 근현대국가에는, 국민을 그런 기분(의지)이 생기게 만드는 프로파갠더(선전)가 필수적인 기능이 되었다. (覇権の起源; 패권의 기원)
프랑스 혁명은, 군대의 중심을 「돈의 크기가 충성심의 크기」라는 직업군인으로부터, 아무 댓가없이 전사하거나 전쟁비용을 내거나 하는 「국민」으로 전환시켜, 국가가 부담해야할 전쟁 경비를 극단적으로 끌어 내렸다. 마찬가지 상황이, 현재 미국등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매스컴에서 인터넷으로 대체되는 선전 기능의 이전이라는 정보 혁명은, 선전을 만들고 올리는 사람들의 중심을, 직업 기자로부터, 무상으로 써서 올리는 「인터넷시민, 네티즌」(블로거,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하고 있는 사람들등)으로 전환시켜, 선전 제작의 총비용을 극단적으로 끌어 내린 것이다. 재벌신문의 스타 기자가, 프랑스 혁명전의전근대적인 직업 군인과 겹쳐 보이는 느낌이다.
그러나, 새로운 「혁명」의 요점은, 포털과 검색 사이트 등 인터넷 업계가,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는 컨텐츠의 순서를 「알고리즘」 등 객관성을 가장하면서, 은밀하고 교묘하게 조작하는 것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 첩보 기관으로서의 구글
미국이라는 국가에 있어서, 매스컴보다 인터넷 업계가 뛰어난 점은, 코스트가 싼 것 뿐만이 아니다(원래 앞에 쓰여진 싼 코스트는 국가가 지불하는 코스트가 아니다). 구시스템은, 매스컴이라는 발신자로부터, 국민이라는 수신자에게 주어지는 일방통행이며, 주어진 정보를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매스컴이 신경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독자 투고나 텔레비전 시청률 등 밖에 없다).
대조적으로 인터넷 업계는, 웹의 열람 이력과 북마크등을 인터넷업계의 서버로 보내지는 기능에 의해서, 국민(이나 전세계의 사람들)이,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대단히 상세하게 분석할 수 있다. 스마트 폰의 전화번호부나 송수신 메일을 구글등의 서버에 보존시킬 수 있으므로, 사람들간에 이루어져 있는 인간 관계의 연결을 훔쳐 볼 수가 있다.
이러한 시스템을, 가장 의도적으로 만들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 구글이다. 예를 들면, 구글의 G메일에 신규 등록을 할 때, 휴대 전화 번호의 등록이 필요하다(이전에는 필요없었다). 앤드로이드의 스마트 폰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휴대 번호와 G메일의 어카운트가 제휴되어, 소비자가 브라우저로 무엇을 보았는지, 어떤 어플리를 다운로드해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외출시에 어디에 갔었는지 등의 정보가 수시로 구글로 보고가 들어간다. 물론, 여러 기능중에서, 메뉴를 결정하여, 그렇게 할 수 없게 만드는 기능도 있기는 하지만, 체크를 했다고 해서, 그 정보를 구글이 놓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도 없다. 애플도 i폰으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iPhones and Android phones building vast databases for Google and Apple)
G메일 계정을 입력하지 않고도, 앤드로이드의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마켓으로부터 어플리를 다운로드할 수 없다. PC로 인터넷에서 익명으로 apk 파일을 습득하고, 가짜어플리로 인스톨 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런 고도의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소수의 사람뿐이다(i폰은 그것도 할 수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구글로부터 추천 되는 대로, 개인정보와 이력의 대부분을 자각하지 못한채, 전부 구글에게 맡기고 있다.
자신의 개인정보를, 다른 개인이나, 국내의 알지 못하는 기업에게 알리는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민감한 현대인도, 개인정보를 구글에게 맡기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도 둔감하다. 스마트한 것은, 스마트 폰을 사는 측이 아니라, 파는 측일 뿐이다. 사는 측은, 단지 스마트한 기능을 사용하는 것에만 빠져있다. G메일은 세계에서 3・5억명의 계정이 등록되어 있다.
구글은, 세계의 무수한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것으로, 미국에 있어서, 새로운 수단의 첩보 기관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CIA 등 기존의 첩보 기관은, 세계 각지에서 사태를 탐지 하는 요원(스파이등)을 두어, 세계적인 정치 경제・군사 사회등의 동향을 분석해, 미국의 패권 전략에 유용하게 써 왔다. 이러한 사람을 통한 탐지는 향후에도 필요하겠지만, 구글이 전세계에서 모으는 방대한 개인정보는, 그것을 훨신 뛰어 넘는 것이다. 그렇게 얻어진 정보를 잘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첩보 기관이 파악하기 어려웠던, 세계인들, 개개인의 머릿속과 마음의 움직임을 보다 상세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대미 종속국가인 일본은 스마트폰 장려가 국책이다
G메일은, 하나의 계정 당, 7기가바이트까지 쓸 수 있어서, 거의 무진장으로 메일과 개인정보를 축적할 수 있다. 정보의 분석자측은, 세계인이 축적하는 개인정보가 많은 만큼, 여러가지 상황을 분석을 할 수 있다. 단순하게 마케팅의 도구로도 사용할 수 있으며, 각국의 정치적인 분석 결과를 그 나라의 친미적인 정치가에게만 알려주는 것으로, 친미 정당을 선거에서 당선시켜, 지속적으로 친미여당으로 만들어 둘 수 있다. 또한, 세상의 반미 정치가의 개인정보와 더러운 스캔들도 찾을 수도 있다. 일찌기, 미국과 영국의 첩보 기관이 전세계의 인터넷과 위성을 경유하는 통신을 감청해 분석하는 시스템인 「에슈론」이 화제가 됐었지만, 구글은 에슈론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에슈론은 정보가 오고 가는 도중에 감청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구글은 정보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으로 정보의 축적이 가능하다. (世界中の通信を盗聴する巨大システム: 전세계의 통신을 도청하는 거대한 시스템)
첩보 기관은 정부 조직이지만, 구글은 민간기업이므로, 완전히 별개라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첩보 기관이 구글에게 접근하여, 기존 정부 산하의 선전 기능을 사용해 구글의 이미지를 향상시켜, 구글의 주가 상승등을 도와 주고, 미국의 국익과 「테러 대책」을 위해 협력해달라고 권유받으면, 기업으로서 주주와 미국이라는 국가의 이익을 생각할 경우, 구글은 이에 협력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911 이후의 미국이 채택한 테러 전쟁의 유사 체제하에서는, 미국 기업이 모은 개인정보를, 미국 당국이 테러 대책의 명목으로 검열하는 것이 가능하기도 하다.
구글의 약관에는 「Google에서는, 계정에 포함되는 정보를 Google의 다른 서비스 또는 제삼자로부터 취득한 정보와 통합해, 사용자의 편리성 향상 및 Google의 서비스 품질 향상을 위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라고 써 있다. 그 이외에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구글이 정보를 훔쳐 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용자의 편리성 향상 및 Google의 서비스의 품질 향상」안에, 미국의 테러 전쟁에 따라, 미국 정부에 대해 개인의 정보제공이 포함되어 있어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개인정보를 스마트폰의 서버에 맡기는 사람들은, 구글과 애플의 「선의(善意)」를, 아무 근거도 없이 믿을 수 밖에 없다.
일본의 휴대 전화 번호에 조건부로 포함된 개인정보는, NTT 도코모 등 일본의 전화 회사가 가지고 있다. 구글이 G메일 등록시에 일본인에게 휴대 번호를 입력시켜도, 그것만으로는 개인의 정보를 특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도, 911이후, 대 테러 전쟁상황하의 미국 패권체제 아래에서는, 테러 대책의 명목으로 일본 정부가 도코모에게 개인정보를 제출시켜,합법적으로 미국 정부에게 고지할 수 있다.
사용자가 입력한 크레디트 카드 번호를 다른 개인정보와 연계하는 것은, 더욱 간단하다. 카드 회사는 VISA도 마스터 카드도 아메리칸익스프레스도 미국 기업이며, 미 당국은, 미국내의 법률이나 정책의 범위내에서 필요한 상황을 연계시킬 수 있다. 크레디트 카드는 인터넷보다 훨씬 전부터 있었지만, 온세상의 개인정보를 미국으로 집중시키는 정보 패권이라는 점에서, 구조상, 구글 등의 인터넷 업계와 마찬가지다. 이러한 방법으로 개인의 특성(성별과 연령, 주소등)과 구글과 애플, 야후등이 모은, 그 사람의 인터넷상에서의 활동과 인간 관계, 구매 행동등을 관련지어 분석하는 것으로, 전세계인의 상당부분의 생각과 마음의 움직임을 추측할 수 있다.
구글은, 애플보다 훨씬 첩보기관스럽다. 애플은 PC 시대부터, 전통적으로 하드웨어를 자사가 제조하는 방식을 고집해 왔다. 반면에 구글은, 사이트와 웹 툴 등, 소프트웨어 뿐이다. OS는 오픈 소스로, 하드는 일본과 한국등의 기업에게 만들게 하고 있다. 그들이 중요시하는 것은, 몰려오는 개인정보뿐으로, 그 외의 부분은 하청을 주고 있는 구글 측이, 제조업적인 애플보다, 첩보기관에 가까운 움직임을 하고 있다. 그러나, 스티브・쟙스가 죽은 후,그가 세계적인 영웅이라고 찬양된 대대적인 선전을 보면, 애플도 첩보 기관이 은밀하게 활동하게 해주는 댓가로, 기업 이미지의 향상과 주가의 향상을 얻기로 했을지도 모른다고 느낀다.
대조적으로, 야후와 마이크로소프트는 내리막길이다. 이 기업들은, 첩보 기관과의 제휴에 소극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원래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즈는, 인터넷이 대대적으로 보급하기 전에 확립된 OS로, 윈도우즈를 쓰는 PC는 익명성을 유지한 채로 사용할 수 있다. 앤드로이드가 G메일의 계정 입력을 전제로 만든 「첩보 기관 」적인 새로운 OS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윈도우즈는「첩보화 이전」의 옛 제품이다. 머지않아 윈도우즈를 쓰는 PC는, 과거의 유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구글은 윈도우즈상에서도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크롬(Chrome)이라고 하는 구글의 새로운 웹 브라우저는, 컴퓨커를 시작하면 먼저, G메일 계정의 입력을 요구해서, PC내의 기존 브라우저로부터 이력과 북마크를 카피해 구글의 서버로 보낸다. 나중에 이력의 복제를 그만두게 할 수 있지만, 많은 사람은 그런 일쯤은 염려하지 않는 「스마트한 현대인」일 것이다. 인터넷 업계 만세다.
구글과 애플은, 미국이 가지는 패권의 새로운 부분이 되고 있다. 따라서, 대미 종속을 국시로 하는 일본에서, 네트워크가 국내에서 완성되고 있는 일반 휴대 전화를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국민 전원에게 글로벌 스탠다드인 앤드로이드나 i폰인 스마트 폰을 구매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당국이 움직이는 것은 당연하다. 도코모와 소프트뱅크를 비판하는 일본인은 많지만 「실제주인」의 일부인 구글과 애플을 나쁘게 말하는 일본인은 적다.
(도코모의 부사장은 최근, 안전성의 관점에서, 도코모의 이용자가 G메일의 계정에 로그인하지 않고도 앤드로이드의 스마트 폰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미 종속을 국시로 해야할 일본의 기업이, 미국의 패권을 무시하는 이런 행동을 허락이나 받은 것일까, 향후의 전개가 주목받고 있다. 작년 말부터 발생하고 있는, sp모드의 부진이라든지, 1월 25일 일어난 회선의 부진이라든지, 무엇인가 관계가 있는게 아닐까) (NTTドコモ 辻村副社長に聞く)
미국과 영국 첩보 기관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오히려 행복한 종속형의 일본과는 대조적으로, 미국의 첩보 기관이 비집고 들어올라 치면, 어떤 일을 일으킬지 모르는 중국이, 인터넷에 구축한 국가 파이어 월(fire wall)(보안방화벽)로, 구글 사이트를 차단했던 것은, 당연한 흐름이다. 보안방화벽이, 이란 등, 미국에 의해 엉망진창이 될 것 같은 다른 반미 제국에 수출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세계의 패권 구조는 바야흐로, 사이버패권으로 바뀌었다. (グーグルと中国:구글과 중국))
중국인은, 공산당에게 개인정보를 보여주며 그것을 자각하면서 인생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일본 등, 미국과 동맹 제국의 사람들은, 구글 등 인터넷 업계의 첩보 기관에게 개인정보를 보여주고 있는 현실에 대한 지각이 없는채로 , 인생을 보내고 있다. 인터넷 업계의 첩보 기관은, 영국의 MI6 등, 교묘하게 운영되어 온 기존의 첩보 기관의 일부이며, 전세계의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갖게한 채로 지배를 계속할 수 있는 수완이 있다.
구글의 검색 결과에 자신의 기사가 실리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정보 소통을 위한 중요한 한 요소이다. 하지만 이번에 구글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쓴 것으로, 향후에 구글의 제재로, 내 기사가 구글에 실리기 어려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각오하고 있다. 그것은 싫은 일이지만, 나는, 여러 가지를 조사해가면서, 일본을 포함한 세계사람들을 위해, 이번에 쓴 것 같은 글들을 쓰지 않고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구글에게 가까이 가는것 보다, 자유롭게 쓰는 것이, 자신의 정신 건강상, 좋다. 구글과 매스컴이 사람들의 가치관 형성을 주도하고 있는 지금의 세상에서, 구굴이나 매스컴을 비판적으로 묘사하는 내가 눈에 띄지 않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대미 종속(보수꼴통)계열의 사람들이라면 「니꼬라지를 보라」고 할 것이나, 어쩔 수 없다.
번역 오마니나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미합동 침략전쟁 훈련 중지 촉구논평
News by Spring Lake
재미동포전국연합회 대변인은 23일 "남북관계 회복 방해하는 전쟁공격훈련 때려치워라!"는 제목의 논평을 발표하면서 "이남정부는 어리석게도 키리졸브 훈련과 쌍룡훈련을 통해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여 4월 총선에서 승리하고자 한다. 그리고 핵안보정상회의 또한 4월 선거에 이용하려는 얄팍한 수를 부리고 있다"고 지적하는 한편 "남북관계 회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전쟁훈련은 즉각 중단하고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와 일본 필리핀 유럽등 해외기지에 있는 미군 기지들을 즉각 폐쇄하고 이에 들어가는 비용을 자국의 국민을 위해 사용하여 미국 경제를 살리길 바란다. 그리고 미국은 북미회담에 적극적으로 임하여 주한미군 철수와 더불어 북미관계 정상화, 국교수립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을 싣는다.[민족통신 편집실]
천안함 사건을 조작하고 연평도 사건을 유도해 온 이명박 정권은
또다시 충돌을 기도하려는가?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미합동 침략전쟁 훈련 중지 촉구논평
[논평] 남북관계 회복 방해되는 전쟁공격훈련 때려치워라!-북을 겨눈 한미합동 침략-전쟁훈련은 모두에게 참화를 가져올 위험한 군사도발이다.-남북관계가 악화되어있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인 제공자가 바로 이명박 정부라는 것도 모두가 또한 잘 알고 있다. 남북관계 회복은 곧 조국반도의 평화정착으로 귀결된다. 평화정착이 이루어지면 남북의 자주통일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남북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대결구도를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민족의 명절인 구정이 지나면 키 리졸브, 독수리 군사훈련이 실시되고 3월에는 쌍룡훈련이 실시된다. 그리고 상반기에는 서해안 국경에서 야외기동훈련이 실시된다고 한다. 그것도 외세의 군대를 불러 조국반도에서 실시된다고 한다. 연속으로 진행되는 훈련으로 인해 전쟁위험은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 전쟁훈련은 방어를 목적으로 자주국방을 하는 나라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침략을 위한, 그것도 외세를 끌어들어 합동으로 하는 전쟁공격훈련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 전쟁공격훈련을 한다는 것은 전쟁의 참화를 불러일으키는 도화선이 된다. 이러한 전쟁공격훈련을 하면 주변국 모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다. 즉 전쟁이 발발할 위험이 매우 높다.특히 2월부터 실시예정인 키 리졸브, 독수리 훈련은 방어훈련이 아니라 공격 즉 침략훈련이다. 그것도 외세인 미국과 같이 합동군사훈련하는 것이다.순수 방어목적인 훈련이 아니라 공격, 침략훈련이 이유는 키 리졸브-독수리훈련이 ‘작전계획5027’, ‘작전계획5029’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 두개의 작전계획은 북과의 전면전과 북의 영토 점령, 그리고 북정권붕괴시 북침공격한다는 계획이다. 무조건 그리고 일방적으로 북과 전쟁하겠다는 작전계획은 조국반도를 또다시 전쟁터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전쟁에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어찌 민족을 위험에 빠트리고 조국 강토를 피바다로 만들려는 끔찍한 전쟁침략훈련을 할 수 있다 말인가?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 중에 동족인 북을 침략하기 위한 군사훈련에 찬성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다만 전쟁을 선동하고 전쟁에 미친 반통일, 반민족 무리가 바로 이명박정부와 한나라당의 일당들이다. 그리고 3월에는 쌍룡훈련이 실시된다. 키리졸브-독수리훈련과 같이 한미합동군사훈련이다. 쌍룡훈련 또한 ‘작전계획5029’, 북정권붕괴를 가정하고 북에 침투 침공하는 훈련이다.특히 쌍룡훈련은 1989년 팀 스피리트훈련 이후 23년 만에 실시되는 최대 규모의 해병 연합상륙훈련이다. 이 훈련에 참가하는 미 제3해병기동군은 ‘작전계획 5027’에 의해 가장 먼저 전개되는 부대로 고속상륙정(LCVP)과 대형 수송기(C-5), 침투용 수송헬기(CH-53), 중형 수송헬기(CH-46), 공기부양정(LSF), 상륙함(LST) 등을 갖추고 있다.이렇게 북을 침투, 공격만 전문으로 하는 미 제3해병기동대가 참가하는 쌍룡훈련을 방어목적이라 우긴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또한 이남정부는 2월 5일부터 17일까지 태국에서 실시되는 코브라골드 훈련에 참가하고 7월 하와이에서 열리는 환태평양연합훈련(림팩)에도 처음으로 참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4월에는 주한민군이 필리핀에서 열리는 발리카탄 훈련에 참가한다. 코브라골드훈련은 미국 태평양사령부 주도로 열리는 아시아지역내 최대 연합훈련이며 발리카탄 훈련은 중국을 대상하는 전쟁훈련이다. 이러한 각종 훈련은 조국반도의 전쟁뿐만아니라 아시아 지역내의 전쟁까지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시기적으로도 주목된다. 3월 핵안보정상회의와 4월 총선시기와 맞물려 전쟁훈련을 하는 것이다. 핵안보정상회의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의 주도로 만들어진 회의이며 회의 목적은 핵테러 방지, 핵 비확산, 핵의 평화적 이용, 즉 평화를 정착시키기위한 회의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주도로 조국반도에서는 북공격전쟁훈련을 하고 필리핀에서는 중국을 상대로 전쟁훈련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평화를 위한 핵안보정상 회의를 하자고 한다. 미국의 전형적인 이중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평화를 말하면서 북을 공격하고 중국을 공격하는 전쟁 훈련을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연평도 사건과 천안함 사건은 한미합동 전쟁훈련 도중에 벌어진 사건이다. 2012년에도 이와같은 일이 반복될 수도 있다. 이남정부는 어리석게도 키리졸브 훈련과 쌍룡훈련을 통해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여 4월 총선에서 승리하고자 한다. 그리고 핵안보정상회의 또한 4월 선거에 이용하려는 얄팍한 수를 부리고 있다. 그러나 만의하나 이같은 전쟁훈련도중 전쟁으로 확산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미국은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 2000년 들어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리비아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현재 이란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으며 이북과는 항상 전쟁국면을 조성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 평화를 운운하면서 오히려 세계 각지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미국 국민들이 입었다. 미국 또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지만 승리의 댓가는 누구에게 돌아갔는가?미국 국민의 삶은 점점 힘들어지고 있으며 급기야 월가점령시위까지 벌어지고 있다. 전쟁의 이득은 오직 군수업체와 1%의 부자들만 누릴 뿐이다. 오마바 대통령은 군수업체에 휘둘려 전쟁을 하는 행위는 즉각 중단되어야 할 것이다. 조국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처음 3주동안 남북 합쳐 2백만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다. 그리고 전국토가 황폐화 될 것이며 핵발전소를 비롯한 모든 산업시설이 파괴될 것이다. 이로인해 핵위험과 더불어 엄청난 경제적 혼란도 예상된다. 또한 미국 본토에도 수백만명의 사상자와 더불어 동부와 서부지역의 국토가 전쟁의 불길 속으로 사라질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 경제가 지금도 힘들어 어려운 상황인데 전쟁까지 수행하려면 엄청난 군비가 들어간다.6.25전쟁이라 알려진 코리아 전쟁 비용은 2950억달러, 베트남 전쟁 비용은 6700억 달러, 1991년 걸프전 당시 전쟁 비용은 940억달러 그리고 10년간 테러와의 전쟁 비용으로 3조2280억 달러(약 3468조원)를 쓴 것으로 조사됐다.이러한 엄청난 군비를 사용하면서 미국 국민들의 삶은 점차 피폐해져갔다. 중산층이 무너지고 미국 경제는 서서히 침몰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전쟁비용 때문이다. 작년 6월 브라운 대학의 왓슨 국제관계연구소가 발표한 ‘전쟁 비용’(Costs of War) 보고서에 따르면 9.11 이후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간, 파키스탄 등에서 테러집단들과 전쟁을 벌이는데 지출한 비용은 무려 3.2조~4조 달러(3.2~4 trillion dollars)에 달한다.전쟁에 따른 막대한 군비지출로 인해 미국 정부의 부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 대학 교수는 2008년 모기지 위기로 시작된 미국의 금융위기는 부분적으로 막대한 이라크, 아프간 전비와도 관련이 있다고 지적할 정도이다. 미국의 금융위기로 인해 국민들은 일자리를 잃고 집을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나가는 등 중산층이 빠른속도로 붕괴되어 갔다. 한편 미국의 엄청난 군비지출로 인해 국민의 삶의 하락한 반면 록히드 마틴, 보잉, 노드롭 그루맨, 레이테온, 제네럴 다이내믹스 등 5개 기업 군수업체는 엄청난 이익을 본 것이다. 2010년 7월 26일 미 뉴욕타임스 자매지인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 인터넷판에 따르면 미국의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전쟁비용이 무려 1조달러(한화 약 1천200조원)에 달하고 미국의 230년 역사중 20%인 47년간이 전쟁기간이었다는 충격적인 미 의회 보고서가 나왔다.2001~2007년 대테러 전쟁에 쏟아 부은 비용은 미국민 1인당 약 4100달러에 이른다. 2007년 한 해 이라크 전비로만 모두 1370억달러의 예산이 투여됐다. <원월드닷넷>은 “이 정도 금액이라면 3900만 명의 미국인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100만 가구에게 주거를 마련해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미 시민단체 ‘국가우선순위프로젝트’가 내놓은 조사에 의하면 시카고 시민들의 세금 부담 이라크 전비는 지금까지 48억달러다. 이 돈이면 시카고 일대에 초등학교 587개를 지을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엄청난 군비 지출로 인해 미국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다. 그리고 전쟁을 치르면서 이익은 고스란히 군수업체와 금융업체 즉 1%들이 다 차지하여 99%의 미국인은 매우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 학교들이 문을 닫게 되는 재정위기에 처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키 리졸브 - 독수리 훈련, 쌍룡훈련으로 인해 북과의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국 경제는 절단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했지만 미 본토의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북과의 전쟁을 한다면 미 본토의 피해는 당연히 예상된다. 북과 전쟁한다고 치루는 엄청난 전쟁 비용도 문제지만 미 본토 피해 또한 무시못한다. 이미 북의 미사일은 핵을 싣고 지구의 어느 구석이라도 다 도달하는 최첨단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대테러 전쟁 10년동안 지불한 4조 달러의 전쟁비용으로 미국 경제는 내리막길로 접어들어 바닥까지 갈려고 한다. 미국 각 주정부가 이미 파산선고를 하고 있고 미국 국민들 형편 또한 주정부와 다를바 없다. 최근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경제를 살린다고 묘수를 마련 중이라 한다. 세금을 더 거두고, 일자리를 더 만들고, 그리고 기업활동을 장려한다고 해본들 다 소용없다. 미국 경제 살리기의 지름길은 세계와의 전쟁을 즉각 중단하는 것이다. 지금도 미국은 이란, 중국, 그리고 북과의 전쟁 패를 만지작 거리고 있는데 이것은 미국의 완전한 몰락을 가져오는 최악의 패라는 것을 명심해야한다.세계를 상대로 하는 각종 전쟁훈련은 하면 할수록 군수업체와 주변 무리들인 1%만 돈을 벌고 99%의 국민은 더욱더 비참한 생활을 한다는 것을 오바마 대통령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군수업체에 휘둘리는 허수아비가 되지 말아야 한다. 다시 언급하지만 조국반도에서 예정된 키리졸브-독수리 훈련과 쌍룡훈련은 남북관계를 더욱더 악화시키는 훈련이면서 동시에 미국 국민들에게도 엄청난 불행을 가져올 수 있는 훈련이다. 특히 이번 훈련을 이남과 미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에 이용하기위해 군사훈련을 한다면 이 또한 매우 위험하다. 침몰해가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을 살리기 위해 전쟁으로 치닫게 될 위험천만한 군사침력훈련을 한다고 하는 것은 빈대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 된다. 그리고 미국은 경제 살리기위해 전쟁훈련을 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정책이다. 과거 미국이 치른 전쟁을 보더라도 전쟁훈련이나 전쟁을 한다고해서 경제가 살고 국민들의 삶이 나아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남과 미국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전쟁훈련을 하고 전쟁을 하면 할 수록 국민은 세금은 고스란히 다시 1%의 부자들에게 돌아가 그들은 더욱더 부자가 될 뿐이다. 그래서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는 것이다. 지금 현재 북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거이후 김정은 부위원장 체제로 전환되었다. 서거로 인해 북은 슬픔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인간의 예의와 도덕을 버리고 북을 자극하여 침략하는 전쟁훈련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규탄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김정은 부위원장 체계가 서거이후 불안정하다고 판단하여 북을 자극하여 북을 침략하는 공격훈련인 키리졸브–독수리 훈련과 23년만의 최대 규모인 쌍룡훈련을 한다면 이는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이미 김정은 부위원장은 오랫동안 북의 군사를 비롯한 정치, 경제, 문화 등 전 분야에서 지도력을 발휘해왔다. 다만 미국과 이남이 북의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때문에 빚어진 오판중의 오판이다. 이러한 오판을 바탕으로 그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거에 따른 슬픔이 가시기 전에 북을 상대로 전쟁훈련을 한다는 것은 눈 먼 장님이 짚을 들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다. 그래서 남북관계 회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전쟁훈련은 즉각 중단하고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와 일본 필리핀 유럽등 해외기지에 있는 미군 기지들을 즉각 폐쇄하고 이에 들어가는 비용을 자국의 국민을 위해 사용하여 미국 경제를 살리길 바란다. 그리고 미국은 북미회담에 적극적으로 임하여 주한미군 철수와 더불어 북미관계 정상화, 국교수립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012년 1월 23일재미동포전국연합회 대변인
손석희 "4대강 비판은 MB와 결별?", 이상돈 "맞다"
이상돈 "4대강 문제, 무조건 안고 갈 수는 없다"
이상돈 한나라당 비대위원이 26일 이명박 대통령이 밀어붙인 4대강사업을 거듭 비판하며 MB와의 결별 의지를 거듭 분명히 했다.이상돈 위원은 이날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보의 붕괴 가능성 등 4대강 재앙을 경고한 환경사회단체들의 주장에 대해 "내가 보기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며 "환경단체의 전문가들이 실태조사도 했을 뿐더러 다른 데서 흘러나온 이야기 같은 것도 충분히 참조해서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다"고 공감을 표시했다. 이 위원은 이어 "내가 기술자가 아니지만,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강이 대체로 모래가 지반이고 너무 빠른 시일 내에 공사했기 때문에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다"라며 거듭 보의 붕괴 가능성을 지적한 뒤, "여하튼간에 그런 정도 주장이 나올 정도의 문제제기라는 건 정부가 열린 자세로 그들의 주장을 귀담아 듣고 같이 조사를 해야 된다"며 거듭 정부에 대해 시민단체들의 요구대로 민관 공동조사를 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동아일보>가 사설을 통해 4대강 문제를 거론한 자신을 맹비난한 데 대해서도 "시민단체의 어떤 비판에 대해서 관계 장관이 법적 대응을 해야겠다고 하는 것은 좀 부당하다고 언급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크게 잘못됐다, 이렇게 생각하진 않는다"고 일축했다. 그는 이어 "돌이켜 보면 2010년 6월에 지방선거 때 한나라당이 참패하게 된 원인 중에 하나가 바로 4대강 사업이다. 야권에서 4대강 사업에 대한 반대와 무상급식을 제기했고 한나라당은 뭐 변변히 내놓지 못하고 참패했다. 그것은 민심이 4대강 사업에 대해서 부정적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고 그 후에도 그런 민심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총선에서 야권에서 이 문제를 또 집중적으로 제기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마도 비대위에서도 그 문제에 대한 입장정리가 불가피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에 진행자가 "4대강 문제에 대해서 비판적인 의견을 공식적으로 비대위가 내놓으면 이건 이명박 정부와는 굉장히 상징적으로 결별한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고 묻자, 이 위원은 거침없이 "맞다"고 답했다.이 위원은 이어 가진 이날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도 4대강 사업에 대해 "총선이 임박하고 야권이 전열을 정비하게 되면 이슈로 제기될 것"이라며 "우리도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무작정 안고 갈 수는 없다"고 단언했다."비대위가 4대강 사업을 비판하면 MB정부와 단절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야권의 MB 심판론에 국민이 호응하고 있고 그 호응에는 상당히 합리적 이유가 있다"면서 "(비대위가) 그 부담을 안고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특히 "MB 정권과 다르다는 것,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보고 그것을 어떻게 치유하고 대신에 어떤 것을 하겠다는 것인 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끄네감씨
역시 숫놈은 낫살들 쳐묵어도 보지맞은 틀림 없는겨그랴도 곧 죽어도 비끄네가 노처녀 할망이라도 덜 달아진 감씨가 쪼깐 맛이 더한다 이거지그랴 덜 달아진 비끄네 감씨 좃나 빨아라감씨 피나도록 빨아라
그네찬성
아니,상도나.박그네가 4대강 찬성을 했단말이다.MB와 결별하려면 그네와도 결별해야 한단말이다.응?어떻게 생각하니?
1111
김종인, 이상돈, 아무리 그네빠라고 해도 그네의 위상만 높여주고 실제로 되는 게 없다. 그네가 그렇거든.
새꺄
쥐새끼만 까면 누가 믿냐,,, 노망난 독재자의 딸 그네 할망구부터 까부숴야지 믿어줄까 말까그나물에 그밥,,, 에효 너도 대책없다 새꺄...
여보슈~
MB를 뛰어 넘어선 아니되지요..그냥 확~ 밟아 짖이기고 가셔야지요..
하무지공
비데위원님들! 국민개구맨으로 정식 데뷰하시죠! 뭐 당명바궈야 재집권한다고라? 이제 소가지 웃기려 애쓰지 마시고 침모하면 고철수집해 수익이아 올리세요!
월급에서자동으로까야
정책입안자들도 월급을 전부 정지하게하지는말고 4대강대책위원장교수하시는분의 월급도 차압을 해야겠죠 물론 최저생계비4인기준149만원은 제외하고 구상권을 청구하면됩니다 이것은 신문에서 폴리페서를 하신 교수분들도 당사자되겠습니다 논설위원들도 추적해서 월급에서 까야됩니다
구상권청구합시다
국가에서 4대강 입안에 참여한 공무원 건설관계자들 거기에 참여한 투자회사들 동조한 교수진들 동조한 논설위원들 모두 증거를 수집해서 구상권을 뽑아내지못하면 이건 도저히 개선않될것같습니다 다음정부에서 당사자들을 제소를 해야겠죠 대통령과 그들의 선후배관련자들하고 친인척들도 구상권을 청구당해야만 역사에제대로 기록되겠죠 공무에서도 책임을 지워야만 헛짓거리못할듯
존경합니다
OK ~ ! 이상돈 교수님 진심으로 존경합니다.난 더 이젠 말을 아낄렵니다. 더 이상 어떤 말이 더 필요합니까?
조약돌
상돈아 그네는 지금? 4대강에대한 말은 한번도 한적이 없다. 푸른집 사기꾼과 러브샀은 한적은있지만 단한번도 없으며 매국노놈들과 날치기로 예산을 지원함으로 동조하고 찬성한것이다 .이엄청난 사기 자연훼손을 그네이하 매국노놈들은 모두 찬성하고 방조한것을 국민은 다안다. 너의비데수장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한번 듣고싶다.
재앙
이명박은 아무래도 4대강때문에 외국으로 도피하거나 감빵갈 것같다는...
구상권청구해야
4대강에 찬성하거나 지지하던 분들과 건설관계자분들에게 법원에서 구상권을 청구했으면 좋겠네요 나중에 발뺌못하게 시민사회에서는 증거수집해서 법원에 제소증거루 삼구요 신문사에서 찬성한 논설위원들도 구상권에 포함시켜서 22조 헛돈쓰게한거 모두 책임지웁시다
이ㅏㅓ
4대강 하나만 제대로 밝혀내도 속이 시원할것 같다.
민심
어르신이탈당하고 친이계총선대불출마하고 친박딴지걸지말고 백의종군해야만 생존한다!
쥐색히개색히
이상돈이 목소리내면 친이 보다 먼저 미친근혜가 뒤엎는데.....뭔? 쇄신!!!
멸쥐
존경하는 이상돈교수님 이제 그만 사퇴하세요아무리 보수의 가치를 좋아하시는 합리적 보수라지만 한나라당은 가망없습니다.쇄신 그딴거 아무리 들도 내와봐야 결국 화장만 고치는것입니다.한나라당의 본질은 결코 바뀌지 않을겁니다.그래서 국민은 쇄신 그딴거 모르겠다. 무조건 심판이다 이렇게 생각하고있어요똥물 뒤집어 쓰지말고 그냥 나오세요
한방으로 끝내
원래 정치적 결별이라는 것은 '살부의 전통'이야. 아버지를 죽여 왕권의 신성함을 유지했지. 이왕 하는 거 맹박이를 탄핵하는 정도는 돼야 국민 맘이 좀 돌아설 게야..... 죽여 죽여 죽여... 탄핵해!!!
쥐박이
이교수님 빙산의일각인 4대강뿐 아니라 BBK..다스..도곡동 ..인천공항 ..KTX ..기타등등 비리가 너무많아서 ... 이런것들도 얘기하세요...
지나가다
4대강 사업에 대한 닭그네의 입장도 좀 밝혀 봐라. 내 기억에는 얘가 4대강 사업에 대해서 비판적 이야기를 한 건 없는 걸로 아는데...
이번에 그냥 죽자
4대강을 비롯한 이명박의 각종 실정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한나라당은 이번에 장렬하게 죽자. 그게 차차기 대선을 위해 한나라당이 조금이나마 살아남는 길이다.
ㅠㅠ
동아가 이상돈을 비난 하는것보니 이명박과 조동중이가 안철수가 키우는애완견이 맞네
이건어때
이것도 않되고 저것도 않되고 .. 그래서 한나라당은 모두 다시 끌어안았다.다시 이명박당으로 원점 회귀.그러나 회생할 방법이 아주 방법이 없는건 아니다... 즉, 한나라당이 먼저 이명박 탄핵안을 내놓으면 국민들이 어느정도 수긍할 것이다.
녹색성장의 아바이
어 그럼 세계가 인정하는 녹색성장의 아버지, 가카는 어케 되는 거지. 완전 낙동강 썩은 오리알 되는 거네.ㅋ 아바이연합 총무로 가면 되겠네. 세계가 인정하는 아바이연합 총무. 꼴좋다. 비판 받는 권력 보다 더 후진게 조롱 받는 권력이라 했는데, 권력이 조롱 받기 시작하면 그건 권력도 뭐도 아니고 걍 끝이라 보면 된다..
zzzzzz
4년동안 주구장창4대강 삽질 예산 날치기경인운하 예산 날치기삽질예산 날치기 한 새끼들이 개날당 새끼들4대강은 쥐새끼와 개날당 땔래야 땔수 없는 관계지
독일전문가들 "4대강 보 전부 폭파해야"
"물비침? 그런 말이 어디 있나", "대단히 위험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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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세계적 하천전문가들이 본격적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한 4대강 재앙을 막기 위해선 4대강 보를 모두 폭파해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임혜지 박사가 전해왔다.임혜지 박사는 지난 22일(현지시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4대강사업의 참담한 결과물'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이같은 독일전문가들의 조언을 전했다.지난해 방한해 4대강 공사장을 답사했던 독일 칼스루에 공대 베른하르트 교수는 임 박사와의 통화에서 낙동강 8개 보 모두에서 물이 샌다는 소식에 "어느 부분에서요? 혹시 보 아랫부분에서 샌다고 합니까?" 라고 물은 뒤, 아랫부문에서 누수가 발생할 경우 "그것은 보 밑 강바닥이 침식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대단히 위험합니다" 라고 사태의 심각성을 경고했다.그는 정부가 누수가 아닌 물비침이라고 주장하는 데 대해서도 "물이 새어 나오면 누수지 무슨 그런 말이 있습니까?"라고 일축한 뒤, "걱정은 많이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을 몰랐습니다. 정말 큰일났군요" 라고 우려했다.그는 대응책으로는 "일단 보를 전부 열어서 가두었던 물을 다시 흐르게 하라고 건의하십시오. 그것이 여러가지 피해를 최소화하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입니다. 어렵지도 않고 돈도 들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 이라며 "보를 전부 철거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가장 합리적이지만,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은 심정적으로 그 사실을 금방 받아들이기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일단 보를 열어 극한상황을 막고 보자는 말입니다" 라며 보 철거만이 가장 합리적 해법임을 강조했다.재작년에 방한했던 헨리히프라이제 박사도 임 박사와의 통화에서 4대강 재앙 해법으로 "보를 전부 폭파하고 강을 원상태로 되돌리면 됩니다" 라며 보 폭파를 주장했다.
독일하천학자 4대강을 돌아본 뒤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제 시작입니다. 4대강에 만들어놓은 보들을 그냥 놔두면 그 후유증 때문에 돈이 계속 들어갈 겁니다. 수질 악화, 퇴적, 역행침식, 홍수 증가가 나타날 것이고, 앞으로 한국 국민의 출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일 겁니다. 4대강사업의 후속비용을 지속적으로 부담할 경제력을 가진 나라는 지금 지구상에 없습니다. 독일의 경제력으로도 어림없습니다" 라며 "보를 폭파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가장 값싸고 효과적입니다. 22조원이 소모된 지금 없애는 것이 앞으로 후속비용을 더 많이 들이고 없애는 것보다 훨씬 이익이지요" 라며 거듭 보 폭파만이 유일한 해법임을 강조했다.임 박사는 이같은 독일전문가들의 경고를 전한 뒤, "나는 4대강사업을 추진한 사람들 뿐아니라 동조하거나 묵인한 사람들도 죄값을 치러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훗날의 일이다. 당장은 4대강사업의 후유증이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진행되고 있으며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이 시급하다" 며 "또한 자신들이 저지른 문제의 심각성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또 다른 기회를 노리는 정부와 토건 집단을 경계하고 그 횡포를 지금 당장 막아야 한다" 고 강조했다.
다음은 임 박사의 글 전문.
(운하) 4대강사업의 참담한 결과물국토해양부에서 4대강과 관련한 허위 사실 유포자와 단체 등에 대해 법적 대응을 검토중이라고 '생명의 강 연구단'을 협박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기사에 자극 받아 그간 제가 바빠서 준비만 해놓고 마무리 짓지 못했던 글을 서둘러 완성했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조사한 사실을 발표하는 사람들을 협박하여 입을 막으려고 들다니, 그들은 진실게임에 어지간히 자신이 없나 봅니다.4대강사업의 참담한 결과물1. 보에서 물이 새고 있다4대강공사는 화려한 준공식과 함께 끝났다. (주1) 완공만 되면 효과가 나타나서 반대하던 사람들도 다 좋아할 거라던 정부측 장담과 달리, 수질은 악화되고(주2) 농지는 물에 잠기고(주3) 역행침식이 지천에서 진행중이라는(주4) 우울한 소식이 들린다. 보로 물을 막은지 며칠 지나지 않아 낙동강에 건설한 거의 모든 보에서 물이 샌다는 소식이 무엇보다 불안하다. (주5) 정부는 이것은 누수가 아니라 물비침 현상이고 바깥에서 땜질하면 해결되는 가벼운 사안이라고 말했다. 물비침 현상이 무슨 말인가 해서 찾아봤더니 학술적으로 없는 단어라고 한다. (주6) 나는 더 불안하고 궁금해져서 독일 칼스루에 공대 베른하르트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베른하르트 교수는 전세계의 주요 하천공사에 직접 참여하거나 자문하는 토목 전공 실무형 학자다. 2011년 여름에는 한국을 방문하여 4대강사업 공사현장을 조사한 뒤 한강 재판에 보고서를 제출하여 이 사업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그 재앙을 엄중하게 경고하면서 당장 중단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주7)"낙동강에 건설한 모든 보에서 물이 샌다고 합니다.""(다급하게) 어느 부분에서요? 혹시 보 아랫부분에서 샌다고 합니까?""왜요? 아랫부분에서 물이 새면 더 위험합니까?""예, 그것은 보 밑 강바닥이 침식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대단히 위험합니다.""한국정부는 누수가 아니라 단순하게 물이 비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물이 새어 나오면 누수지 무슨 그런 말이 있습니까? 걱정은 많이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을 몰랐습니다. 정말 큰일났군요.""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일단 보를 전부 열어서 가두었던 물을 다시 흐르게 하라고 건의하십시오. 그것이 여러가지 피해를 최소화하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입니다. 어렵지도 않고 돈도 들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입니다.""그럼 보의 의미가 없어지는 거잖아요?""당연하지요. 보를 전부 철거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가장 합리적이지만,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은 심정적으로 그 사실을 금방 받아들이기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일단 보를 열어 극한상황을 막고 보자는 말입니다." 현실적으로 최선이 불가능하면 차선이라도 선택해야지, 그냥 앉아서 최악을 맞이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그도, 듣는 나도 기가 막혔다.나는 헨리히프라이제 박사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헨리히프라이제 박사는 평생 독일 관청에서 하천공사의 영향을 조사하고 연구하며 독일 강을 관리한 전직 공무원이다. 또한 2010년 한국을 방문해서 4대강사업 공사현장을 조사한 후 낙동강 재판 보고서에서 이 사업이 초래할 홍수 증가, 수질 악화, 농경지 피해, 지하수 고갈, 역행침식을 독일의 경험에 비추어 경고한 바 있다.(주8) 그가 2년 전 예견한 현상이 지금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나의 전갈을 들은 그는 대뜸 물었다."덕곡 농경지도 침수되었다고 합니까?""예.""아, 농부들은 어떡하지요? 밭을 잃은 농부들은 어떡하지요?""어떡하면 좋겠습니까?""보를 전부 폭파하고 강을 원상태로 되돌리면 됩니다.""얼마 전에 완공했는데 폭파하려 하겠습니까? 22조원이나 들인 걸요.""이제 시작입니다. 4대강에 만들어놓은 보들을 그냥 놔두면 그 후유증 때문에 돈이 계속 들어갈 겁니다. 수질 악화, 퇴적, 역행침식, 홍수 증가가 나타날 것이고, 앞으로 한국 국민의 출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일 겁니다. 4대강사업의 후속비용을 지속적으로 부담할 경제력을 가진 나라는 지금 지구상에 없습니다. 독일의 경제력으로도 어림없습니다.(주9) 보를 폭파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가장 값싸고 효과적입니다. 22조원이 소모된 지금 없애는 것이 앞으로 후속비용을 더 많이 들이고 없애는 것보다 훨씬 이익이지요.""경제적으로요?""전 지금 지극히 산술적으로 말하는 겁니다. 경제적 측면에서 더 나은 대안이 없다는 말이지요. 독일의 150년 하천공사 역사에 근거해서 말하는 겁니다. 독일도 하천개발 면에서 한국보다 잘한 게 하나도 없어요. 다만 실수를 많이 했지만 150년에 걸쳐 서서히 했기 때문에 복구와 개선이 경제적으로 가능했을 뿐입니다."평생 수치를 비교해가며 국비를 사용한 공무원답게 그는 보의 철거가 국민경제 차원에서 최선의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보의 파괴할 지 안할 지는 정치가들이 결정할 몫이고, 공무원으로서 자신은 진실을 말할 뿐이라고 했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2. 예고된 재앙이다앞서 통화한 베른하르트 교수는 4대강사업의 모델이라는 독일 하천 복원공사의 대부로 손꼽힌다. 그는 한국의 4대강사업을 직접 보고 이렇게 백해무익한 공사는 태어나서 처음 본다고 말했다. 이익은 하나도 없고 후세의 재앙만 가득한 공사라는 것이다.(주10) 그는 4대강사업은 온전하게 제 구실을 하던 자연 그대로의 강을 독일의 전형적인 수로와 운하로 바꾼 공사로 건설업계를 위한 사업일 뿐이라고 단정했다.(주11)그런데 한국정부는 지금 한술 더 뜨고 있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전국에 9개 대형댐을 추가로 건설할 계획을 이미 세워놓았고 이미 건설을 추진중이거나 건설 중이며, 앞으로 더 많이 지을 계획이라고 한다.(주12) 이 공사로 당장 수몰민 처지에 놓일 사람들도 이를 까맣게 몰랐다고 한다.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는데, 물 부족을 막겠다고 4대강사업에 22조나 쓰고 준공식을 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이런 소리를 하는가? 4대강사업이 도리어 물부족 현상을 초래할 것이라는 국내외 학자들의 경고가(주13) 벌써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말인가?(주14)그뿐 아니다. 정부가 내세운 4대강사업의 주목적은 홍수 예방이었다. 정부는 4대강사업 덕분에 올해 장마에도 홍수가 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4대강에는 홍수가 잘 나지 않았다. 홍수의 99%는 지천에서 났다.(주15) 이 지천들이 4대강사업으로 치명타를 입었다. 준설로 4대강 강바닥을 깊이 파놓은 탓에 그리로 흘러드는 지천들이 낙차를 이기지 못해 허물어져 내리는 역행침식이 일어난 것이다.강바닥과 강기슭이 허물어지는 역행침식은 상류쪽으로 계속 퍼져나가는 속성을 지닌다.(주16) 즉, 4대강에서 시작된 역행침식은 수백 개 지천을 타고 상류쪽으로 옮아가 다시 그 지천의 지천을 타고 실핏줄처럼 전국토로 퍼질 것이다. 역행침식으로 무너진 강변은 작은 비에도 견디지 못하고, 그 주변에 사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할 것이다. 4대강사업이 도리어 홍수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국내외 학자들이 이미 경고했다.(주17)강변의 모래와 자갈이 콘크리트로 대체되면 물에 사는 동식물, 미생물이 죽어버리고 강물의 자가정화 작용도 종말을 고한다. 콘크리트 벽은 녹조로 뒤덮히고 물에서는 냄새가 나며 수질은 악화된다. 콘크리트 벽이 강물과 지하수를 차단해 지하수는 고갈된다. 강물과 지하수는 농업과 공업에 필요한 물이자 국민이 마시는 물이다. 4대강사업이 도리어 식수 대란을 초래할 것이라는 경고 역시 국내외 학자들이 이미 했다.(주18)
3. 재앙을 키워서는 안 된다베른하르트 교수도, 헨리히프라아제 박사도, 4대강사업이 너무나 참담하다며 눈물을 보인 적이 있다. 그들은 그들의 선조가 행한 하천공사의 후유증을 현재 겪고 있는 희생자이고 이를 극복해서 후손에게는 넘겨주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가뭄이나 홍수로 흉작이 지면 굶기를 밥 먹듯 했다는 헨리히프라이제 박사는 4대강사업으로 인해 한국 농민들에게 닥칠 자연의 복수가 두려워 라인 강을 보며 울었다고 고백했다. 자연의 복수는 그것을 피할 재력이 없는 가난한 다수에게 특히 잔인하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나는 4대강사업을 추진한 사람들 뿐아니라 동조하거나 묵인한 사람들도 죄값을 치러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훗날의 일이다. 당장은 4대강사업의 후유증이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진행되고 있으며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이 시급하다. 또한 자신들이 저지른 문제의 심각성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또 다른 기회를 노리는 정부와 토건 집단을 경계하고 그 횡포를 지금 당장 막아야 한다.4대강사업의 후유증은 선거만 잘하면 저절로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선거와 상관 없이 한시바삐 결단 내려 피해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 아무리 강을 콘크리트로 포장해도 다음 장마에 또 무너져내릴 것이고 대한민국 강은 사시사철 공사판으로 변할 것이다. 내년 여름이면 또 무너질 지천을 하염없이 땜질할 돈은 현재 우리가 내는 세금이고, 국방이나 교육 등 국가가 해야할 일을 못하면서 쓰는 돈이다. 또한 후손들이 고생해서 두고두고 갚아야 하는 빚이다.선거에 휩쓸리는 사이 피해는 하루하루 커지고 있다.-주-주1: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실은 국토부 명의의 '4대강 개방행사 홍보계획'과 4대강 살리기 추진본부 명의의 '4대강 국제 포럼'를 공개하고 "정부는100억 원 대의 거대한 4대강 홍보를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출처 : 강기갑 "4대강 몸살 앓는데, 정부 억대 축제판 계획" - 오마이뉴스주2: "4대강 사업의 효과로 수질이 개선될 것이라는 정부 주장과 달리, 그동안 고질적인 문제였던 낙동강의 부영양화가 오히려 상류 쪽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조류가 발생하면 강물이 탁한 빛으로 변하고 심하면 악취가 나면서 취수가 불가능해진다." 출처 : 낙동강 조류 ‘북상’…4대강 수질 ‘거꾸로 - 한겨레신문주3: MBC <뉴스데스크>는 경남 창녕 합천보 인근 수십만평의 농지가 4대강 공사후 합천보에 물을 가두면서 침수돼, 마늘농사는 물론 명품수박 농사 자체가 불가능해졌는데 한국수자원공사 등 관계당국은 '4대강 공사와 무관하다'며 딴소리만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출처: 4대강 재앙 현실화, 합천보-함안보 주변농지 침수 - 올포스트주4: 작년 봄비에 둑이 무너지고 강바닥(하상)이 침식되는 사태가 남한강 사업 구간 곳곳에서 발생했다. 출처: 남한강·8개 지천, 제방 붕괴되고 강바닥 침식 - 한겨레신문주5: 낙동강 8개 보 모두에서 누수현상이 일어난 것이 밝혀진 데 이어 보 아래 콘크리트 바닥층까지 떨어져나가는 심각한 일마저 발생. 보로 갇힌 강물은 심각한 녹조현상을 보이고 있다. 출처: 총체적 부실의 현장, 현장르포 - 앞산꼭지의 초록희망
주6: 박창근/관동대 토목공학과 교수, "물 비침, 물 번짐 이런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토목공학교과서에도 없는 내용입니다. 댐을 만들 때는 누수가 되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출처: 완공 며칠이나 됐다고…4대강 보, 누수 현상 - SBS 뉴스주7: "한국의 강들은 4대강 사업 착수 이전에 생태적으로 매우 양호한 상태였으며, 유럽연합 물관리 기본지침의 규정에 따라 보호할 가치가 있는 수질을 유지하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강은 4대강 사업의 공사를 통해 이미 상당히 파괴되었다. 아직 파괴되지 않은 것을 구하기 위한 성찰이 시급히 요청된다." 출처: 일반인들을 위한 베른하르트 교수의 법정 보고서 - 번역연대주8: "한 나라의 주요 하천을 이렇게 대규모로 한꺼번에 공사하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로서, 이 사업은 지하수의 균형상태와 지하수에 의존하는 토지이용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주고, 식수확보 및 수질을 위협하고, 홍수위험을 증가시키며, 지역경제상 의미 있는 생물적 다양성을 손상하는 등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출처: 4대강사업에 대한 독일 전문가 감정서 - 한강 소송 제출"통제할 수 없는 침식이 지류로 퍼져나가고 그에 따른 부작용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출처: 독일 하천전문가 심층인터뷰: 헨리히프라이제 박사, 역행침식 등 4대강공사 후유증 경고 - 번역연대#mce_temp_url#주9: "독일은 유럽 내 최대의 경제력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1990년 통일이후 EU 통합을 주도해왔고 세계화 시대에 있어서 기후변화, 세계 경제위기 등 국제적인 도전과 문제를 해결하는데 선도적이고도 중요한 역할을 해 오고 있습니다." 출처: 주독일 대한민국 대사관 홈페이지주10: 독일 운하 설계에도 참여했던 베른하르트 교수는 지난 8월 민주당 등 야 4당 초청으로 방한해 4대강 공사 현장을 조사하고 '4대강 사업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해 "독일에서 수십 년 전에 포기한 4대강 사업과 같은 미친 짓을 왜 한국은 계속하는가"라며 즉각적인 중단을 촉구했다. 출처 : 베른하르트 교수 "4대강사업, 자연에 대한 강간 맞다" - 오마이뉴스h주11: 베른하르트 교수는 “(4대강) 파괴 현장을 보면서 ‘환경을 위한 사업’이라고 강변한다면, 강이 지닌 자연스러운 삶의 조건과 그 변화로 인해 예측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완벽한 무지의 소치”라면서 “4대강 사업은 ‘건설업계를 위한 사업’일 뿐”이라고 비판했다.주12: 전국에서 9개의 댐이 건설되거나 추진 중이다. 더욱이 국토해양부는 기후변화로 인한 물 부족을 막기 위해 댐 건설을 앞으로 더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박창근 관동대 교수(토목공학)는 “4대강 사업이 완공되면 물 부족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놓고선 다시 댐 건설을 확대하겠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출처: 물부족 해결?…4대강 이어 댐 건설 ‘강행’- 한겨레신문주13: "보로 물을 막은 뒤 첫 몇 년간, 강물은 보로 물을 막은 구간에서 강변을 따라 개간해 놓은 지대로 스며드는 물의 양이 심하게 증가할 것이다. 그 때문에 이 경작지들은 습해지고, 지대가 낮은 경우 물에 빈번히 잠기며 잠기는 기간도 길어진다. 그 후에는 다양한 물리적 현상(미세입자의 퇴적 등)과 화학적 작용(중금속 산화물·황화물의 박막 형성 등)에 의해 강바닥에서 점차 불투수층이 형성되어 간다. 이에 따라 지하수위 변동폭은 줄어들고 지하수위도 서서히 낮아진다(H?GIN 1980, 그림 11). 이렇게 농업생산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지하수위 변동폭이 줄어들면서 높은 지대의 지표면은 지하수가 이르지 못해 점점 더 말라버린다. 이런 이유로 보를 세우면 지하수 확충에 어려움이 생기며, 기후변화가 진행중인 상황과 맞물려서 특히 건기로서 생물의 주요성장 시기인 초봄에 매우 해롭다. 이 시기에 강으로 흘러드는 물의 양이 적으면 식수 수급의 어려움과 함께 농업용수 공급량이 부족해진다." 출처: 4대강사업에 대한 독일 전문가 감정서(한강 소송 제출), 헨리히프라이제 박사, 2.12 기후변화의 상황에서 보로 인해 심해질 물부족 현상에 대한 평가 부실 - 번역연대주14: 정부가 4대강 사업으로 경기도 여주군 남한강 이포보의 상류 쪽에 조성한 저류지가 주변 농지의 지하수 고갈을 재촉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서울국토관리청 의뢰로 지하수 고갈 원인을 조사한 호서대 연구팀에 의하면 저류지 굴착으로 지하수위가 2m 이상 낮아져 양수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거나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4대강사업 탓 지하수 고갈’ 사실로 - 한겨레신문주15: "홍수에 따른 피해 지역과 피해액 자료를 종합할 때, 홍수는 4대강 본류가 아니라 지방하천에서 발생하며, 산사태와 계곡의 범람이 근본적인 홍수 피해 원인" 출처: 강은 살아있다. 황소걸음 출판, 최병성 지음, 96쪽.주16: 역행침식이란 하천의 침식이 하류에서 상류 쪽으로 급속히 진행 되는 것을 말한다. 침식은 하천 상류에서 하류로 서서히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천 바닥을 파내거나 기타의 이유로 강 본류의 수위가 낮아지면 본류로 흘러드는 지천과 낙차가 커져 물이 더 빠르고 세차게 떨어진다. 이 물은 강바닥을 계속해서 파내고 강기슭을 무너지게 하는데 이렇게 침식이 상류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상류방향침식이라는 뜻으로 두부침식(頭部侵食)이라고도 한다. 출처: [따끈따끈 시사용어] 역행침식 - 단비뉴스주17: 지천의 역행침식 뿐 아니라 4대강에 지은 16개의 보 역시 홍수를 유발한다. 헨리히프라이제 박사는 KBS 방송과의 인터뷰 7번째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라인강 상류에 있는 바젤(Basel)과 칼스루에(Karlsruhe) 사이, 좀 더 정확히 말해, 바젤과 바덴바덴(Baden-Baden) 사이 연속 보 구간에 보를 하나씩 설치할 때마다 홍수 위험이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강에 연속 보를 설치한 거리가 늘어날수록 홍수 위험은 단순비례가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커졌습니다. 이는 모든 수자원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한결같이 밝힌 사실입니다. 보 설치의 이 인과관계는 라인강 상류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적용됩니다." 출처: 독일 하천전문가 심층인터뷰: 헨리히프라이제 박사, 역행침식 등 4대강공사 후유증 경고 - 번역연대
최근 한(조선)반도 정세가 제기한 여섯 가지 주제
<차례>
주제 1 - 북(조선)이 새로운 미사일발사장치를 배치하였다는 보도에 대해서 주제 2 - 주한미군사령부의 '작전계획 5027-04'와 한·미 동맹에 대해서 주제 3 - 6자회담의 장래에 대해서주제 4 - 이른바 '탈북자문제'에 대해서주제 5 - 남북최고위급회담 개최가능성에 대해서주제 6 - 이른바 '양안문제'에 대해서
주제 1 - 북(조선)이 새로운 미사일발사장치를 배치하였다는 보도에 대해서
물음 - 영국에서 발행되는 군사전문지 『제인스 디펜스 위클리(Jane's Defence Weekly)』는 북(조선)이 러시아 미사일을 개조하여 새로운 미사일발사장치를 개발·배치하였다고 보도하면서 그로써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게 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새로운 미사일발사장치란 군함이나 잠수함에서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 보도에서 북(조선)의 미사일이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다는 지적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조선)반도에 형성된 조·미 사이의 군사상황에서 북(조선)이 미국 본토에 대한 타격력을 보유하였다는 것은 중요한 정치·군사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응답 - 모든 나라는 자국의 군사기밀을 철저하게 유지합니다. 준전시상태에서 미국의 침략적 군사력에 맞서 임전태세를 취한 북(조선)에서 군사기밀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더 이상 설명을 요구하지 않을 만큼 자명합니다. 군사기밀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볼 때, 북(조선)이 새로운 형의 해상미사일발사장치와 잠수함미사일발사장치를 실전배치하였다는 최근 언론보도의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나는 북(조선)의 공식발언을 해석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북(조선)이 천명한 대로, 조선인민군은 미국의 핵공격력에 맞서는 핵억제력(nuclear deterrence force)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북(조선)의 핵억제력 보유라는 말에는 중요한 정치·군사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북(조선)이 핵억제력을 보유했느냐 또는 보유하지 못했느냐에 따라서 한(조선)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시아 정세가 달라지게 되며, 북(조선) 핵억제력 보유의 정치·군사적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한(조선)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 정세가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북(조선)의 핵억제력 보유 발언을 군사적 측면에서 해석하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며,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미국의 한(조선)반도 핵전쟁도발에 맞서는 대응핵전쟁 수행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한편, 북(조선)의 핵억제력 보유 발언을 정치적 측면에서 해석하면, 미국의 아시아지역 핵확산금지체제가 붕괴될 위험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며, 그 위험을 암시함으로써 주한미군 철군을 강제하는 정치적 압박공세를 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명백하게도, 핵무기는 방어무기가 아니라 공격무기입니다. 더욱이 핵무기는 단순한 공격무기가 아니라 적국에게 치명타를 가하는 최강의 전략공격무기입니다. 그러므로 핵무장은 군사정세와 전쟁상황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됩니다.
북(조선)의 핵억제력 보유 발언은, 북(조선)이 미국에게 치명타를 가하는 전략공격무기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지, 핵무기를 만드는 핵물질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북(조선)이 보유한 핵폭탄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미사일 탄두부에 탑재하기는커녕 웬만한 폭격기에 싣기도 곤란해서 거대한 화물수송차량에나 가까스로 실을 수 있는 핵폭탄이고, 그런 원시적인 핵폭탄을 한 두 개 보유한 것으로 주장합니다만, 그런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런 원시적인 핵폭탄은 미국을 타격하기는커녕 미군 첩보위성의 집중적인 공중감시체계 아래서 은밀히 이동할 수조차 없으며,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핵폭탄은 무용지물이 아니라 자살흉기입니다. 왜냐하면 원시적인 핵폭탄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군이 발사한 장거리 정밀유도무기의 타격에 의해서 보관장소 또는 이동지점에서 핵폭발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북(조선)이 자살흉기밖에 되지 못하는 원시적 형태의 핵폭탄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핵억제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자신만만한 공개발언으로 미국을 압박하면서 궁지에 몰아넣었겠습니까?
북(조선)은 미국의 심장부를 파괴하는 전략핵무기를 실전배치한 뒤에 핵억제력을 보유했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2004년 8월 16일 평양방송은 "우리 나라에서 핵버섯구름이 피어오를 때 조선반도만이 핵전쟁의 피해를 보고 미국땅은 무사하리라고 생각한다면 그보다 더한 무지는 없을 것"이라고 방송하였습니다. (『연합뉴스』 2004년 8월 19일자 보도에서 옮김)
2004년 8월 10일 미국 연방하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군사위원장 커트 웰던(Curt Weldon)은, 핵무기 개발에 열중하는 이란이 북(조선)의 핵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3개의 연수반을 북(조선)에 보냈다고 밝혔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라면, 북(조선)은 다른 나라에 핵기술을 전수할만한 고도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심장부를 파괴하는 전략핵무기를 실전배치하였다는 말은, 워싱턴, 뉴욕, 로스앤젤레스 같은 대도시를 파괴하는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여러 기를 실전배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북(조선)이 핵탄두만 가지고 있고, 그 운반수단인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갖지 못했다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도 역시 원시적인 핵폭탄 보유설과 마찬가지로 언어도단입니다. 핵탄두는 반드시 장거리미사일과 함께 개발되는 무기이며, 반대의 경우도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대륙간탄도미사일 생산능력을 가진 나라는 반드시 미사일 탄두부에 탑재하는 핵탄두를 생산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핵탄두와 미사일의 밀접한 연관관계는, 이를테면 인도와 파키스탄이 핵무기 보유국이며, 동시에 미사일 생산국이라는 사실에서도 입증됩니다.
1998년 8월 31일 북(조선)은 인공지구위성 광명성 1호를 탑재한 우주발사체(space launch vehicle) 백두산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하여 대륙간탄도미사일 생산능력을 과시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하고 미국과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거의 모든 군사정보를 미국에게 의존하는 남(한국)은 뭐가 뭔지 알지도 못한 채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에 상황이 끝났습니다.
미국 국방부 관리들은 우주발사체 백두산 1호의 성공적 발사로 입증된 북(조선)의 지상미사일체계에 대해서 '대포동 1호형의 북(조선) 대륙간탄도미사일체계(type Tae-Po-Dong 1 North Korean ICBM system)'라는 자기 식 이름을 붙여놓았습니다. (2002년 10월 24일 미국 연방상원의원회관에서 열린 미사일방어체계에 관한 토론회에 미국 국방차관 폴 월포위츠[Paul Wolfowiz]와 함께 참석한 국방부 국제안보정책 차관보 제이 디 크로취[J. D. Crouch]의 발언)
북(조선)의 미사일 개발수준이 인도와 파키스탄보다 앞선 것은 분명합니다. 파키스탄의 전 총리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는 런던에서 일본 언론과 대담하면서 "1993년 12월 북(조선)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장거리미사일 기술을 입수할 수 있었다."고 말했는데(『아사히신붕(朝日新聞)』 2004년 7월 18일자), 이것은 북(조선)이 1993년 이전에 장거리미사일 생산능력을 보유하였음을 말해줍니다. 북(조선)이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에 이어서 세계 6위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국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1970년대 초 이후 북(조선)은 20여년 동안 국력을 집중하여 1996년에 마침내 핵억제체계를 완성하였습니다. 핵억제체계를 연구·개발하고, 유지·관리하고, 개량·발전시키는 매우 복잡한 공정에 한 해 평균 5억 달러씩 투자하였다고 추산할 때, 20여년 동안 북(조선)은 1백억 달러나 되는 천문학적 자금을 동원하여 핵억제체계를 완성한 것입니다. 북(조선)의 핵억제체계 수립을 1970년대 초에 발기하고 20여년 동안 온갖 난관을 무릅쓰고 지도하여 완성시킨 전략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입니다. 핵억제체계의 완성은 한(조선)반도 정세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는 대사변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핵무기 시제품이나 미사일 시제품을 개발한 뒤에는 그 실제성능을 알아보기 위하여 폭발실험과 발사실험을 실시하고, 실험의 성공여부에 따라 성능기준에 맞는 핵무기와 미사일을 생산하여 실전배치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실전배치한 뒤에도 성능을 개량하기 위해서 그러한 실험을 계속 실시합니다.
그런데 북(조선)은 1998년 5월 30일 파키스탄의 발루치스탄사막에 있는 차가이 핵실험장에서 지하핵실험을 한 차례 실시하였고, 같은 해 8월 31일에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에 있는 우주발사기지에서 우주발사체를 한 차례 발사하였습니다. 북(조선)이 지하핵실험과 우주발사체 발사를 각각 한 차례밖에 실시하지 않은 것은, 다른 핵강국이 실험을 반복하여 실시하는 상례와 비교할 때 의아한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북(조선)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중이지 아직 실전배치는 하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하면 그런 의아한 느낌은 사라집니다.
첫째, 북(조선)은 지하핵실험이나 장거리미사일 발사실험을 실시하기에 매우 불리한 지정학적 조건에 있습니다. 북(조선)의 영토는 동서길이가 비좁은 데다가, 미군 첩보위성의 집중적인 공중감시를 받고 있으며, 또한 전략무기 실험으로 일본과 중국을 불필요하게 자극해서는 안 되는 처지에 있으므로 다른 핵강국들처럼 마음놓고 지하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발사실험을 실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서 북(조선)은 컴퓨터를 이용하는 모의실험능력을 개발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둘째,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과정에서는 컴퓨터 모의실험을 통해서 자료를 얻을 수 없는 실험도 있는데, 그런 실험은 실제로 실시해야 합니다. 미국 국가정보기관들이 언론에 공개한 바에 따르면, 북(조선)은 고폭실험과 연소실험을 계속 실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폭실험이란 핵무기 내폭장치의 작동을 확인하고, 고밀도, 고폭속도, 고폭압을 확인하는 핵폭발 성능실험이며, 연소실험은 핵무기 운반수단인 미사일 로켓장치의 점화와 작동을 확인하는 미사일 성능실험입니다.
셋째, 한 차례 실시한 지하핵실험이 성공적이었고, 한 차례 실시한 우주발사체 발사가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은, 북(조선)의 핵무기개발 공학기술과 미사일개발 공학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말해줍니다. 만약 1998년에 실시한 지하핵실험과 우주발사체 발사에서 실패하였다면, 북(조선)은 성공할 때까지 하는 수 없이 몇 차례 더 실험을 실시해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북(조선)은 한 차례 실험으로 성공하였습니다. 그것은 성능을 파악하기 위한 실험이라기보다는 미국에게 핵억제력을 과시하기 위한 실험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음 - 그런데 일부 군사전문가들은 북(조선)에는 로미오급 이상의 대형 잠수함이 없으므로, 대형 잠수함에 탑재할 수 있는 잠수함미사일발사장치를 개발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상반되는 의견으로 보이는데,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응답 - 북(조선)의 잠수함 전력에 관해서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북(조선)은 재래식 잠수함을 자체 기술로 건조하고 있습니다. 잠수함은 해군전력을 평가하는 전력에서 순양함, 구축함 보다 우선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가장 위력적인 공격무기입니다. 따라서 북(조선)이 잠수함 전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힘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로 생각됩니다.
재래식 잠수함 보유수를 보면, 중국 61척, 북(조선) 49척, 일본 22척, 인도 18척, 독일 14척, 러시아 11척, 프랑스 3척입니다. 남(한국)은 1993년부터 독일에서 도입한 재래식 잠수함을 실전배치하여 현재 9척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북(조선)은 1990년대 중반 이후 해군력을 집중적으로 강화해오는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인민군 해군사령관 김일철 대장은 1997년에 차수로 승진하면서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의 직책을 맡았습니다. 그는 인민무력부를 인민무력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던 1998년 9월에 인민무력상이 되었고,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직을 겸임하였습니다. 그가 해군 출신의 인민무력상으로 있던 시기인 1999년 6월 15일에 제1차 서해교전이 일어났고, 같은 해 9월 2일 조선인민군 해군사령부는 서해 해상군사분계선을 선포하면서 서해 5개 섬에 대한 통항질서를 발표하였으며, 2002년 6월 29일 제2차 서해교전이 일어났습니다.
조선인민군 해군이 보유한 잠수함 가운데서 배수량 1천4백75t의 로미오급(Romeo-class) 잠수함은 22척, 배수량 1천80t의 위스키급(Whiskey-class) 잠수함은 4척입니다. 로미오급 잠수함은 길이 1백40m, 높이 9m입니다. 한국군 해군은 1천2백t급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04년 8월 3일 영국의 군사전문지 『제인스 디펜스 위클리』는 북(조선)이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두 종류의 새로운 장거리미사일을 배치하였다고 보도하였습니다. 개발(developing) 중이 아니라 개발을 이미 끝내고 실전에 배치(deployed)하였다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그 보도내용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2003년 9월 12일에 나온 『에이피통신(Associated Press)』 보도와 『로스앤젤레스타임스(Los Angeles Times)』 보도, 그리고 9월 17일에 나온 『교도통신(共同通信)』 보도와 대동소이한 것입니다. 『로이터통신(Reuters)』 2003년 9월 18일자 워싱턴발 기사는 미국 관리들의 말을 인용하여 북(조선)이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에쓰에쓰-엔(SS-N)-6 미사일을 토대로 하여 신형 미사일을 개발하는 중이라고 보도하였습니다. 이 주장은 『로이터통신』 보도 직전에 나왔던 『조선일보』 보도내용을 미국 관리의 발언을 빌어 구체화한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북(조선)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쏘아 올리는 지상미사일발사장치를 보유하였다는 것인데, 위의 언론보도는 해상미사일발사장치와 잠수함미사일발사장치까지 보유하였다고 지적한 점에서 눈길을 끕니다. 해상미사일발사장치란 군함에서 전략공격미사일을 발사하는 장치를 뜻하며, 잠수함미사일발사장치란 바다 속에서 움직이는 잠수함에서 전략공격미사일을 발사하는 장치를 뜻합니다.
전략공격미사일 발사장치를 군함이나 잠수함에 실으려면 미사일의 무게와 크기를 줄이는 축소설계를 해야 하고, 발사관(launch tube)과 안정화장치(stabilization system)를 개발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지상미사일발사기지에서는 사거리가 훨씬 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하지만, 군함이나 잠수함에서는 사거리가 짧은 중거리탄도미사일(intermediate range ballistic missile)이나 단거리탄도미사일을 발사합니다.
대륙간탄도미사일 생산능력을 가진 북(조선)이 중거리탄도미사일도 생산할 수 있음은 자명합니다. 관심이 가는 문제는 북(조선)이 과연 해상미사일발사장치와 잠수함미사일발사장치를 개발하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옛 소련이 잠수함미사일발사장치를 갖춘 잠수함을 처음으로 실전배치한 때는 1963년이었습니다.
우선 북(조선)의 해상미사일발사장치 보유가능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인민군 해군이 보유한 프리깃함(frigate)은 배수량 1천5백t의 나진급 군함과 배수량 1천6백t의 소호급 군함입니다. 이 군함들에는 스틱스(Styx) 함대함 미사일을 장착한 발사관이 2문씩 탑재되어 있습니다. 스틱스 함대함 미사일은 옛 소련이 개발한, 당시로서는 유일한 해상발사 순항미사일이었습니다. 스틱스 미사일의 본명은 에쓰에쓰-엔(SS-N)-2인데, 사거리 80km, 길이 5.8m, 무게 2천3백kg입니다. 그 미사일은 1967년 10월 중동전쟁에서 이집트 군함이 스틱스 미사일 세 발을 발사하여 이스라엘 구축함 한 척을 격침시킨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에 자극 받은 미국이 서둘러 개발한 미사일이 해상발사 순항미사일 하푼(Harpoon)입니다.
그 뒤에 옛 소련은 스틱스 미사일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개량하여 새로운 미사일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싸이렌(Siren) 미사일이라고 부르는 에쓰에쓰-엔(SS-N)-9입니다. 이 미사일은 해상발사나 잠수함발사가 가능하며, 재래식 탄두나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습니다. 싸이렌 미사일은 사거리 1백10km, 길이 9.15m, 무게 2천5백kg입니다.
『제인스 디펜스 위클리』는 북(조선)이 에쓰에쓰-엔-6 미사일을 개조하여 해상발사미사일장치 또는 잠수함발사미사일장치를 실전배치한 것으로 보도하였습니다. 옛 소련에서 사용하였던 에쓰에쓰-엔-6이라는 잠수함발사미사일(SLBM)은 사거리 1천4백30km의 1단계 추진형 액체연료 미사일인데, 무게 19.5t, 탄두무게 1천1백79kg이고, 길이 13-14m입니다. 에쓰에쓰-엔-6 미사일 3기를 한꺼번에 장착하는 디(D)-4 발사장치의 길이는 약 16m입니다.
옛 소련의 재래식 잠수함들 가운데서 폭스트롯급(Foxtrot-class) 잠수함은 길이가 91.3m, 폭 7.5m밖에 되지 않아 에쓰에쓰-엔-6 미사일을 탑재할 수 없었고, 어뢰만 탑재하였습니다. 그 미사일은 옛 소련이 처음으로 실전배치하였던 핵추진 잠수함인 골프급(Golf-class) 잠수함에 탑재되었습니다. 옛 소련이 14척 보유하였던 골프급 핵추진 잠수함은 1990년에 퇴역하였습니다. 에쓰에쓰-엔-6 미사일을 탑재한 러시아 잠수함은 배수량 9천-1만t의 양키급(Yankee-class) 핵추진 잠수함입니다. 그 잠수함에는 에쓰에쓰-엔-6 미사일 16기가 탑재되어 있습니다.
북(조선)이 러시아의 에쓰에쓰-엔-6 미사일을 발사하는 잠수함미사일발사장치를 자체 기술로 개발하였을 경우, 그 미사일발사장치를 탑재하려면 현재 보유한 로미오급 잠수함보다 두 배가 큰 배수량 3천-4천t급 잠수함이 있어야 합니다. 북(조선)이 새로운 잠수함을 계속하여 건조하는 것은 언론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지만, 3천-4천t급 잠수함을 건조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습니다.
원래 에쓰에쓰-엔-6 미사일은 대형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크고 무거운 미사일이므로 소형 잠수함만 보유한 북(조선)이 그처럼 크고 무거운 잠수함발사미사일장치를 실전배치하였다는 언론보도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만일 북(조선)이 소형 군함이나 소형 잠수함에 탑재하는 새로운 미사일을 개발하였다면, 싸이렌 미사일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개량하여 군함이나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중거리미사일을 개발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싸이렌 미사일의 성능을 개량한 해상발사 중거리미사일이나 잠수함발사 중거리미사일은 북(조선)이 보유한 배수량 1천5백t급 프리깃함과 1천6백t급 프리깃함, 그리고 배수량 1천4백t급 잠수함에 탑재할 수 있습니다. 북(조선)이 순항미사일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2004년 2월 24일과 3월 10일 함경남도 신상리 동해안에서 사거리 1백60km로 추정되는 단거리 순항미사일을 시험발사한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제인스 디펜스 위클리』는 관련보도를 통해, 북(조선)이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잠수함 미사일 발사장치를 개발한 것으로 보도하였습니다. 러시아 『인터팩스(Interfax)통신』은 2004년 8월 4일자 보도에서 옛 소련의 흑해함대사령관이었던 이전 해군 제독 에두아드 발틴(Eduard Baltin)의 말을 인용하여 러시아가 북(조선)의 잠수함미사일발사장치 개발을 지원하였을 가능성을 부인하였습니다.
미국 국방부 고위관리들이 북(조선)의 해상미사일발사장치 개발문제에 관하여 보도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3년 전입니다. 2001년 10월 21일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있던 미국 국방장관 럼스펠드(Donald H. Rumsfeld)는 기자회견에서 이른바 '깡패국가'들 가운데 어떤 한 나라가 군함이 아니라 화물선 안에 은밀히 탑재할 수 있는 해상미사일발사장치 개발을 완료하였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는 그 나라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지목하지는 않았으나, 문맥을 보면 북(조선)을 염두에 두고 발언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또한 2002년 10월 24일 '자유전선(Frontiers of Freedom)' 주최로 미국 연방의원회관에서 열린 미사일방어체계에 관한 토론회에 참석한 미국 국방차관 폴 월포위츠는 미사일방어체계 수립의 정당성을 강조하면서 이른바 '깡패국가'들이 해상미사일발사장치를 개발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물음 - 한(조선)반도 군사정세를 인식하는 데서 중요한 것은, 미국 국방부 고위관리들이 말한 북(조선)의 미사일 정보가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보다 그러한 정보공개행위 속에 들어있는 정치적 의도가 무엇인가를 따져보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미국 국방부 고위관리들이 한(조선)반도 군사정세에 관련된 민감한 군사정보를 언론에 흘려주는 것이야말로 정치적인 행위가 아닐까요?
응답 - 그렇습니다. 자기들이 상대에게 가하는 군사적 위협은 감추고, 자기들의 위협에 대응하는 상대의 정당한 억제력을 미국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라고 과장·왜곡함으로써 미국의 침략전쟁을 합리화·정당화하고 군비증강을 추진하는 것은 미국 제국주의세력의 상투적인 수법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미국 국방부 관리들이 영국 언론을 통하여 북(조선)의 해상미사일발사장치나 잠수함미사일발사장치에 관하여 말한 것은 미국이 북(조선)에 가하는 군사적 위협을 감추면서 그 위협에 대응하는 북(조선)의 정당한 억제력을 미국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라고 과장·왜곡하는 것입니다.
주목하는 것은, 미국이 북(조선)에 대한 군사적 위협을 가중시키면서도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가중되는 군사적 위협은 북(조선)의 기존 미사일전력을 무력화시키려는 책동입니다. 미국의 그러한 책동을 미사일방어체계(MD) 수립 이라고 부릅니다. 미사일방어체계 수립이 북(조선)의 미사일전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말은, 북(조선)의 핵억제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만일 북(조선)의 핵억제력이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 수립에 의해서 무력화된다면 어떤 사태가 일어날까요? 북(조선)의 핵억제력에 의해서 마지못해 조·미 정치회담에 끌려나왔던 미국은 제멋대로 모든 회담을 중지할 것이며, 동시에 한(조선)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전쟁도발책동에 더욱 열중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미국이 다그치는 미사일방어체계 수립을 주시하면서 최근 동해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움직임을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동해는 미·일 동맹군의 해상작전구역으로 되었습니다. 미국 제국주의세력은 군사분계선 가까운 전방지역에 배치하였던 주한미군 2사단을 감축, 개편, 재배치하면서, 지금까지 군사분계선에 집중되었던 한(조선)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동해까지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2003년 3월 2일 북(조선)에 대한 공중정찰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동해 상공을 비행하던 미군 정찰기 알씨(RC)-135-에쓰(S)와 일본 해상 '자위대' 정찰기 이피(EP)-3을 향해 조선인민군 공군 미그(Mig)-29 전투기가 공대공 미사일을 조준하여 쫓아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동해에서 미·일 동맹군의 합동정찰작전이 위험한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지금 미국 제국주의세력은 '여름박동(Summer Pulse) 2004'라는 이름으로 세계해상실전훈련의 동북아시아 지역훈련을 동해에서 맹렬히 벌이면서 군사적 긴장을 높이는 중입니다.
둘째, 2004년 8월 미국이 동해에 9천9백t급 이지스 순양함 카우펜스호(USS Kaupens)를 배치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순양함은 항공모함 키티호크호(USS Kitty Hawk)를 중심으로 편성된 항공모함 전투단(Battle Group)에 배속된 3척의 순양함 가운데 1척인데, 페르시아만에서 이라크 공격임무를 수행하다가 동해에 이동배치되어 일본의 니가타(新潟)항에 기항하면서 북(조선)에 대한 해상작전에 나섰습니다.
원래 이지스함이란 8천-9천t급 구축함 또는 순양함에 이지스전투체계(Aegis combat system)를 탑재한 군함을 말하는데, 이지스함에는 미사일 요격능력, 항공기 요격능력, 전자정보수집능력을 갖추어져 있습니다. 미국 해군은 이지스전투체계를 탑재한 순양함과 구축함을 보유하고 있으며, 일본 해상 '자위대'도 공고(金剛)급 이지스함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이지스함은 선체를 자체 기술로 건조하고 이지스 전투체계는 미국에서 수입하여 설치한 것입니다. 중국 해군도 이지스 전투체계를 갖춘 신형 구축함을 자체 기술로 건조하여 실전배치 하였습니다. 남(한국) 해군도 2008년부터 2011년의 기간에 이지스함 3척을 보유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미국, 일본, 남(한국)의 이지스함들은 북(조선)의 미사일전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동해를 작전구역으로 삼고 해상미사일방어체계를 작동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 미국은 동해에 배치한 이지스함의 해상미사일방어체계를 알래스카에 배치한 지상미사일방어체계와 통합시켜 북(조선)의 미사일전력을 무력화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2004년 7월 22일 알래스카 내륙에 있는 포트 그릴리(Fort Greeley)에서는 지상미사일방어체계에 요격미사일을 장착하는 마감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연합뉴스』 2004년 7월 23일자)
이처럼 미국이 미사일방어체계 완공을 서두는 것은, 올해 11월에 있을 미국 대통령 선거 직전에 미사일방어체계를 완공하여 '깡패국가'로부터 오는 미사일 공격위험을 성공적으로 제거하였음을 과시하고, 부시 정부의 군사적 업적을 미국 인민들에게 과시하여 표를 더 많이 얻어내려는 계략이기도 합니다.
넷째, 미국은 2004년 8월초 태평양군 소속 제7함대(U.S. Seventh Fleet)의 전력을 강화 하였습니다. 『에이에프피(AFP)통신』 2004년 8월 11일자 워싱턴발 보도에 따르면, 태평양군 사령관 토머스 파고(Thomas B. Fargo)는 최근 국방장관 럼스펠드에게 하와이와 괌 사이에 고도의 출동태세를 갖춘 항공모함 전투단을 추가로 배치할 것을 건의했으며, 그 건의는 진지하게 검토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미국이 2007년부터 서태평양에 해상군사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아사히신붕』 2004년 7월 21일자 보도와 일맥상통합니다.
『아사히신붕』 2004년 8월 2일자 보도에 따르면, 미국 해군 핵추진 항공모함 존 씨 스테니스호(USS John C. Stennis)가 일본 나가사키(長崎)현에 있는 사세보(佐世保)항에 입항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평화운동가 이시우 씨가 2004년 8월 16일 서울의 인터넷언론 『통일뉴스』와 진행한 대담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 요코스카(橫須賀)를 모항으로 하는 미국 해군 제7함대의 8만4천t급 항공모함 키티호크호가 8월초에 동해에 배치되었으며, 지난 8월 6일 사세보항에서 유조선과 보급지원함이 각각 한 척씩 동해로 이동하였다고 합니다. 이시우 씨의 말에 따르면, 지난 3월 '독수리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평택항에 들어간 미국의 사전배치선단(Maritime Prepositioning Ship)이 부산 하야리야(Hayaria) 부대의 군사시설과 군사장비를 사세보항에 하역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미국 해군이 동해에 집결하여 북(조선)의 미사일체계를 무력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북(조선)에 대한 공격력을 한층 강화하는 조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에 따라 주일미군기지는 미국 태평양지배체제의 전력투사거점(Power Projection Hub)으로 전변·보강되고 있습니다.
다섯째, 미국의 주도로 미·일 동맹군의 합동작전능력이 증강되고 있습니다. 최근 부시 정부가 추진하기 시작한 주한미군 감군조치는 미·일 동맹군의 합동작전능력 증강책동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주일미군이 해상미사일방어체계를 강화하는 것에 발맞춰 일본 해상 '자위대'도 해상미사일방어체계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마이니치신붕(每日新聞)』 2004년 8월 2일자는 일본 방위청이 미사일방어체계를 집중적으로 강화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음을 보도하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미국의 주도로 오는 10월말에 열리게 될 이른바 '대량파괴무기 확산방지구상(Proliferation Security Initiative)'의 다국적 해상합동훈련에 일본이 가장 먼저 발벗고 나서고 있습니다. (『연합뉴스』 2004년 7월 26일자) 일본 방위청 장관 이시바 시게루(石破茂)의 지휘 아래 '자위대'는 북(조선) 미사일기지에 대한 공격력을 보유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아사히신붕』 2004년 7월 26일자)
주제 2 - 주한미군사령부의 '작전계획 5027-04'와 한·미 동맹에 대해서
물음 - 얼마 전 북(조선)은 언론을 통해 미군이 한(조선)반도 침략전쟁계획인 '작전계획 5027-04'를 수립하였다고 폭로·규탄하였습니다. 미군의 '작전계획 5027'에 관한 문제는 1990년대 말에 이미 남(한국) 언론에서 제기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북(조선)이 제기한 문제는 세상에 공개된 '작전계획 5027'의 일반적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라 2004년도에 수정·보완된 특정한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그 특정한 내용은 미군의 북침공격 가능성을 지적한 것이며, 따라서 한(조선)반도에서 미국이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더욱 높아져 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응답 - 어느 나라 군대나 나름대로 군사작전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군사작전계획은 1급 군사기밀이므로 외부에 공개하지 않습니다. 적들이 군사작전계획을 파악하는 경우, 그 작전계획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2004년 7월 12일 『교도통신』은 미국 국립안보문서보관소(National Security Archive)에 보관된 기밀해제된 문서들 가운데 냉전시기 미국의 군사작전계획이었던 '단일통합작전계획(Single Integrated Operations Plan)'에 관한 문서를 공개하였습니다. 그 군사작전계획은 미국이 1960년대에 사회주의진영과 전면적인 핵전쟁을 벌이기 위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주목하는 것은, 그 작전계획이 3천2백기 이상의 핵무기로 소련과 중국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의 사회주의 동맹국들에 있는 목표물 1천개를 공격하는 선제공격계획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핵전쟁으로 지구 전체를 파괴하고 인류를 전멸시키는 대재앙을 불러오려는 군사작전계획입니다. 만일 미국이 그 군사작전계획이 실행에 옮겨졌더라면, 한(조선)반도는 미국의 핵공격으로 폐허가 되었을 것입니다. 미국 제국주의세력은 핵전쟁의 대재앙을 꿈꾸는 악의 화신입니다.
냉전이 끝나고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의 군사정세는 크게 바뀌었습니다. 냉전시기에 사회주의진영을 공격하려고 작성하였던 '단일통합작전계획'은 쓸모가 없어져 폐기되었고, 기밀해제되어 문서보관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냉전시기의 '단일통합작전계획'이 문서보관소에 들어갔다고 해서, 미국이 한(조선)반도 전쟁계획을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미국은 한(조선)반도를 파괴하기 위한 새로운 전쟁계획을 세워놓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주한미군사령부가 '작전계획 5027(Operation Plan 5027)'을 가지고 계속 전쟁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군사작전계획의 목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시차별 전력배치목록(Time-Phased Force Deployment List)'에 따라 북(조선)을 침공하는 다섯 단계의 작전을 전개하면서 군사점령과 정권교체를 추진하는 것입니다. 그 군사작전계획은 2년에 한 차례씩 주기적으로 수정·보완되는 것으로 언론에 보도되곤 합니다.
주목하는 것은, '작전계획 5027'은 재래식 전쟁계획이고 미국의 새로운 한(조선)반도 전쟁계획은 핵전쟁 계획 이라는 점입니다. 미국의 한(조선)반도 전쟁계획이 핵전쟁 군사작전계획이라는 점은 명백합니다. 미국의 한(조선)반도 핵전쟁계획은 냉전시기의 '단일통합작전계획'과 마찬가지로 선제공격전략에 따라 추진되는 것입니다. '시차별 전력배치목록'에 따라 몇 달 동안 단계적으로 벌어지는 재래식 전쟁에서 그러한 선제공격전략을 수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작전계획 5027'은 한(조선)반도 핵전쟁에서 쓸모가 없게 되었습니다.
주한미군사령부가 언론에 공개한 '작전계획 5027'은 기밀해제된 다른 군사작전문서와 마찬가지로 폐기되어 문서보관소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미국의 한(조선)반도 핵전쟁계획은 1급 군사기밀이므로 외부에서는 알 수 없으며, 작전명조차도 알려진 바 없습니다. 다만 미국의 한(조선)반도 핵전쟁계획에 관해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내용들입니다.
첫째, 미국의 한(조선)반도 핵전쟁계획은 '단일통합작전계획'과 마찬가지로 선제공격전략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 둘째, 북(조선)에 대한 군사점령과 북(조선)의 정권교체를 작전목표로 하여 진행되는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한(조선)반도 핵전쟁계획에 따른 실전기동훈련이라는 것. 셋째, 주한미군 재배치 역시 한(조선)반도 핵전쟁계획에 따라 추진된다는 것. 넷째, 한(조선)반도 핵전쟁계획은 미·일 동맹군의 합동작전계획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었다는 것. 다섯째, 한(조선)반도 핵전쟁계획은 미국 본토에 대한 북(조선)의 전략미사일 공격을 방어하는 미사일요격작전계획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한미군사령부는 왜 폐기된 '작전계획 5027'을 언론에 흘려준 것일까요? 작전계획을 언론에 흘려주는 행위에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저들의 정치적 의도는, 북(조선)에 대한 군사적 위협과 공갈을 지속하는 한편, 주한미군이 마치 '전쟁억제력'인 것처럼 위장하여 남(한국)을 심리적으로 안정시키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미국 제국주의세력이 한(조선)반도 전쟁계획을 세워두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북(조선)이 '작전계획 5027'을 거론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거기에는 미국의 한(조선)반도 전쟁계획을 폭로하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전쟁책동을 파탄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조선)반도에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전쟁책동은 이전의 '작전계획 5027'이 새로운 한(조선)반도 핵전쟁계획으로 교체된 것과 상관없이 지속되고 있으므로, 북(조선)은 세상에 알려진 '작전계획 5027'을 거론하면서 미국의 제국주의 전쟁책동을 폭로·규탄하는 것입니다.
주목하는 것은, 북(조선)은 미국의 제국주의 전쟁책동을 폭로·규탄하는 것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적극적 대응에 핵억제력이 포함되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적극적 대응에 관한 공식발언은 2004년 7월 22일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대표가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조선인민군측은 핵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면서 공회전으로 시간만 끌고 있는 6자회담의 막 뒤에서 지금 미국이 맹렬히 벌리고 있는 무력증강 놀음에 대하여 수수방관할 수 없으며 그 어떤 경우에도 미국측이 공격준비를 끝내고 출발진지를 차지할 때까지 팔짱을 끼고 기다리고만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엄숙히 선언한다는 것을 각하에게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통일신보』 2004년 7월 31일자에서 다시 옮김)
물음 - 미국의 한(조선)반도 전쟁계획과 미국이 장악하고 있는 한·미 동맹체제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얼마 전 노무현 정권이 전민족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이라크 추가파병도 역시 한·미 동맹체제에 의해서 강제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응답 - 한·미 동맹체제의 성격은 일차적으로 군사동맹체제라는 데 있습니다. 미국 제국주의세력의 한(조선)반도 핵전쟁계획을 상설제도화한 전쟁체제가 한·미 동맹체제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여, 한·미 동맹은 핵참화를 예고하는 전쟁동맹입니다.
그러므로 한(조선)민족을 미군의 전략핵무기로 몰살하려는 끔찍한 전쟁동맹을 반대하는 것은 모든 한(조선)민족 성원의 정당한 권리이며 숭고한 의무입니다. 한·미 동맹을 반대하고, 그 동맹체제를 해체하는 정치투쟁은 단순한 정치투쟁이 아니라 한(조선)민족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내는 의로운 투쟁이며, 조상이 물려준 신성한 강토를 핵참화의 위험에서 구하는 구국투쟁입니다.
중시하는 것은, 2004년 8월 남(한국) 민족민주운동이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저지투쟁을 전개하면서 사상 처음으로 한·미 동맹을 반대하는 투쟁구호를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민족민주운동은 주한미군을 철군하라는 투쟁구호를 넘어서 한·미 동맹을 반대하는 최고 수준의 전략구호를 들고 미국 제국주의세력의 한(조선)반도 전쟁책동을 타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라크에 한국군을 파병하라는 미국 대통령 부시(George W. Bush)의 요구가 청와대에 전달되었을 때, 노무현 대통령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라고 해서 어찌 침략전쟁의 사지에 한국군을 내몰아 민족적 저항을 자초하고 싶었겠습니까. 어떤 자료를 보니까, 부시의 파병강요 때문에 그는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며 고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국 노무현 정권은 한·미 동맹을 위해서 한국군을 파병해야 한다는 구실을 내걸고 미국의 강요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노무현 정권이 미국의 강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파병하는 근본원인은, 한·미 동맹이라는 올가미가 그 정권의 목에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한·미 동맹이라는 올가미를 끊어버리지 못하면, 남(한국)은 영영 미국의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6.15 공동선언 실현과 미국의 제국주의 전쟁책동이 상극인 것처럼, 민족공조와 한·미 동맹이 양립할 수 없음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노무현 정권이 미국의 요구에 따라 북(조선)을 공격하기 위한 한·미 합동군사훈련에 계속 동원되면서, 입으로만 민족의 화해와 협력을 말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이율배반 입니다. 이제 노무현 정권은 민족공조의 길로 나서든지 아니면 한·미 동맹에 예속되어 자승자박의 함정 속으로 굴러 떨어지든지 두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야 합니다.
주제 3 - 6자회담의 장래에 대해서
물음 - 최근 북(조선)은 6자회담에 대하여 사실상의 거부의사를 표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부시 정부는 대선을 앞두고 어떻게 해서든지 6자회담을 재개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시 정부가 6자회담을 재개하려고 애쓰는 의도가 '핵문제'를 성실하게 해결하려는 데 있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부시 정부는 6자회담을 벌여놓고 지난 2년 동안 시간을 질질 끌어오다가, 이제는 자기들의 국내문제인 대선에 6자회담을 이용하려고 6자회담이 진전되고 있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작하려는 혐의가 보입니다. 지금 매우 복잡한 문제들이 얽힌 6자회담의 장래문제는 조·미 관계를 정상화하는 전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응답 - 6자회담에 기대를 걸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수명을 다한 6자회담은 천천히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부시 정부도 알고 있으며, 북(조선)도 알고 있습니다.
되돌아보면, 6자회담은 단명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불우한 운명을 안고 있었습니다. '핵문제'는 조·미 사이에서 발생한 문제이므로 당연히 조·미 정치회담으로 해결하여야 하는데도, 부시 정부는 '핵문제'를 다자회담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것은 부시 정부에게 '핵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처음부터 없었음을 입증합니다. '핵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는 부시 정부를 상대로, '핵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6자회담에서 '핵문제'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북(조선)은 처음부터 6자회담에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기대를 걸 수 없는 6자회담에 북(조선)이 참가한 까닭은, 6자회담으로서는 '핵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중국, 일본, 러시아, 남(한국)이 깨닫게 될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단명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6자회담이 지금까지 시간을 끌어온 것은 부시 정부가 '핵문제' 해결을 회피하는 지연전술을 구사해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클린턴 집권시기에 미국 정부는 4자회담을 벌여놓았던 적이 있습니다만, '핵문제'는 4자회담에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4자회담은 몇 차례 열리다가 흐지부지해지더니 결국 막을 내렸습니다. 4자회담의 확대복제판인 6자회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올해 미국에서는 대통령선거가 있습니다. 부시는 재선에 성공하기 위해서 마치 자기가 '핵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것처럼 미국 유권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대선 이전에 부시 정부는 자기 손으로 6자회담의 막을 내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명백하게, '핵문제'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북(조선) 적대정책을 포기하는 문제입니다. 미국이 적대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북(조선)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적대정책 포기와 핵무기 개발 포기는 한 물체의 두 면과 같습니다.
북(조선)은 미국이 적대정책을 포기하는 경우,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고 한(조선)반도를 비핵화하겠다는 구체적인 방안을 이미 오래 전에 부시 정부에게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시 정부는 북(조선)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고 한(조선)반도를 비핵화하는 경우, 자기들이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에 관한 합리적인 방안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결정적인 장애요인입니다.
그렇다면 부시 정부는 왜 합리적인 해결방안을 내놓지 않는 것일까요? 그 까닭은 명백하고 간단합니다. 적대정책을 포기하는 방안을 차마 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적대정책을 포기하는 방안이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고, 주한미군을 철군하며, 조·미 관계를 완전히 정상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세 가지 사안 가운데서 어느 것 하나도 부시 정부가 실행하기 힘들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과 복잡성이 있습니다. 그 세 가지 사안 가운데서 결정력을 가진 사안이 주한미군 철군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핵문제'는 주한미군 철군에 의해서, 오직 그것에 의해서만이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지배세력들이 이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2004년 8월 17일 미국 연방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가 끝난 직후, 그 청문회를 주재한 상원의원 군사위원장 존 워너(John Warner)가 기자의 질문을 받고 내놓은 답변이 눈길을 끕니다. 기자는 주한미군 철군은 북(조선)의 오랜 요구사항이었는데 현재 주한미군을 감군하는 조치가 북(조선)과 진행하는 회담에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조건으로 될 수는 없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군사위원장 워너는 북(조선)의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북(조선)과의 회담에서 주한미군 감군조치를 협상조건으로 사용하는 문제를 고려하였으나, 부시 정부는 주한미군 감군을 협상조건으로 내놓지 않기로 결정하였다고 답변하였습니다. (『연합뉴스』 2004년 8월 18일자) 이들 사이에 오간 짧은 발언에는 다음과 같 은 두 측면이 드러나 보입니다.
첫째, 부시 정부가 주한미군 감군조치를 조·미 정치회담의 협상조건으로 사용할 것인지를 검토하였다는 것입니다. 군사위원장 워너는 고려하였다(consider)는 표현을 썼으나, 나의 판단으로는 내부검토를 거쳤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으로 보입니다. 부시 정부가 주한미군 감군조치를 협상조건으로 사용할 것인지를 검토하였던 때는, 베이징에서 제3차 6자회담이 열렸던 2004년 6월 23일 이전의 어느 시점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둘째, 부시 정부는 주한미군 감군조치를 조·미 정치회담의 협상으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결정하였다는 것입니다. 군사위원장은 부시 정부가 내부검토까지 하였던 협상조건을 왜 사용하지 않겠다고 결정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나의 판단으로는, 북(조선)이 그 협상조건을 거부하리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북(조선)이 미국에게 요구하는 것은 감군이 아니라 철군입니다. 감군조치는 남(한국)에 대한 제국주의 지배체제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므로, 북(조선)이 감군조치와 '핵문제' 해결을 맞바꿀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한미군 철군은 미국이 다른 어떤 협상조건을 내놓는다고 해서 북(조선)이 타협하거나 양보할 수 있는 성질의 사안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고, 주한미군을 철군하며, 조·미 관계를 완전히 정상화하는 것은 서로 연결된 사안들로서 연속선상에서 추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안을 추진하는 과정은 미국이 남(한국)에 대한 제국주의 지배체제를 포기하는 과정과 일치합니다.
지금 부시 정부는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국주의 지배체제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지금까지 10년 동안 클린턴 정부와 그 뒤를 이은 부시 정부는 제국주의 지배체제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핵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진장 애를 썼지만, 헛수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협박도 해보고, 정치회담도 해보고, '인도주의적 지원'도 해보고, 경수로를 건설해주겠다고 약속도 해보고, 전쟁위험을 고조시키기도 해보고, 다자회담도 해보고, 물질적으로 보상해주겠다고 약속도 해보았으나, 이루어진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은 주한미군 철군과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속수무책입니다. 남(한국)에 대한 제국주의 지배체제를 포기하던가 아니면 '핵문제'를 해결하던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미국이 '핵문제'의 올가미에 걸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부시 정부는 올해 대통령 선거국면에서 '핵문제'의 올가미에 걸려있는 자신의 모습을 미국의 유권자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만일 이번 대선에서 부시가 패하고 케리(John F. Kerry)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핵문제'의 올가미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올가미는 부시의 목에서 케리의 목으로 옮겨가는 것일 뿐,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은 과연 미국이 '핵문제'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남(한국)에 대한 제국주의 지배체제를 포기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집중됩니다. 남(한국)에 대한 제국주의 지배체제는 미국의 태평양 지배체제의 일부입니다. 미국이 남(한국)에 대한 제국주의 지배체제를 포기하는 것은 태평양 지배체제에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 아니지만, '핵문제'의 올가미에 걸려 목이 졸리면 그것은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치명상이 됩니다. '핵문제'의 파탄은 아시아지역에서 핵확산금지체제의 붕괴를 촉발시킴으로써 태평양 지배체제에 치명상을 입히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북(조선)이 궁지에 빠진 미국으로 하여금 남(한국)에 대한 제국주의 지배체제를 포기하도록 강제하려면 '핵문제'의 올가미를 더 힘껏 조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북(조선)이 '핵문제'의 올가미를 조이는 목적이 미국의 목을 졸라 죽이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남(한국)에 대한 제국주의 지배체제를 포기시키는 데 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다시 말해서, '핵문제'를 파탄시켜 아시아지역에서 핵확산금지체제를 붕괴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남(한국)에 대한 제국주의 지배체제를 포기시키는 게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북(조선)이 아무 때나 무턱대고 '핵문제'의 올가미를 조일 수는 없습니다. 특히 미국 대선기간 중에는 '핵문제'의 올가미를 조이는 것을 피할 것입니다. 별반 효과도 내지 못할뿐더러, 자칫 잘못되면 역효과를 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제 4 - 이른바 '탈북자문제'에 대해서
물음 - 최근 노무현 정부는 베트남에 머물고 있던 북(조선)의 불법월경자 4백68명을 남(한국)으로 데려갔습니다. 김대중 정부와 달리, 노무현 정부는 6.15 공동선언을 이행할 생각은 하지 않고, 6.15 공동선언을 저해하는 탈북공작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탈북자문제'는 '인권문제'가 아니라 '인권문제'로 위장된 대북공작이라는 점이 점점 더 뚜렷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응답 - 우선 '탈북'이라는 개념이 귀순, 망명이라는 개념과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90년대 중반 이전에 남(한국) 정부당국과 언론은 '귀순'이란 말을 썼습니다. 원래 '귀순'이란 적이나 배반자가 반항심을 버리고 돌아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지난 시기 남(한국) 정부는 북(조선)의 군인이나 주민이 남(한국)으로 넘어갔을 경우, 그를 '귀순용사' 또는 '귀순자'라고 불렀습니다. 반면에, 북(조선)에서는 남(한국) 주민이 북(조선)으로 넘어갔을 경우, 그를 '의거입북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대북비밀공작을 담당해온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은 '귀순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북(조선) 해외체류자에게 접근하여 포섭하고 남(한국)으로 데려가는 '요인귀순공작'을 벌였습니다. 그러한 '요인귀순공작' 대상은 해외에 합법적으로 체류하는 외교관, 대외무역회사 관계자 등 '요인'들이었습니다. 이한영, 김덕홍, 황장엽 같은 사람들이 '요인귀순공작'에 걸려들었던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망명이란 정치적 탄압을 피하여 다른 나라로 몸을 피하는 것을 뜻합니다. 남(한국) 정부는 북(조선)을 이탈하여 남(한국)으로 넘어간 사람을 망명자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한국) 정부는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의 관계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북(조선) 주민이 남(한국)으로 넘어간 것을 다른 나라로 망명해온 것으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중국에서 떠도는 북(조선) 주민은 정치적 탄압을 피하여 중국으로 간 것도 아닙니다.
정치적 탄압, 종교분쟁, 전쟁, 기근, 자연재해 등을 피하여 다른 나라로 대피한 사람들을 난민이라고 부릅니다. 난민지위는 유엔에 의하여 국제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조·중 국경을 불법적으로 넘어가서 중국에서 떠도는 북(조선) 주민들에게는 국제법상 난민지위를 줄 수 없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난민지위를 주어야 한다면,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온 남(한국) 불법체류자들이나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간 남(한국) 불법체류자들에게도 난민지위를 주어야 합니다. 남(한국)에 들어간 중국 국적의 조선족 불법체류자들이나 동남아시아 출신 불법체류자들에게도 역시 난민지위를 주어야 합니다.
이런 복잡한 사정 때문에 1990년대 중반부터 남(한국) 정부당국자들은 이른바 '탈북'이라는 해괴한 신조어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습니다. 말의 뜻인즉 북(조선)을 이탈하였다는 것입니다. 주목하는 것은 '탈북'의 원인입니다.
함경남북도에 사는 동포들 가운데는 만주에 사는 조선족과 인척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조선족 동포가 북(조선)에 사는 친척을 방문하는 것이나 북(조선) 동포가 만주에 사는 조선족 친척을 방문하는 것은 1945년 해방 이후 지속되어오는 일상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북(조선) 동포와 조선족 사이의 합법적인 상호방문이 예상치 못한 교란을 당하기 시작한 것은, 한·중 수교 이후 남(한국) 동포들이 만주를 방문하게 된 때부터입니다. 한·중 수교 이후 남(한국)은 조선족을 매개로 하여 북(조선)에 침투할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공간에 눈독을 들인 것은 국정원 대북공작조직과 이른바 '탈북지원단체'라고 부르는 극우반북세력의 대북공작조직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금품으로 매수한 조선족은 친척방문자나 보따리장수 등으로 위장하고 합법경로로 북(조선)에 들어가서 비밀공작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각종 정보를 수집하는 정탐공작, 자본주의 사상과 문화를 침투시켜 사회주의 체제를 교란하는 와해공작, 그리고 북(조선) 주민을 남(한국)으로 데려오는 '탈북유치공작'이 추진되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기획탈북'이나 '기획입국'이라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탈북시켜서 남(한국)으로 데려가는 것은 기획사업이 아니라 '탈북유치공작'입니다. 기획이라는 중립적인 개념은 비밀공작에는 어울리지 않으므로, '기획탈북'이나 '기획입국'이라는 신조어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세상이 아는 대로, 1990년대 중반 이후 2000년까지 북(조선)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최대의 시련기에 처하였습니다. 당시 경작지가 별로 없는 함경남북도는 다른 지역보다 식량사정이 더 나빴습니다. 함경남북도 주민들 가운데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나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두만강 상류에는 국경을 가르는 철책도 없고 강물도 매우 얕아서 심지어 어린아이들도 중국 쪽으로 넘어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국경선을 불법적으로 넘을 수 있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식량이나 생활필수품 등을 구하기 위해서 또는 돈을 벌어보려는 생각에서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들어간 사람들은 북(조선) 정부와 중국 정부에 의해서 불법월경자(不法越境者)로 규정됩니다. 불법월경자라는 말을 남(한국) 식으로 표현하면 불법체류자가 됩니다. 남(한국) 정부와 '탈북지원단체'는 불법월경자를 '탈북자'로 둔갑시켰던 것입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불법월경자가 급증하자, 국정원과 극우반북세력들은 두 가지 비밀공작을 집중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중국에서 떠도는 불법월경자를 남(한국)으로 유치하는 공작, 그리고 금품으로 매수한 조선족을 북(조선)에 침투시켜 북(조선) 주민을 남(한국)으로 유치하는 공작입니다. 국정원 요원이 직접 북(조선)에 침투하여 정탐활동을 하였던 '흑금성 공작'이 '고난의 행군' 시기인 1997년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그 무렵 대북비밀공작은 최고조에 이르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국정원과 극우반북세력의 대북공작은 철저하게 비밀공작으로 추진되었으므로 외부에서는 그 전모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불법월경자는 중국 공안당국의 눈을 피해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도와준다는 구실로 접근하면 유치공작은 쉽게 먹혀 들어갈 수 있습니다. 6.15 공동선언 이후 남북 교류와 상호방문이 늘어나자 불법월경자들에게도 남(한국)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졌습니다. 유치공작에 걸려든 불법월경자들은 여권이 없어서 중국 공항에서 출국수속을 밟을 수 없으므로, 일단 베이징의 남(한국) 영사관이나 제3국 공관에 불법진입시킨 뒤에 남(한국) 정부당국이 중국 정부당국과 막후 교섭을 벌여 중국 정부가 그들을 제3국으로 추방하는 방식으로 탈북유치공작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외교통상부 장관 반기문이 최근 언론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남(한국)에 들어오기를 희망하는 '탈북자'는 모두 수용한다는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가겠다고 합니다. 남(한국) 정부와 '탈북지원단체'들이 불법월경자를 '탈북자'로 규정하고 유치공작을 추진하여 남(한국)에 끌고 가는 데도, 그는 불법월경자들이 마치 남(한국)에 들어가기를 자원하는 것처럼 사태를 왜곡하였습니다.
북(조선)에서 먹고살기 힘들어서 중국으로 넘어간 동포를 남(한국)으로 데려가서 살게 해주는 것은 인도주의와 동포애의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는데, 어째서 부정적으로만 보느냐 하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닙니다.
우선 남(한국)에 들어간 불법월경자는 극소수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모두 남(한국)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남(한국) 사회로부터 차별을 받으면서 극빈층으로 전락하였고, 일부는 범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들의 남(한국) 생활은 행복과는 거리가 먼 불행한 생활입니다. 남(한국)에서 차별, 소외, 빈곤, 적응실패로 시달리는 '탈북자'들의 입에서 '이렇게 살 줄 알았으면 중국에서 북(조선)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라는 후회와 탄식이 흘러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보다 자살로 죽는 사람이 더 많을 뿐 아니라, 해마다 1만3천명 이상 자살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율을 기록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남(한국) 사회에 북(조선) 주민을 데려가서 잘 살게 해주겠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지금 일본, 미국, 캐나다 등지에는 남(한국)에서 먹고살기 힘들어서 남(한국)을 등지고 떠난 불법체류자가 수십만 명에 이릅니다. 그런데 만일 북(조선) 정부가 나서서 남(한국)에서 먹고살기 힘들어서 이탈한 그들을 인도주의와 동포애의 차원에서 북(조선)으로 데려가겠다고 한다면, 남(한국)은 어떤 반응이 보일까요? 대뜸 해외불법체류자를 끌고 가는 북송공작을 중단하라는 규탄의 목소리를 높일 것입니다. 이런 이치에서 보자면, 남(한국) 사회가 북(조선) 불법월경자를 남(한국)으로 끌고 가는 남송공작에 대해서 너무도 관대한 것은 자가당착의 모순입니다.
일본, 미국, 캐나다의 불법체류자 문제가 남(한국) 정부와 관련국 정부 사이에서 법적으로 처리되어야 할 문제인 것처럼, 중국의 불법월경자 문제도 역시 북(조선) 정부와 중국 정부 사이에서 법적으로 처리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남(한국) 주민의 불법체류문제에 북(조선)이 '인권'을 명분으로 개입할 수 없는 것처럼, 북(조선) 주민의 불법월경문제에 남(한국)이 '인권'을 명분으로 개입할 수 없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불법월경자가 늘어나자, 그들을 남(한국)으로 유치하는 공작을 추진하는 것을 대가로 적지 않은 금품을 챙기는 조선족이 생겨났습니다. 베이징, 홍콩, 서울을 잇는 국제범죄조직이 금품을 받고 유치공작을 추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뉴욕에서 들은 바에 따르면, 어떤 재미동포 이산가족은 북(조선)을 방문하여 자기 가족을 만난 뒤에 그들을 남(한국)으로 빼돌리기 위해서 국제범죄조직에 거액의 금품을 주고 탈북유치공작을 추진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그 공작을 추진한 국제범죄조직은 주소와 이름만 주면 언제든지 북(조선)의 어느 지역이라도 침투하여 대상자를 중국이나 제3국으로 빼돌려 주겠다고 장담하였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된 불법월경자는 조·중 정부당국의 합의에 따라 중국 정부당국이 북(조선)으로 추방하게 되어 있습니다. 불법입국자를 본국으로 추방하는 것은 국제법상 지극히 정당한 일입니다. 그런데 남(한국) 정부와 극우반북세력은 추방을 '송환'이라고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왜곡하여야 자기들이 개입할 명분을 갖기 때문입니다.
북(조선)으로 추방된 불법월경자는 북(조선)의 법에 따라 처벌을 받습니다. 대부분 가벼운 처벌을 받고 곧 석방되기 때문에 다시 불법적으로 국경선을 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심지어 탈북유치공작에 걸려 남(한국)에 들어갔다가, 다시 불법월경하여 북(조선)으로 돌아간 경우도 있고, 북(조선)으로 되돌아갔다가 다시 불법월경하여 남(한국)으로 들어간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남(한국) 정부와 극우반북세력은 북(조선)으로 추방된 불법월경자들이 교화소에 끌려가서 '가혹한 인권유린'을 당하는 것처럼 왜곡합니다. 그렇게 왜곡하여야 자기들이 '인권보호'라는 미명으로 개입할 명분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벌어진 불법월경자 유치사건은 유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중국이 아니라 베트남을 우회경로로 한 탈북유치공작이었다는 점, 4백68명이나 되는 대규모 탈북유치공작이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불법월경자 4백68명을 베트남의 지정된 비밀장소에 집결시키고,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집단체류를 가능하게 한 것은 남(한국) 정부와 베트남 정부의 공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중국 정부와 달리 베트남 정부는 그들을 제3국으로 추방하지 않고 남(한국) 정부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지난 시기 있었던 수 십 명 규모의 불법월경자 유치공작은 남(한국) 극우반북세력과 남(한국) 정부당국의 공조로 추진된 것에 비해서, 이번의 대규모 유치공작은 남(한국) 정부당국의 주도로 추진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북(조선)은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정부당국 사이의 대화를 중단하는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세상에 알려진 대로, 노무현 정부는 관련부처들로 이루어진 '북한이탈주민대책협의회'라는 것을 운영하면서, '북한이탈주민종합대책'을 수립하고 있으며, '북한이탈주민후원회'를 통하여 극우반북세력의 탈북유치공작을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2004년 8월 25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출석한 통일부장관 정동영은 지금까지 남(한국)으로 데려간 '탈북자'가 5천명이 되는데, 앞으로 1만명이 되는 사태에도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9월초 10여개 정부기관이 총리가 주재하는 회의에 모여 탈북유치공작을 '개선'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부는 탈북유치공작이 북(조선)을 자극하고 남북관계를 냉각시킬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왜 그런 공작을 계속 추진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노무현 정부가 탈북유치공작으로 북(조선) 사회주의 체제를 와해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정부의 탈북유치공작만이 아닙니다. 사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악화시킨 것은 미국의 극우반북세력이 불법월경자 유치공작에 개입한 것입니다. 1990년대 중반에 워싱턴 정가에 떠돌아다녔던 이른바 '북(조선) 붕괴설'을 아직도 믿고 있는 미국의 극우반북세력은 북(조선)이 저절로 붕괴할 것이라는 자기의 기대가 어긋난 것임을 알고 나서, 적극적으로 붕괴시키려고 책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북(조선)의 불법월경자를 미국으로 빼돌리는 유치공작을 미국 정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북(조선)을 붕괴시켜보려는 것입니다.
지금 워싱턴 디씨에 진을 치고 북(조선)을 붕괴시키려는 생각에 사로잡힌 미국의 극우반북세력은 불법월경자를 미국으로 유치하여 사회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비밀공작에 관련하여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쿠바 사람들을 미국으로 유치하여 쿠바의 사회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려는 공작은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계속되고 있습니다. 쿠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는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는 쿠바를 '해방'하겠다는 목표를 내건 망명단체가 조직되어 쿠바에 대한 침투, 선전, 유인, 테러를 일삼고 있습니다.
북(조선)을 붕괴시키려는 생각에 사로잡힌 미국의 극우반북세력은 황장엽을 비롯한 '탈북자'들을 워싱턴 정계에 끌어들여 '증언'이라는 사기극 공연을 배후에서 조종·연출하고, 평소에 북(조선)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는 연방의원들을 자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부 연방의원들은 '탈북자'를 워싱턴에 등장시킨 미국의 극우반북세력과 손잡고 '북(조선)자유법안(North Korea Freedom Act)'이니 '북(조선)인권법안(North Korea Human Right Act)'이니 하는 법안을 연방의회에 내놓았습니다. 그런 법안의 핵심내용은 간단히 말해서, 미국 정부가 북(조선)의 '탈북자'를 미국으로 유치하면서 북(조선) 와해공작을 추진한다는 것입니다. '북(조선)자유법안'은 지난 7월 21일 연방하원에서 통과되어 연방상원의 최종의결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만일 그러한 법안이 통과되면 극우반북세력들이 한·미 공조체제로 결탁하여 북(조선)에 대한 와해공작을 벌이게 될 것이며, 미국 정부 차원에서 불법월경자들에 대한 유치공작이 추진될 것입니다.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의 반대를 꺾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데 성공하여 인권문제에 자신감이 붙으면, 그들은 북(조선)의 '인권문제'를 제기하려는 유혹을 느낄 것이 명백합니다. 2004년 8월 25일 국회에서 열렸던 '인권정책연구회' 창립총회에 참석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김창국은 국가인권위원회는 북(조선)의 인권문제를 중장기사업으로 단계적으로 포괄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노무현 정권의 대북정책은 김대중 정권의 이른바 '햇볕정책'보다 더 후퇴한 반동적 기조 위에서 추진되는 '탈북촉진정책'으로 보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이번 대규모 탈북유치공작은 노무현 정부가 직접 나서서 추진한 것이었지만, 사태발생의 배후에는 부시 정부와 미국의 극우반북세력이 노무현 정부의 공작 독점권을 빼앗으려고 노무현 정부를 자극한 책동이 있었습니다. 부시 정부와 미국의 극우반북세력이 노무현 정부를 자극하여 대규모 탈북유치공작을 서둘러 추진하도록 충동질한 것은 명백합니다. 북(조선)은 이러한 사실을 지적한 것으로 보입니다.
주제 5 - 남북최고위급회담 개최가능성에 대해서
물음 - 최근 남(한국)과 미국의 언론들은 남북최고위급회담이 올해 하반기에 개최될 가능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남북최고위급회담이 개최되어야 한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언급하였고, 중국을 방문한 전 국회의원은 현지 소식통으로부터 남북최고위급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일부 언론도 남북최고위급회담이 열려야 한(조선)반도의 문제가 풀릴 수 있다고들 말합니다. 이러한 논의에는 당위성의 문제와 현실성의 문제가 얽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목하는 것은 남북최고위급회담 개최의 당위성이 아니라 현실성입니다. 과연 이러한 정세 속에서 남북최고위급회담 개최가 바람직한 것일까요? 또는 그 회담의 개최가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응답 - 우선 남북정상회담이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정상회담(summit talk)이란 나라를 대표하는 정부수반이 만나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정치회담을 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한국)의 헌법이나 북(조선)의 헌법이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남북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라는 사실은 7.4 남북공동성명이나 남북기본합의서에서도 명백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평양회담은 정상회담이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회담은 정상회담이 아닙니다. 민족공조는 전자의 평양회담에서는 불가능하고, 후자의 평양회담에서만 가능합니다.
나는 평양회담을 남북최고위급회담이라고 부릅니다. 남북최고위급회담을 남북정상회담이라고 부르는 것은 헌법조항에 배치됩니다. 북(조선)에서는 남(한국) 최고당국자와의 회담을 정상회담이라고 부르지 않는데, 남(한국) 정부와 언론은 거리낌없이 정상회담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남(한국) 정부와 언론은 이전에는 '남북연합'이라는 특수한 개념을 쓰더니, 요즈음에는 '국가연합'이라는 위헌적 개념을 쓰고 있습니다. 남(한국) 정부와 언론이 남북정상회담이나 국가연합과 같은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헌법에 배치되는 위헌행위, 그것도 가장 중요한 헌법조항에 배치되는 위헌행위입니다. 남북 사이의 물자교역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제교역이 아니라 민족내부의 교역이라고 인정하여 관세를 부과하지 않으면서도, 남북최고위급회담이나 조국통일방안과 관련해서 민족내부관계를 국제관계로 왜곡하는 것은 정치부문에서 민족공조의 원칙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남(한국) 사회의 일각에서 남북최고위급회담이 올해 후반기에 열리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만, 현 정세로 보아서 그렇게 될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첫째, 노무현 정권은 김대중 정부보다 더 심하게 친미예속성을 드러내었습니다. 노무현 정권의 친미예속성은 이라크 추가파병 강행사태에서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그 사태를 통하여 드러난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은 마치 침략전쟁 종범의 올가미를 걸려 침략전쟁 주범 부시에게 질질 끌려가는 꼴입니다. 민족자주성을 최우선적 가치로 여기는 북(조선)이 이라크 침략전쟁 주범에게 끌려가는 노무현 정권과 남북최고위급회담을 추진하기는 힘듭니다.
둘째, 노무현 정권은 김대중 정권과 달리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의지가 없으므로 퇴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기 위한 남(한국) 민중의 조국통일운동을 가로막고 나서게 됩니다.
김대중 정권은 6.15 공동선언을 발표한 일방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6.15 공동선언을 강조하였습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노무현 정권은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겠다는 분명한 의사를 표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목하는 것은, 노무현 정권의 행동입니다. 6.15 공동선언 이행의지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사실 의사표명이 아니라 실제행동입니다.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노무현 정권이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를 주시하면 결론은 명백해집니다.
우선, 노무현 정권에게 6.15 공동선언을 적극적으로 이행할 의사가 있다면, 지난 6.15 공동선언 발표 4주년 기념행사를 정부차원에서 개최하여 실천으로 이행의사를 표명하여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김대중 도서관 개관식에 손님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는 것으로 6.15 공동선언 발표 4주년을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주인이 주인의 자리를 내던지고 손님의 자리로 나앉은 것은 실천주체 이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관망자로 남겠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노무현 정부는 김일성 주석 서거 10주기를 맞아 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선생이 추진한 조문방북을 가로막았습니다. 박용길 선생은 1995년 7월 평양에서 열린 김일성 주석 서기 1주기 추모행사에 참석하였고, 판문점을 통해서 서울에 돌아갔습니다. 1994년 7월에 조국통일운동단체들의 조문방북추진을 탄압하였던 김영삼 정부도 당시 박용길 선생의 조문방북에 대해서는 차마 탄압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번에 박용길 선생의 조문방북요청이 제기되었을 때, 노무현 정부 관련부처들은 찬반양론으로 갈려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그에 관하여 보고를 받은 노무현 대통령은 조문방북을 허락하지 말도록 직접 지시하였습니다. 북(조선)에서 김일성 주석 서거 10주기가 얼마나 중요한 정치적 의의를 가지는 시점인지를 노무현 대통령이 몰랐을 리 없고, 박용길 선생의 조문방북이 남북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몰랐을 리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하라."는 단호한 지시로 조문방북을 가로막았습니다.
그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판단착오나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남(한국) 극우반북세력의 반발을 의식하여 남북관계개선을 조심스럽게 추진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6.15 공동선언을 계승·발전시키기는커녕 역사의 시계바늘을 6.15 공동선언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역행의사를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 사건 이었습니다. 극우반북세력의 반발 때문에 남북관계개선에 조심할 수밖에 없다는 핑계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오늘, 노무현 정부가 6.15 공동선언 이행에 나서지 않는 것은 사실상 이행의지가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만이 아닙니다. 노무현 정부는 북(조선) 불법월경자를 집단적으로 남(한국)에 끌고 가서 '외교적 승리'를 자축하였습니다. 불법월경자를 집단적으로 끌고 가는 것이 남북관계를 파경으로 몰아넣으리라는 점을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불법월경자 집단유치공작에 관한 보고를 받고 그것을 승인하였습니다. 불법월경자 유치공작은 이른바 '북(조선) 붕괴설'을 믿는 광신자들이 주도하는 와해공작의 일환이므로, 노무현 정부가 그 공작을 추진하는 것은 노무현 정부의 대북관이 '북(조선) 붕괴설'을 믿는 광신자들의 대북관과 상통하고 있음을 입증합니다. '북(조선) 붕괴설'에 대한 광신과 6.15 공동선언에 대한 믿음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도 자명하며, 노무현 정부의 탈북유치공작이 6.15 공동선언에 대해서 반동적이라는 점도 자명합니다.
남북최고위급회담은 어디까지나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기 위하여 열려야 하는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처럼 6.15 공동선언에 역행하는 노무현 대통령과 한 자리에 마주앉는 것은 힘들게 되었습니다. 남북최고위급회담은 아무 때나 열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북최고위급회담은 노무현 정부가 6.15 공동선언을 성실히 이행할 의사를 행동으로 표시하여야 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는 9월에 정기국회가 열리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안건이 상정될 것입니다. 북(조선)은 국가보안법이 6.15 공동선언과 양립할 수 없는 최대의 장애물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하면서 줄곧 폐지를 요구하여왔습니다.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6.15 공동선언에 역행하면서 국가보안법을 붙들고 있는 한, 남북최고위급회담이 열리기 힘듭니다. 현재 냉각된 남북관계는 이번에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개선될 것이고, 남북최고위급회담 개최문제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따라 탄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제 6 - 이른바 '양안문제'에 대해서
물음 -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 사이의 정치·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는 이른바 '양안문제'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전에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되어야 하고, 또 해결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그런데 주목하는 것은, '양안문제'가 한(조선)반도의 통일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양안문제'는 중화민족의 내부문제이고, 한(조선)반도의 통일문제 역시 한(조선)민족의 내부문제인 것은 명백하지만, 그 두 가지 문제가 태평양 지배체제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응답 - 아시다시피, 지금 부시 정부는 아시아와 유럽에 배치한 미군을 감축하고 재배치하는 조치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주독미군을 재배치하는 대상지역은 동유럽입니다. 동유럽은 지난 냉전시기에 옛 소련군이 배치되었던 지역인데, 지금은 미군이 그 지역에 밀고 들어가 전진배치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가 자기에게 다가오는 미군의 전진배치를 보면서 긴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는 대조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은 지난 냉전시기 북(조선)에 매우 근접하여 전진배치하였던 주한미군을 감군하고 후방에 재배치하고 있으며, 주일미군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은 북(조선)과 중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전략이 변화되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미국은 주일미군을 강화하고, 동맹군인 일본 '자위대'와의 합동작전능력을 강화하여 동해와 대만해협을 작전구역으로 하는 전쟁체계를 보강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동해와 대만해협만 지키고 있으면 태평양 지배체제를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동해에서 조선인민군과 러시아 극동군을 상대하는 대치선을 유지하고, 대만해협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을 상대하는 대치선을 유지하면 태평양을 영구히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 미국 전략가들의 생각입니다.
미국이 동해전선과 대만해협전선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동해의 대치선과 대만해협의 대치선을 강화하기 위해서 미국 해군 제7함대의 전투력을 강화하는 문제, 동아시아에 배치한 미국 육군을 신속기동군체제로 개편하는 문제, 일본 '자위대'와의 합동작전능력을 향상시켜는 문제, 군사분계선에 형성된 기존의 대치선을 한국군에게 넘기고 주한미군을 신속기동군체제에 배속시켜 후방에 재배치하는 문제가 그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동해와 대만해협을 작전구역으로 삼는 경우, 당연히 미국 해군 제7함대의 작전능력이 강화될 것입니다. 동해와 대만해협에서 제7함대의 작전능력이 강화되는 것과 함께 북(조선), 중국, 러시아 극동군도 대응전력을 갖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근 북(조선), 중국, 러시아 극동군이 해군력 강화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은 그러한 군사정세변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북(조선)이 새로운 미사일을 장착한 해상미사일발사장치와 잠수함미사일발사장치를 실전배치하였다는 보도는 그러한 정세의 반영입니다.
둘째, 북(조선)은 한(조선)반도의 통일을, 중국은 대만과의 통일을 국가목표로 삼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반면에, 유럽에서 일어나는 군사상황변화에서는 이러한 통일문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주목하는 것은, 동북아시아에서 통일문제는 군사상황을 변화시키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라는 점입니다. 군사상황이 통일문제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통일문제를 해결하려는 국가적 의지와 노력이 군사상황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지금 부시 정부가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을 재배치하는 것이나 일본 정부가 덩달아 '자위대' 무력을 증강하는 것은 통일문제를 해결하려는 북(조선)과 중국의 국가적 의지와 노력과 정면으로 충돌되는 행동입니다. 태평양 지배체제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국가적 의지와 노력은 통일문제를 해결하려는 북(조선)과 중국의 국가적 의지와 노력과 충돌하고 있습니다.
셋째, 중국의 대만통합은 미국의 태평양 지배체제를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한(조선)민족에게 유리한 정세를 조성하겠지만, 대만통합 이후의 중국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패권주의정책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중국이 무모한 패권주의정책을 추진할수록 그 악영향은 동북아시아와 한(조선)반도에게 파급되어 갈등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지금 중국은 통일된 한(조선)민족이 중국에 대해서 만주의 영토문제를 제기하여 갈등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우려는 이른바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는 고구려역사 찬탈책동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통일된 한(조선)민족이 중국에 대해서 영토분쟁을 일으킬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런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조선)반도에 건설될 연방통일국은 미·일 동맹군과 대치하는 한편, 연방통일국 내부에 제기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인데, 이웃나라인 중국과 영토분쟁을 일으켜 화를 자초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중국은 패권주의에 기울어져 한(조선)반도 정세전망을 오판하지 말아야 하며, 한(조선)민족이 건설할 연방통일국에 대한 기우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2004년 8월 28일 작성)
《세기와 더불어》1권 제3장 길림시절:
3.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3.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ㅌ. ㄷ》성원들과 비밀독서조성원들의 활동에 의하여 맑스-레닌주의사상이 빠른 속도로 전파되여가자 청년학생들의 사상의식에서는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선진사상은 그들로 하여금 점차 력사와 민족앞에 지닌 자기들의 임무를 깊이 자각하게 하였다.
우리는 청년학생들의 의식화를 위한 사업을 계속하면서 그들을 여러가지 조직에 묶어세워나갔다. 조직을 통해서만 맑스-레닌주의사상을 더 널리 보급할수 있었고 핵심력량도 더 빨리 키워낼수 있었다.
나의 혁명활동은 청년학생운동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우리가 혁명활동을 청년학생운동으로부터 시작하고 거기에 그처럼 큰 의의를 부여한것은 내가 학생의 몸이라는데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로동자와 농민을 비롯한 광범한 군중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데서 그 운동이 노는 역할과 위치가 매우 중요하였기때문이였다.
맑스-레닌주의리론에서는 청년학생운동을 교량자의 역할에 비기고있다. 다시말하여 청년학생운동이 선진사상을 보급하고 대중을 계몽각성시켜 혁명운동에로 추동하고 안내하는 교량자적역할을 수행한다고 규정하고있다. 우리도 그 리론을 긍정하였다.
혁명이 심화발전되는데 따라 청년학생들의 역할에 대한 우리의 견해와 립장에서는 질적인 변화가 생기였다. 우리는 혁명의 동력을 로동자, 농민의 본위로만 규정하던 종전의 낡은 시각에서 벗어나 청년학생들도 혁명투쟁에서 당당한 주력을 이룬다고 새롭게 규정하였다. 이것은 청년학생운동이 걸어온 로정이 립증해주고있다.
3.1인민봉기와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사건 등 해방전 우리 나라 반일애국투쟁의 봉우리를 이루는 주요한 력사적사변들에서 청년학생들은 항상 앞장에 서서 용감하게 싸웠다. 우리는 공산주의운동의 새 력사도 청년들의 힘으로 개척하였고 15성상의 항일무장투쟁도 청년학생들을 골간으로 하여 전개하였다. 오늘도 우리 혁명에서는 청년학생들이 돌격대의 역할을 수행하고있다.
남조선혁명에서도 주력은 청년학생들이라고 할수 있다. 4.19인민봉기의 산파도 청년학생들이였고 광주인민항쟁(1980년)의 주역도 청년학생들이였으며 《제5공화국》정권을 타도한 6월항쟁의 기수들도 청년학생들이였다. 중국사람들이 신민주주의운동의 시발점으로 보고있는 5.4운동의 최선봉에 청년학생들이 서있었다는것도 세상이 다 알고있는 사실이다.
인류가 아직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전인미답의 길을 헤치며 새로운 경험을 부단히 창조해온 조선인민의 풍부하고도 장구한 투쟁력사는 청년학생들을 하나의 계층으로조차 보지 않던 종전의 리론이 우리 나라의 실정과는 잘 맞지 않는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1920년대 전반기까지의 우리 나라 청년학생운동에는 계급적립장과 반제적립장이 확고하지 못하고 대중속에 깊이 침투하지 못하는 부족점이 있었다. 운동의 상층은 대부분 인테리출신들이였으며 운동의 주력도 계몽활동에 편중되고있었다. 우리는 청년학생운동에서 이런 부족점이 재현되지 않도록 철저히 경계하면서 첫 걸음을 잘 떼려고 있는 노력을 다하였다.
그런데 막상 조직을 내오고 거기에 청년학생들을 망라시키자고 하니 복잡한 문제들에 부닥치게 되였다.
청년학생들을 조직화하는데서 우리에게 가장 큰 난관으로 제기되였던것은 민족주의자들과 종파분자들에 의하여 이미 만들어진 기성청년조직들이 있는 조건에서 어떤 방법과 형식으로 우리의 조직을 내오겠는가 하는 문제였다. 길림에는 길림청년회, 조선인려길학우회와 소년회를 비롯한 여러가지 기성조직들이 있었다.
그런 조직들이 없다면 빈터우에 집을 짓는 식으로 거침없이 새 조직들을 내오겠는데 여러갈래의 기성단체들이 출현하여 청년학생들과의 사업을 하고있는 조건에서 그것을 전혀 무시할수도 없었다.
우리는 심중히 토의한 끝에 이미 있는 조직들가운데서 간판만 있고 활동하지 않는 조직은 무시하고 새롭게 꾸리며 미약하게나마 움직이는 조직은 그대로 두고 리용개편하는 방법을 취하기로 하였다.
우리가 길림에서 처음으로 내온 조직은 조선인길림소년회였다. 그때 길림에는 민족주의자들이 만들어놓은 소년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름뿐이고 길림시내의 조선소년들은 그런 조직이 있는지조차 모르고있었다.
우리는 1927년 4월에 손정도네 례배당에서 조선인길림소년회라는 합법적 조직을 무었다.
나는 김원우, 박일파(박우천)와 함께 이 모임을 지도하였다. 모임에서는 조직부와 선전부, 문체부(문화체육부)와 같은 소년회의 부서들을 내오고 학교와 지역별로 되는 반도 조직하였다.
그때의 일에 대해서는 당시 소년회 선전부 책임자로 있던 길림녀자사범학교출신의 황귀헌이 잘 기억하고있을것이다. 소년회는 로동자, 농민, 중소상공인, 민족주의자의 자제들을 비롯하여 길림시안의 조선인소년들을 다 망라시키였다. 조선인길림소년회의 목적은 소년들을 반일사상으로 교양하여 그들을 혁명의 믿음직한 후비대로 키우는데 있었다.
조선인길림소년회는 강령에서 회원들이 새로운 선진사상을 학습하고 그것을 광범한 군중속에 널리 해설선전하는것을 중요한 과업으로 내세웠다. 그해 5월에 우리는 조선인려길학우회를 조선인류길학우회로 개편하였다. 조선인려길학우회는 망라된 인원도 적지 않았고 일정한 정도로 영향력도 있었다.
원래 조선인 려길학우회는 길림에 와서 공부하는 조선인청년학생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조직한 단체로서 민족주의자들의 후원을 받고있었다. 려길학우회의 고문들가운데는 손정도도 있었다.
우리가 려길학우회를 류길학우회로 개편하려고 하자 어떤 동무들은 조선인려길학우회가 민족주의자들이 주관하는 순수한 친목단체라는것을 문제시하면서 그것을 밀어치워버리자고 하였다. 본바탕이 민족주의이면 거기에 아무리 이질적인것이 량적으로 많이 첨가된다고 하여도 그것은 결국 민족주의화된다는것이였다. 그 주장의 본질은 낡은 사조로서의 민족주의를 타도하자는데 있었다.
당시는 대중을 끄는데서 경쟁이 심했다.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서로 대치되여 승벽내기로 군중을 끄는가 하면 같은 공산주의운동내부에서도 파벌별로 저마끔씩 대중을 끌어당기느라고 야단법석을 하였다. 오늘 서울파가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의 지도부를 장악하면 래일은 화요파가 그에 대항하여 한양청년회라는것을 만들어내고 모레 화요파가 조선로농총동맹을 만들어내면 이번에는 반대로 서울파가 거기에 맞서서 경성로농회라는것을 만들어내는것이 하나의 풍으로 되고있었다.
종파분자들은 심지어 다른 파들을 견제하기 위한 테로단도 경쟁적으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우리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전철을 밟을수가 없었다. 우리가 만일 종파분자들이 하는 식으로 조선인려길학우회를 무시하고 길림에 새로운 청년조직을 또 내온다면 민족주의자들과의 관계에서 복잡한 문제가 생길수 있었으며 학생청년들의 대렬을 분렬시킬수 있었다. 그렇게 하는것은 어느 모로 보나 백해무익한 일이였다.
우리는 조선인려길학우회속에 들어가 본래의 합법성을 계속 유지하면서 점차 그 조직을 순수한 친목단체로부터 혁명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자고 하였다. 공산주의자인 내가 명예회장으로 되였지만 표면상으로는 민족주의자들을 끼고하는 일이였기때문에 중국군벌당국의 주의도 덜 끌었다. 나는 조선인 려길학우회를 지도하면서 그것을 조선인 류길학우회로 개편하였다.
조선인 류길학우회는 겉으로는 조선인청년학생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단체라고 표방하였지만 실지로는 《ㅌ. ㄷ》의 리념을 실현하는 혁명적인 학생청년조직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인 려길학우회를 조선인 류길학우회로 개칭하고 그것을 순수한 친목단체로부터 혁명적인 조직으로 개편한것은 우리가 청년학생운동을 하면서 얻은 하나의 큰 경험이였다.
우리가 만든 조직들이 움직이게 되면서부터 길림 시안의 풍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청소년학생들의 일과생활부터 몰라보게 변하였다. 소년회와 류길학우회에 망라된 청소년들은 아침마다 지구별로 조기회를 하였다. 일요일이 오면 길림시내 모든 회원들이 대렬을 지어 북산에도 가고 가창행진도 하였으며 북산밑에 있는 운동장에서 체육경기도 하였다.
우리는 청소년학생들과의 사업을 하는데서 그들의 취미와 의식수준에 맞게 여러가지 형식과 방법을 활용하였다. 소년회에 망라된 학생들가운데는 기독교신자들의 자녀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부모들의 종교적영향을 어떻게나 많이 받았는지 세상에 정말 《하느님》이 있다고 까지 생각하였다. 이런 학생들 에게는 아무리 《하느님》이 없고 종교를 믿는것이 어리석은 짓 이라고 말해 주어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날 나는 우리의 영향을 받고있던 조선인 소학교의 한 녀선생에게 부탁 하여 종교를 믿는 학생 들을 데리고 례배를 보러 가게 하였다, 그 녀선생은 나의 말대로 학생들을 데리고 례배당에 가서 온종일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아버지시여, 배가 고픈데 우리에게 떡을 주시고 빵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드리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떡이나 빵이 차례질 리는 만무하고 배만 여전히 쪼록쪼록 고팠다.
이번에는 녀선생이 학생 들을 데리고 가을을 하고 난 밀 밭에 가서 이삭을 줏도록 하였다. 선생은 밭에 학생 들을 데리고 가서 굉장히 많은 이삭을 주어왔다. 그 이삭을 털어서 빵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학생들은 그 빵을 먹으면서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 보다는 실지 로동을 통해서 먹을 것을 얻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 단순한 사실 같지만 청소년 들의 사상의식을 개조하고 낡은 인습을 청산 하는 데서는 이것도 하나의 방법 이였다.
우리가 청소년들이 례배 보러 다니는 것을 경계하고 그들이 미신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부단히 교양한 것은 결코 종교 그 자체를 타도 하자는 데 있지 않았다. 청소년들이 미신에 빠지고 예수의 교리를 절대화 하게 되면 혁명에 아무 쓸모도 없는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될 수 있기때문에 그것을 미연에 방지 하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신자 라고 하여 혁명을 못한다는 법은 없지만 세계에 대한 과학적인 리해가 부족한 청소년 들의 경우에는 종교가 내포 하고있는 무저항 주의적인 요소 들로부터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길림에 가보니 어떤 소년 회원들은 거리를 걸어다니면서도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만큼 청소년 들에게 미치는 종교적 영향력이 강하였다. 그런데 찬송가나 불러가지고서는 적의 화구앞으로 돌진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는 찬송가를 부르는 신도들 보다도 결사 전가를 부르는 투사들이 더 필요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청소년 들에게 혁명적인 노래들을 대대적으로 보급 하였다. 찬송가를 부르면서 거리를 오가던 소년 회원들이 얼마 후부터는 《소년애국가》와 《조선인길림소년회가》를 부르며 버젓이 시가행진을 하였다.
조선인 길림 소년회와 조선인 류길학우회가 나온 다음 우리가 한 활동 가운데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해 여름방학에 조직한 국어 강습 이다. 그 강습 에는 중국인 소학교에 다니는 조선 소년들을 비롯하여 우리 나라 글을 모르는 아이들을 다 참가시키였다. 그 소년 들의 대다수는 출생 지가 만주 였다. 만주에서 태여난 소년들은 조선말 보다 중국말을 더 잘하였다.
우리는 그때 부터 《조선사람은 조선을 알아야 한다》 는 구호를 내들었다.
계영춘, 김원우, 박소심이 엇바꾸어가며 강의에 출연 하였다. 그때 까지만 하여도 우리에게는 교원이 따로 없었다. 조직의 모든 핵심들이 다 교원이였고 강사 였다. 20일 동안 강습을 하고 나니 여기에 참가했던 소년들이 누구나 다 어린이 잡지를 볼수 있게 되였다.
소년회와 학우회는 청소년들의 취미와 기호에 맞게 룡담산 원족과 강남공원 야유회도 조직하고 문화유적 들에 대한 참관과 답사도 조직 하였으며 강연회, 토론회, 학습회, 웅변대회, 독서 발표회, 노래 보급, 연예공연과 같은 과외 활동도 많이 조직 하였다.
우리는 그때 비밀활동 장소로서 강남공원과 북산을 많이 리용 하였다. 강남공원은 릉라도와 같이 아름답게 생긴 송화강 상의 섬이였다. 길림의 자본가 들은 이곳에 나무를 많이 심어 섬을 식물원과 같이 수려하게 꾸리고 입장료 까지 받아 먹으면서 돈벌이를 하였다. 공지 에다가는 락화생 같은 것도 재배 하였다. 이 공원에서 우리가 야유회의 간판을 가진 비밀회의를 많이 하였다.
강남공원 보다 더 리상적인 밀회장소는 북산 이였다. 초목이 무성한 여름 철을 위주로 리용 하던 강남공원에 비하여 북산은 계절의 구애를 받지 않고 사시장철 자유롭게 리용할 수 있었다. 길림에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여드는 유원지가 바로 북산 이였다. 그러므로 북산과 그 주변에는 봉사 망도 시적으로 제일 조밀하게 배치되여 있었다. 북산으로 들어가는 거리 량옆 에는 음식점, 빙탕막, 완구상, 담배상, 잡화상, 차집, 오락장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서양 상품 판매를 전업으로 하는 큰 경광 상점도 있었다.
북산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것은 경치가 좋은데도 있지만 거기에 약왕묘와 같은 명승고적이 많았기때문이였다. 약왕묘라는것은 약신의 제사를 지내는 절당이라는 뜻이다.
길림 에서는 매해 6월 4일부터 6일까지의 사흘 간을 묘회 기간 으로 정하고 성정부의 주관 하에 북산에서 약신령의 탄생을 축하하는 관제행사를 벌리였다. 이 행사에는 일반서민 들은 물론, 관직을 가진 사람들 까지도 다 참가 하였다. 묘회기간의 3일은 휴가로 선포 되였다.
경찰당국은 이 행사가 벌어질 때마다 북산아래 대도로 동쪽에 림시파출소를 내오고 전화를 가설 하였으며 산우에는 경찰분반까지 배치하여 상공계의 질서를 유지하는가 하면 약왕묘, 관제묘, 랑랑묘에 피우는 향불이 산불로 번져가지 않도록 부단히 경계하고 단속 하였다. 3일간의 행사 기간에는 마차부 들과 인력거군 들까지 평상시의 10배나 되는 돈을 벌었다.
장사아치 들이 3일간의 묘회를 돈벌이의 호경기로 삼았다면 이 도시의 유지들과 선각자들은 성립통속강습소의 간판을 가지고 군중을 계몽시키는 사회교육의 연단으로 삼았다. 각이한 직업에 종사하는 계몽활동가들이 도처에 나타나 주먹을 흔들며 애국, 도덕, 법수호, 미감, 실업, 체육, 위생 등의 주제를 가지고 열변을 토하였는데 북산이 아니고서는 어데서도 볼수 없는 참으로 희한한 광경이였다.
이런 복잡한 틈바구니 에서 우리도 군중을 찾아다니며 선진사상을 먹이고 때에 따라서는 비밀회합도 하였다. 약왕묘 지하실은 우리의 전용회의실 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절의 중은 우리가 쟁취한 사람 이였다.
나는 길림에서 학교를 다닐 때 강연도 많이 하였다. 어떤 때에는 민족주의자들이 조직한 토론회에 가서도 연설을 하였다. 오동진, 리탁을 비롯한 정의부의 지도자들은 국치일(8월 29일), 3월 1일, 단군탄생일(10월 3일) 등 주요기념일이 있을 때마다 시내 교포들과 청소년 학생들을 모여놓고 강연회와 토론회를 자주 조직하였다.
류길학우회의 성원들 속에서는 리준의 방법이 옳은가, 안중근의 방법이 옳은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론쟁을 많이 하였다. 아무리 론쟁을 해도 결판이 나지 않으므로 우리는 려길학우회가 류길학우회로 개편된 그해 여름에 손정도네 례배당에 시내에 있는 조선인학생들을 다 모아놓고 그 문제를 토론에 붙이기까지 하였다.
그 토론회를 계기로 길림의 청소년들이 크게 각성 되였다. 그들은 테로 로써도 안되겠다, 청원 으로써는 더구나 안되겠다, 강대국 들이 도와 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하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고 조선을 독립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진로가 탐구되여야 하겠다는 것을 일치하게 인정 하였다.
그 당시 길림에서 진행된 토론회나 독서발표회에서는 조선혁명의 실천과 관련된 문제가 많이 론의 되였다.
우리는 매해 5월 첫주 일요일을 《소년회날》로 정하고 이날에 길림시내의 조선인청소년들과 그 부형들, 유지들과 독립운동자들이 참가하는 운동회도 열어 단결의 분위기를 마련하였다.
이렇게 청소년들을 단결시킨 다음 그들을 대중을 교양하고 계몽시키는 사업에 참가시키였다. 열살 안팎의 소년회원 들까지도 방학 이면 강동, 륙대문, 신안툰, 대황구와 같은 주변 농촌마을에 나가 농민들의 일손을 도와주면서 그들을 계몽 하였다. 파쟁이 우심하던 길림에서 우리가 백가지 숨을 쉬던 청소년들을 한가지 숨을 쉬게 만들어놓은 것은 확실히 귀중한 소득 이였고 체험 이였다.
조선인 길림소년회, 조선인 류길학우회, 맑스-레닌주의독서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길림일대에서는 《ㅌ. ㄷ》성원들을 핵심으로 하는 새 세대의 혁명력량이 급속히 자라나게 되였다.
길림에 주재하고있던 일본 총 령사 까지도 이것을 간파하고 우리의 활동에 주의를 돌리게 되였다.
길림 일대 에서 새로운 혁명세력이 등장하여 그것이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는데 질겁한 총 령사는 자기 나라 외무 대신에게 보낸 공식 보고문 에서 그 대오가 조직력이 강하다는것과 장차 무서운 존재로 나타나게 될 위험성이 있으니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는것을 경고 하였다.
일제는 내부가 통일되여있지 않고 사분오렬된 조선공산당의 종파집단이나 실행력과 군중에 대한 침투력이 미약한 민족주의 세력 보다도 파쟁과는 담을 쌓고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면서 인민대중속에 깊숙이 스며들어가 독자적인 방법으로 혁명의 길을 개척 해가는 우리의 존재를 더 무서워 하였다.
길림에 새로운 운동선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만주 각지는 물론, 국내와 중국 관내 에까지 퍼져갔다. 이 소문은 주로 길림에 와서 공부하던 류학생 들과 그들의 부형 들에 의하여 멀리까지 전파 되였다.
우리의 운동선에 합류하려고 국내와 일본, 연해주, 만주각지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길림으로 모여들었다.
독립군에 관계했던 청년들, 일본에 가서 고학을 하던 청년들, 백파들과 싸우던 청년들, 황포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광주폭동에 참가했던 청년들, 국민당 반동들의 추격을 피해 여기저기 숨어다니던 청년들, 레닌의 숭배자, 손문의 숭배자, 루쏘의 숭배자 등 정견과 소속, 생활경로가 서로 다른 천태만상의 청년들이 우리를 찾아왔다. 김혁, 차광수, 김준, 채수항, 안붕 등도 그 시기에 우리를 찾아온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교양하여 《ㅌ. ㄷ》에 받아들이는 한편 조직을 시내 여러 학교들에 확대해나갔다.
그 과정에 우리는 《ㅌ. ㄷ》보다 더 큰 그릇을 가지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망라할수 있는 조직을 내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으며 이런 필요성으로부터 1927년 8월 27일에 《ㅌ. ㄷ》를 반제 청년동맹으로 개편하고 그 다음날 련이어 《ㅌ. ㄷ》의 정수분자 들로 조선 공산주의 청년동맹을 창립 하였다.
반제 청년동맹은 《ㅌ. ㄷ》의 구호를 그대로 내세우고 그 강령을 그대로 계승한 반제 적이고 대중 적인 비 합법적 청년조직 이였다. 조직의 기본 구성은 조선 청년들 이였으나 우리는 반제적 립장이 강한 중국청년 들도 거기에 가입 시키였다. 반제청년동맹은 광범한 반일 청년대중을 혁명대렬에 묶어 세우며 반일 투쟁의 대중적 지반을 튼튼히 하는 데서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이 조직은 문광 중학교, 길림 제1중학교, 길림 제5중학교, 길림 사범학교, 길림 녀자중학교, 길림 법정대학을 비롯하여 조선학생들이 있는 시내의 모든 학교들에 다 들어 갔으며 강동, 신안툰을 비롯한 길림 주변의 농촌 지역과 류하현, 화전현, 흥경현 일대에도 뿌리를 박았다. 조선 청년들이 있는곳이면 다 퍼지였다.
반제 청년동맹 에서는 얼마 후부터 등사판으로 선전용 자료까지 밀어 내뜨렸다.
우리는 그때 청년들을 더 많이 결속하기 위하여 토요일 이면 공부가 끝나기 바쁘게 주변농촌으로 나가군 하였다. 토요일에 공부가 끝나서 떠나면 일을 보고 일요일 오후에 돌아올수 있었다.
우리가 《ㅌ. ㄷ》를 반제 청년동맹으로 개편하고 련이어 공청을 창립한 것은 반년 남짓한 사이 길림과 무송일대에서 청년학생들을 망라하는 합법, 비합법의 여러가지 대중 조직들이 자라난 조건에서 그 모든 조직들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 령솔할 수 있는 조직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였기 때문이다.
청년들의 새로운 전위 조직을 내오는것은 당시 청년운동 발전의 합법칙적 요구 였다.
당시 까지는 내가 어느 조직에나 다 관련되여 있었기 때문에 나 개인의 활동을 통하여 조직들 호상 간의 련계가 지어지군 하였다. 최창걸, 김원우, 계영춘과 같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개별적인 청년 공산주의자의 자격으로 학생 청년조직들에 관계 하였을 뿐이다. 새로운 전위 조직을 내오는것은 당시의 정세로 보아도 절박한 요구로 제기되고 있었다.
그때 일제는 만주침략을 서두르고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자 들은 조선인민에 대한 폭압을 강화 하면서 만주에서 반동 군벌과 결탁하여 조중인민의 반일 기세를 말살 하려고 혈안이 되여 날뛰였다.
조선청년들은 일제와 중국의 반동 군벌들을 반대하여 도처에서 투쟁에 궐기 하였다. 이런 실정은 청년학생들을 조직적으로 결속하고 통일적으로 장악하며 그들의 투쟁을 능숙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는 강력한 전위 조직의 필요를 절실하게 제기 하였다.
고루한 민족주의자 들과 종파분자 들의 령도권 쟁탈로 하여 사분오렬의 길을 걷고있는 청년운동의 실태를 보아도 청년들을 분렬의 위기에서 구원 하고 통일단결의 길로 건전하게 이끌어갈 전위 조직의 탄생은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 앞에 단 하루도 지체시킬 수 없는 시대적 과제로 부과 되였다.
당시 중국 동북 지방에는 비합법적 청년조직 으로서 만주 조선공산주의 청년단이 조직 되였고 합법적 청년조직으로서 남만주 청년총동맹, 북만주 청년총동맹, 동만주 청년총동맹, 길림 청년동맹, 길회 청년동맹, 삼각주 청년동맹 등 여러 단체들이 조직되여 있었다.
각이한 계렬의 종파 분자들이 이 청년 단체들을 서로 끌어 당기고 각이한 세력의 민족주의자들이 승벽내기로 이 단체들에 손을 뻗쳤기 때문에 거기에 속해있는 사람들조차 자기의 소속단체가 공산주의 단체 인지, 민족주의 단체 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정도였다.
청년 학생들은 이렇게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엠엘파나 화요파의 영향을 받는 학생 들이 있는가 하면 같은 민족주의자의 자식들인 경우에도 아버지가 무슨 단체에 속해있는 가에 따라 정의부편, 참의부편, 신민부편으로 갈라지고 거기다가 또 보수파와 혁신파로까지 나뉘여져 었었다. 견해가 다르고 소속 단체가 다르다 보니 그들은 늘 반목 상태에 있었다.
분렬된 청년운동을 바로잡고 청년들을 민족주의 세력과 종파분자들의 영향밑에서 떼여내여 참다운 공산주의 혁명의 길로 이끌어 나가자면 반드시 새로운 전위 조직을 내와야 하였다. 털어놓고 말해서 그때 조선 공산당이 제 구실을 어지간히라도 하였더라면 우리까지 그런 걱정을 안해도 되였을 것이다. 공산주의 리념을 가진 당이 있고 많은 청년조 직들이 있으면서도 그 덕을 하나도 보지 못하니 그보다 더 안타깝고 가슴아픈 일은 없었다.
조선혁명은 그자체의 특수성으로 하여 복잡한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많은 애로와 난관이 걸음마다 앞을 가로막아 나섰다. 종파 분자들 과의 관계, 민족주의자들 과의 관계, 중국인민들 과의 관계, 국제당 과의 관계에서 복잡한 문제들이 항시적으로 제기되였다. 게다가 만주에서 활동하는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일제와 중국 반동 군벌 들로부터 이중적인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혁명을 능란하게 령도해 나가자면 그것을 감당 할 만한 세련된 령도 핵심과 옳바른 지도 리론이 있어야 하였다.
《ㅌ. ㄷ》의 리념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과정에 우수한 청년공산주의자들이 많이 자라났다. 파쟁도 모르고 사대주의도 모르고 집권욕도 모르며 낡은 때가 묻지 않은 새형의 청년 공산주의자들 로써 우리 나라 청년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을 새롭게 개척해 나갈수 있는 참다운 핵심이 육성 되였다.
화전과 길림에서 새 사조를 탐구하고 《ㅌ. ㄷ》와 함께 투쟁의 길을 헤쳐나가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조선혁명의 실천과 관련된 일정한 지도 리론도 가지게 되였다. 나는 이런 지도 리론을 구현한 전위 조직으로 공청을 내올 것을 결심하고 그 강령과 규약을 만드는데 착수 하였다.
강령 에서는 공청이 조선혁명의 실천과 밀접히 결부된 리론에 의하여 지도되며 종파를 철저히 배격한다는것이 특별히 강조 되였다. 우리는 이런 준비에 기초하여 1927년 8월 28일 북산공원의 약왕묘 지하실에서 조선 공산주의 청년동맹을 결성하는 모임을 가지였다.
모임에는 최창걸, 김원우, 계영춘, 김혁, 차광수, 허률, 박소심, 박근원, 한영애를 비롯한 반제 청년동맹 핵심 들과 청년 공산주의자 들이 참가 하였다. 내가 보고를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미 소책자로 세상에 나갔다.
그날 우리는 《ㅌ. ㄷ》를 뭇던 때처럼 서로 어깨를 겯고 한 덩어리가 되여 《인터나쇼날》의 노래를 불렀다.
조선 공산주의 청년동맹은 반제 청년동맹의 핵심 들을 골간 으로 하고 여러 혁명 조직들 에서 단련 되고 검열 된 청년들로 무어진 반제 민족해방과 공산주의를 위하여 투쟁하는 비 합법적인 청년조직 이였다.
조선 공산주의 청년동맹은 조선 청년 공산주의자들의 선봉대로서 각계각층 대중 단체들을 조직 지도하는 전위 조직 이였다.
우리는 공청을 창립한 다음 대렬의 순결성을 보장하고 대오의 조직 사상적 통일단결을 강화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돌리였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헌병, 경찰, 특무들의 준동과 반동 분자들, 종파 분자들의 해독 행위가 심한 당시의 실정에서 조직을 보존할 수 없었다.
공청은 동맹원 들의 사상교양 사업에 큰 의의를 부여하고 그들 속에서 정치리론 수준과 지도 수준을 높이기 위한 학습에 많은 힘을 넣었다. 동맹원들 속에서는 그때 《제국주의론》, 《식민지와 민족문제》, 《조선혁명의 당면투쟁과업》과 같은 문제에 대한 연구와 토론이 진지하게 진행 되였다.
우리는 공청원 들의 조직생활을 매우 중시 하였다. 그 당시 공청 에서는 한달에 한번씩 성격 검토회를 가지고 공청원 들의 생활을 총화 하였다. 공청원 들은 조직생활을 통해 단련 되였으며 공청 대오는 조직성과 규률성이 강한 집단으로 자라났다.
우리는 공청원 들에게 아래 조직들을 지도할 데 대한 분공, 청년학생들과 군중을 계몽 시킬 데 대한 분공, 농촌을 혁명화할 데 대한 분공 등 다양한 분공을 많이 주어 실천 활동을 통하여 그들을 부단히 단련 시키였다.
또한 혁명 조직들 에서 단련된 우수한 청년들로 공청 대오를 부단히 늘여 나갔다.
그리하여 공청은 짧은 기간에 길림 시와 그 주변은 물론, 돈화, 흥경, 화전, 무송, 안도, 반석, 장춘, 할빈 등 만주의 넓은 지역과 북부 조선일대를 비롯한 국내 깊이에 까지 확대 되였다. 공청은 조선혁명에서 전위대의 역할을 수행 하였다. 당이 대중 조직들에 대한 지도를 맡아 하는것은 공산주의 운동에서 하나의 상식 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당이 제구실을 똑똑히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공청이 당에서 해야 할 일까지 맡아 가지고 자기산하의 청소년 조직들에 대한 지도와 함께 로동자조직, 농민조직, 녀성조직들에 대한 지도까지 동시에 담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우리는 공청을 창립한 다음 소문을 내지 않으면서 조용히 대중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설사 그 누가 인정 해주지 않아도 혁명에 리롭고 인민에게 리로운 일을 하면 그만 이다, 이것이 우리의 립장이고 배짱 이였다. 남들이 령도권이 탐나서 자신들을 《정통파》라고 자랑하며 돌아다닐 때에 새 세대의 청년 공산주의자 들은 그런 허영의 세계와 담을 쌓고 혁명의 길을 한치한치 톺아나갔다.
공청은 청년들의 조직적 결속을 촉진시키고 핵심을 육성하며 우리 혁명의 주체적 력량을 강화 하는데서 눈부신 역할을 하였다. 공청의 창립은 새형의 당조직을 내오기 위한 청년 공산주의자 들의 활동을 힘있게 추동 하였으며 그 위업을 앞당기는 데서 중추적이고 근본적인 역할을 하였다. 1930년 여름에 결성된 첫 당조직의 성원들 중 대다수는 공청을 통해 육성된 선봉적인 청년투사들이였다. 얼마전에 우리는 공청 창립일인 8월 28일을 청년절로 제정 하였다.
《세기와 더불어》1권 제3장 길림시절:
2. 상월선생
2. 상월선생
나에게 《자본론》을 안내해준 선생이 박소심이라면 고리끼의 《어머니》와 《홍루몽》을 소개해준 사람은 상월선생이였다. 상월선생은 육문중학교의 어문교원이였다.
상월선생이 육문중학교의 교원으로 부임 되여온 얼마후였다. 베이징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한 새 어문교원이 학교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모두 어문시간을 기다리였다. 그러나 신임교원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한가닥의 불안도 없지 않았다. 교육청이 특무를 어문교원으로 배치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였다. 교육청이 파견하는 육문중학교 교원들가운데는 군벌당국에 매수된 불순분자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는 장학량이 장개석의 지령에 따라 만주땅에 국민당기발을 날리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때였다. 장개석의 특무조직들이 벌써 심양으로부터 길림에까지 손을 뻗치고있었다. 국민당의 졸개들이 아직 육문중학교를 완전히 자기네 수중에 장악하지 못하였지만 혁신사상이 강한 이 학교 교직원, 학생들의 움직임은 언제나 군벌과 그 앞잡이들의 주시속에 있었다.
이런 때에 새 교원이 배치되여왔으므로 학생들은 신경을 잔뜩 도사리고 어문시간을 기다리지 않을수 없었다. 상월선생은 단 한번의 강의로 학생들의 경계심을 해소시켜주고 우리의 인기를 독점하였다.
그는 120회에 달하는 《홍루몽》의 방대한 줄거리를 한시간사이에 다 소화시키였다. 본질을 추리고 거기에 중요한 생활세부들을 끊임없이 섞어가며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솜씨가 얼마나 세련되였는지 우리는 그 소설이 가지고있는 생리와 가부장적전통이 지배하는 한 귀족가문의 조락과정을 순간에 완전히 파악할수 있었다.
상월선생이 수업을 끝내고 교실에서 나가자 학생들은 육문중학교에 보배가 굴러들어왔다고 하면서 환성을 올리였다.
그런데 선생이 《홍루몽》의 내용에 대해서는 많이 말하면서도 그 소설을 창작한 작가에 대해서는 적게 소개하였다. 그래서 나는 다음날 운동장둘레를 산책하는 상월선생을 찾아가 《홍루몽》의 저자 조설근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선생은 시간의 부족으로 하여 작가의 경력은 생략하고 지나갔는데 내가 그런 요구를 하는것은 응당한 일이라고 하면서 조설근의 생애와 집안래력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선생의 설명이 끝난 다음 나는 그자리에서 작가의 출신과 작품의 계급적 성격간의 호상 관계를 두고 몇 가지 질문을 하였다. 상월선생은 그 질문에 대해서도 명쾌한 해답을 주었다. 선생은 자기의 개인적인 소신 이라고 전제를 두면서 작가의 출신이 작품의 계급적 성격에 영향을 주는것은 사실 이지만 그 성격을 규정하는 절대적인 요인은 출신이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 이라고 말하였다. 그 실례로 그는 바로 조설근을 들었다.
그가 강희제의 특별대우를 받는 귀족 가문에서 태여나 부유한 환경 속에서 자라났지만 붕괴 기에 있는 봉건 중국의 내막과 그 멸망의 불가피 성을 형상적으로 보여줄 수 있은것은 세계관이 진보적 이였기때문 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날 상월선생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성주학생이 오늘 나를 찾아온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의문 되는 것이 있거나 해명 하고싶은것이 있을 때에는 주저하지 말고 지체 없이 교원의 방조를 받아야 한다. 그것이 과학을 탐구 하는데서 학생이 가져야 할 자세이다. 때와 장소에 구애 되지 말고 질문을 많이 제기하라. 나는 질문을 많이 하는 학생들을 좋아한다.》
질문을 많이 하라는 상월선생의 그 말이 나의 마음을 끌었다. 원래 나는 소학교 시절부터 질문을 많이 하는 학생으로 알려져 있었다. 육문중학교에 와서도 질문을 많이 하여 교원 들을 성가시게 굴었다.
상월선생은 자기에게 《홍루몽》도 있고 조설근의 략력을 발취해 놓은 자료집도 있으니 보고 싶거든 아무때나 와서 가져가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여 나는 첫 손님으로 선생의 숙소를 방문할수 있는 행운을 지니게 되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늘 학생이 선생의 집에 들락날락 하는것은 장려 할 만한 일이 못된다고 말씀하였다. 서당에서 《동몽선습》같은것을 배우며 성장한 구세대의 인물들은 말 할것도 없거니와 신식 학문의 덕으로 개명을 했다는 어른들 가운데도 우리 할아버지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학생이 선생의 뒤 생활을 자주 엿보게 되면 스승을 신비스럽게 대하지 않는다, 선생은 언제나 학생이 스승을 밥도 먹지 않고 오줌도 누지 않는 신선 처럼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교권을 세울수 있다, 그러자면 병풍을 치고 살아야 한다는것이 할아버지의 지론 이였다.
할아버지는 우리 아버지가 어린 시절에 서당공부를 할 때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고 말씀하였다.
아버지가 다니던 순화서당에 김지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훈장이 있었다. 그 훈장은 술이라면 감투가 벗어진줄도 모르는 애주가였다. 그는 사흘이 멀다하게 접장(지금의 학급반장)을 하는 우리 아버지에게 술심부름을 시키였다. 처음에는 아버지도 고분고분 훈장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그 훈장이 술에 취해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도랑창에 쓰러진것을 보고난 다음부터는 생각을 달리하게 되였다.
어느날 훈장은 되병 한개를 우리 아버지의 손에 쥐여주며 또 술을 사달라고 부탁하였다. 서당문을 나선 아버지는 바위돌에 되병을 던져 박살내고 훈장한테 돌아가 범한테 쫓기다가 돌에 넘어져 술병을 깼다고 거짓보고를 하였다. 훈장은 그 소리를 듣고 어이가 없어 《허허, 백두산범이 만경대에까지 내려왔나. 형직이가 나한테 대포를 불지경이 되였으니 내 꼬락서니가 얼마나 추접스럽게 보였을가. 너희들 한테 술 심부름을 시킨 내가 잘못이지.》 하였다. 그후부터 훈장은 술을 끊었다.
훈장은 술과 결별 하였지만 아버지의 머리에는 개울창에 쓰러져 술내를 풍기던 선생의 모습이 깊이 새겨지게 되였다. 병풍을 치고 살아야 교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할아버지의 지론은 이런 사연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나는 상월선생이 병풍을 칠 사이도 없이 아직 그 누구에게도 개방해 보이지 않았다는 선생의 생활 종심에로 풍덩 뛰여들었다. 선생의 서가에는 수 백 권의 책이 꽂혀있었다. 그것은 내가 그때까지 보아온 서가들 중에서도 가장 풍성하고 이채로운 서가 였다. 상월선생은 책 부자 였다. 그 서가에는 영문으로 된 소설책 들과 전기 문학작품 들도 많았다.
나는 그 서가앞에서 좀처럼 발길을 뗄 수 없었다. 이 서가의 지식을 다 섭취하면 대학을 하나쯤 더 다닌것으로 되지 않을가, 상월선생이 육문중학교에 온것은 나를 위해서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는 이런 생각에 잠겨 손에 잡히는 책을 닥치는대로 뽑아보다가 선생에게 물었다.
《실례이지만 선생님, 이 서가를 갖추는데 몇해나 걸렸습니까?》
상월선생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서가앞에 다가와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 10년쯤 걸린것 같애.》 《이 책들을 다 읽는데는 얼마만큼한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까?》
《부지런하면 삼년, 게으르면 백년.》
선생님, 삼년을 기한으로 제가 이 책들을 다 읽는다면 저에게 서가를 개방해주시겠습니까?》
《개방하지. 그런데 조건부가 있소.》 《책만 빌려주신다면 어떤 조건부든지 다 접수 하겠습니다.》
《다른게 아니구 성주가 장차 작가로 되여야 한다는 조건부야. 나는 오래전부터 프로레타리아혁명에 이바지할 수 있는 작가후비를 한두명 키우려고 했는데 성주가 그 후비 중의 한사람이 될 수 없겠는가 하는거요.》
《선생님께서 그렇게까지 저를 믿어주시니 고맙습니다. 사실 전 문학과목을 특별히 사랑하고 작가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몹시 동경 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독립된 후에는 혹시 문학의 길을 선택 하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 저희들은 나라를 빼앗긴 망국민의 자식들 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나라를 찾으려고 한평생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나가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장차 독립투쟁에 몸을 바치려고 결심 했습니다. 그것이 저의 최대의 리상 이구 포부 입니다. 민족을 해방하기 위한 투쟁이 곧 저의 직업으로 될것입니다.》
상월선생은 서가에 기대여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연방 끄덕이다가 내곁에 다가와 어깨 우에 손을 얹고 조용히 말했다. 《장하오, 성주! 독립투쟁이 리상 이라면 나는 그 리상을 조건부로 이 서가를 성주에게 통채로 개방 하겠소.》 나는 그날 《홍루몽》을 빌려가지고 숙소로 돌아왔다.
상월선생이 나에게 두 번째로 빌려준 책은 장광자의 소설 《압록강가에서》와 《소년방랑자》였다.
나는 이 두 소설을 매우 흥미있게 읽었다. 리맹한과 운고라는 조선의 청춘남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 《압록강가에서》는 특히 나에게 잊을수 없는 인상을 주었다. 그후에는 고리끼의 《어머니》를 빌려보았다. 우리는 이렇게 책과 문학을 통하여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였다.
상월선생은 내가 요구하는 책이면 무엇이든지 다 빌려주었다. 자기의 서가에 없는 책은 품을 내여 다른데 가서 구해다주었다.
선생은 책을 알선 해주는 대가로 나에게서 독후감을 꼭꼭 들어보군 하였다.
우리는 고리끼의 작품 《원쑤들》과 로신의 소설 《축복》을 두고서도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는 과정에 나와 상월선생은 자연히 문학에 대한 견해를 자주 교환 하였다. 우리의 담화에서 초점을 이룬것은 문학의 사명에 대한것이였다. 우리는 문학이 현실을 어떻게 반영하며 사회의 발전을 어떻게 추동하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월선생은 문학이 인류를 지성에로 인도하는 등불이라고 하였다. 기계가 생산의 발전을 추동한다면 문학은 그 기계를 움직이는 인간의 인격을 완성시켜준다고 선생은 늘 말하군하였다.
상월선생은 로신과 그의 작품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대하였다. 선생은 로신의 문우 였고 로신이 지도한 문학소조의 한 성원 이였다. 선생이 소조활동을 할 때 쓴 단편소설 《도끼등》은 로신한테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소설은 봉건유습을 반대하는 라산지방 인민들의 투쟁을 담고 있었다. 상월선생의 딸 상효원의 말에 의하면 로신은 《도끼등》을 읽고 예리성이 부족한 것이 흠 이라고 하면서 그 작품에 대한 불만도 표시하였다고 한다.
상월선생은 초기의 창작에서 나타난 미숙성을 극복하고 1930년대에는 《예모》와 같이 사상 예술적으로 세련된 작품을 창작하여 독자대중 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 장편소설은 그 당시 운남성에서 발간되는 잡지에 련재 되였다. 1980년대에 중국인민 문학출판사 에서는 《예모》를 단행본으로 발행 하였다.
상월선생은 《예모》, 《도끼등》 외에도 장편소설 《창》과 《개문제》를 창작하여 독자들에게 선물하였다. 선생은 교육사업에 종사하면서도 작가적 사색을 한시도 중단 하지 않았다. 선생이 초기에 나를 문학의 길로 인도하려고 생각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나는 상월선생 한테서 《진독수선집》까지 빌려다보았다. 진독수는 중국공산당창건자의 한사람이며 중국당의 실권을 장악하고있던 사람이였다.
상월선생은 처음에 그 책을 잘 빌려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자칫하면 진독수의 우경적 투항주의 로선 에서 나쁜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였다. 선생은 자기가 베이징대학을 다니기 전에 진독수가 그 대학에서 문학부장으로 활동하였는데 많은 교직원, 학생들이 그가 자기네 대학출신인것을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었다고 하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한동안은 진독수를 숭배하였소. 그가 발간한 〈신청년〉잡지와 그의 초기론문들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반해버렸더랬지. 그런데 지금은 진독수에 대한 나의 견해에도 변화가 생기였소.》
상월선생은 이렇게 고백 하면서 5.4운동 시기와 공산당 창당 초기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진독수의 인기가 여지없이 폭락된 것은 그가 우경 기회주의 로선을 제창 하였기 때문 이라고 말 하였다.
진독수의 기회주의적 오유는 농민문제에 대한 립장과 태도에서 가장 우심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쓰딸린은 벌써 1926년에 농민은 중국의 반제국주의전선에서 기본 력량이며 로동계급의 가장 주요하고 믿음직한 동맹군 이라고 지적 하였다. 그러나 진독수는 농민을 경시 하였다. 그는 농민이 토호출신 들과 충돌 하는것을 두려워 하면서 농민이 행정을 간섭 하는것과 농민의 적극적인 자위를 반대 하였다. 한 마디로 말하면 농민투쟁을 제한하려고 하였다.
진독수의 오유는 제국주의를 반대한다는 구실 밑에 농촌혁명을 반대 하면서 부르죠아지가 혁명전선에서 떨어져 나갈까봐 두려워한 데 있다, 그의 투항주의적 로선은 오히려 혁명에 대한 부르죠아지들의 배신을 조장 시키는 결과를 빚어냈다. 이것이 진독수에 대한 상월선생의 견해였다.
선생이 정당하게 말한 바와 같이 진독수의 글들에는 혁명에 막대한 해독을 줄 수 있는 투항주의적요소들이 있었다.
나는 《진독수선집》을 읽은 다음 상월선생과 함께 농민문제에 대한 견해를 나누기 위한 장시간의 담화를 하였다. 그 담화 과정에서는 조선혁명과 중국혁명에서 농민문제가 차지하는 위치의 공통성은 무엇 이며 차이점은 무엇 이겠는가, 농민문제에 대한 레닌의 전략 에서 참고 할 점은 무엇인가, 농민이 혁명의 주력군 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하자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는것 들이 이야기 되였다.
나는 농사가 천하지대본 인것 처럼 농민을 천하지대군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였다.
상월선생은 그 말을 긍정 하면서 농민을 경시 하는것은 곧 농사를 경시하고 땅을 경시 하는 것으로 되기 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리념을 가진 혁명을 하여도 실패를 면치 못하는 법 이라고 말 하였다. 선생은 진독수의 오유가 바로 이 리치를 망각한 데 있다고 부언 하였다.
나는 이런 담화까지 하고나서 상월선생이 공산주의자 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였다. 동시에 상월선생도 내가 공청활동을 하는 사람 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선생의 감수성과 판단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상월선생은 1926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고향에서 농민운동을 지도하다가 국민당 반동 군벌에게 체포된 선생은 절강성륙군 감옥에서 1년 남짓 하게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 그후 그는 조선인 군의의 도움으로 보석출옥 한 후 사중무 라는 이름으로 변성명을 하고 만주지방에 와서 초도남 이란 사람의 소개를 받아 길림 육문중학교에 입직하였다.
농민문제에 대한 견해를 교환 한 다음부터 나는 상월선생과 함께 정치문제에 대한 론의를 자주 하였다. 그 당시 길림의 청년학생들 속에서는 정치론쟁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중국도 대혁명 시기 이고 조선도 대중운동이 앙양 되고있던 시기여서 론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문제점 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조선청년들속에서 리준의 방법이 옳은가, 안중근의 방법이 옳은가 하는 문제가 화제에 올라 격렬한 론쟁을 불러일으키던 시기도 바로 이 무렵 이였다. 많은 청년학생들은 안중근의 투쟁방법에 절대적인 의의를 부여하고 있었다.
나는 상월선생에게 안중근의 투쟁방법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상월선생은 그때 안중근의 소행은 물론 애국적이다, 하지만 투쟁방법은 모험주의적 이라고 말 하였다. 선생의 그 대답은 나의 생각과 일치 하였다. 나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은 결코 큰 군벌의 앞잡이 한 두 명을 처단하는 테로적 방법으로는 승리할 수 없으며 반드시 인민대중을 교양하고 각성시켜 전민을 궐기 시킬 때에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상월선생과 함께 일제의 조선 침략 력사와 조선 에서의 식민지 정책, 만주에 대한 일제의 침략 기도와 군벌들의 동향, 반 제 반 침략 투쟁에서 조중 인민의 단결과 협조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도 의견을 나누었다.
그때 당시 육문중학교 학생들은 군비 축소와 관련된 《국제련맹》의 태도를 두고 많은 론의를 하였다. 학생들가운데는 《국제련맹》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말하는 청년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국제련맹》이 군비 축소 문제를 가지고 가짜 흥정을 한다는 론문을 써냈다. 많은 학생들이 그 론문을 지지 하였다. 상월선생도 그 글을 보고 나의 견해가 옳다고 말하였다.
상월선생은 길림에 온후 공산당 과의 조직선이 끊어진 상태에 있었지만 고리끼, 로신 등 진보적 작가들의 작품을 가지고 그것을 해설 하는 계몽식 강의를 여러차례에 걸쳐 하였다. 언제인가는 비밀독서 조성원 들의 제의를 받고 학교 도서실에서 《제국주의를 반대하자》는 제목으로 한 주일 동안 특별강의를 해주었다. 이 강의를 받은 학생들의 반영이 대단히 좋았다. 나는 그 반영을 수집하여 상월선생을 고무해 주었다.
사상의 진보성과 후대교육 에서의 높은 책임성, 동서고금의 문화와 력사에 대한 폭넓고 깊이있는 지식으로 하여 상월선생은 학생들의 사랑을 받았다.
군벌당국에 매수된 반동 교원 들은 그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상월선생의 교권을 허물어보려고 비렬하게 책동 하였다. 상월선생의 비호와 지지를 받는 학생들도 그들이 모해하고 시샘하는 대상이 되였다.
풍가성을 가진 교원은 리광한 교장 에게 조선 학생들을 퇴학 시키라고 위협 하였고 체육주임 마가는 조선학생들이 중국교원들을 적대시한다고 하면서 나를 반대하는 여론을 불러 일으키려고 꾀 하였다.
그 때마다 상월선생은 나를 비호해 나섰다.
영어 교원도 새 사조를 지향 하는 학생들을 적대적으로 대하였다. 그 교원은 사대주의 사상이 골수 에까지 꽉 들어찬 사람 이였다. 그는 동양 사람들을 깔보다 못해 서양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 소리를 내지 않는데 중국 사람들은 소리를 몹시 낸다고 하면서 그것은 미개한 표현이라고 하였다. 그는 중국사람 이면서도 서양인 처럼 행세 하였다.
그가 동양사람들의 후진성을 두고 야비한 말을 너무도 많이 하는것이 우리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식당 당번을 서는날 일부러 우동을 만들어 놓고 식당에 교원들을 초대 하였다. 뜨거운 우동을 먹다나니 그날 식사 시간에는 온 식당안에 후르륵후르륵하는 소리가 가득찼다. 영어 교원도 후르륵후르륵하는 소리를 내면서 우동을 먹었다.
선생이 입으로 불면서 힘들게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학생들은 식당이 떠나가게 웃었다. 영어 교원은 학생들이 자기에게 골탕을 먹이려고 일부러 우동을 만들었다는 것을 간파 하고 얼굴이 시뻘개서 식당에서 달아나 버리였다. 그 후부터 그는 동양사람들을 모독하는 말을 더는 하지 않았다. 그 선생이 사대주의를 너무 하기 때문에 육문중학교 학생들은 영어수업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상월선생에 대한 반동 교원들의 압력은 1929년에 들어와서 더욱더 우심 해졌다.
한번은 상월선생이 체육은 선수 본위로 하는것보다 군중화 할 수록 좋다는 선전을 하였다. 그것은 학교 운동장에 있는 롱구장을 선수들만 독점하는 현상을 념두에 두고 한 말이였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불량 선수들은 방과 후 숙소에서 교사로 돌아오는 상월선생에게 폭행을 가하려고 무리로 달려들었다.
나는 공청원들과 반제 청년동맹원 들을 발동시켜 불량 선수들의 폭행을 미연에 저지 시키고 그들을 되게 꾸짖어 쫓아버리였다.
《마 체육주임이 졸개들을 잘 길러냈군. 벌거지만도 못한 녀석들.》
상월선생은 꽁무니를 빼는 불량 선수들을 덤덤히 바라보며 이렇게 한탄 하였다.
《선생님, 너무 놀라실 것은 없습니다. 이것도 계급투쟁의 한 형태가 아니겠습니까. 앞으로는 이보다 더 첨예한 충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각오 해야 합니다.》
내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자 선생은 그 말을 수긍하였다. 《그래, 옳은 말이야. 우리는 지금 군벌과의 싸움을 하고있으니까.》
상월선생은 그후 교육청의 조치에 따라 부당하게 출학 처분을 받은 학생들의 복교를 위해 투쟁하다가 철직 되여 육문중학교를 떠나갔다. 장춘과 카륜 지방에 가서 대중 조직들의 사업을 지도하고 학교에 돌아오니 권태석이 뛰여와서 상월선생이 남기고 간 편지를 전해 주었다.
그 편지에는 나는 군벌과의 싸움에서 패자가 되여 떠나간다, 그러나 앞으로는 우리가 군벌을 이기게 될 것이다, 조국과 민중의 참된 아들이 되여 한생을 살기로 결심한 성주의 리념을 위해 나는 어디 가서나 성주 에게 다함 없는 축복을 보낼 것이다 라는 사연이 적혀 있었다. 이것이 나에게 남긴 상월선생의 마지막 대화 였다.
그후 나는 상월선생을 한번도 만나보지 못하였다. 다만 선생이 1955년에 나에게 보내준 글 《나와 소년 시절의 김일성 원수 와의 력사적 관계》와 1980년에 보내준 《중국력사강요》를 받아보고 선생이 생존해 있다는 것을 짐작 하였을 뿐이다. 나는 그때 그 글을 보고 상월선생과 함께 조선 정세와 만주 정세, 일제의 침략 정책과 조중 인민의 공동 투쟁을 론하던 육문중학교 시절을 회고하면서 로 스승 에게 충심으로 되는 마음속 감사를 드리였다.
나는 중국의 지도자들이 우리 나라를 방문 할 때마다 그들에게 상월선생의 안부를 묻군 하였다. 하지만 선생과의 상봉은 아쉽게도 실현시키지 못하였다. 나로서는 옛 제자 로서의 도리를 지키지 못했다고 말하는것이 옳을것이다. 국경이란 참으로 이상야릇한 것이다.
상월선생은 베이징에 있는 중국 인민대학에서 교수로 활동 하다가 1982년에 애석 하게도 세상을 떠났다.
1989년에 중국과학원 력학 연구소 연구원 으로 일하고있는 상월선생의 맏딸 상가란이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고 1990년에는 셋째딸 상효원이 나를 만나보고 돌아갔다. 상효원은 중국 인민대학 에서 교편을 잡고있다.
60년 전에 헤여졌던 스승의 모습을 그 두 딸의 얼굴에서 찾았을 때 나는 기쁨을 금할 수 없었다. 민족이 다르다고 정까지도 달라지겠는가. 사람의 정은 피부와 언어와 신앙의 장벽을 모른다. 만일 육문중학교 교정이 가까이에 있다면 나는 그 교정에 만발하는 정향나무 꽃잎 들을 한줌 가득 뜯어주며 《이것이 너희들의 아버지가 사랑하시던 꽃이다. 상월선생과 나는 이 꽃나무 밑에서 자주 만났다》하고 말해 주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길림을 떠난 상월선생은 할빈, 상해, 베이징, 한구, 중경, 녕하, 연안 등지에서 당 사업과 교육사업, 문화사업, 문필사업에 헌신적으로 참가 하였다. 한때는 만주 성당위원회에서 비서장 으로도 사업 하였다고 한다.
그는 생애의 말년까지 나를 잊지 않았으며 중국의 친근한 린방인 나의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국제주의적 감정에 충실 하였다. 상월선생의 유해는 지금 베이징의 팔보산렬사릉에 안장 되여있다.
사람에게 한 생을 두고 회고할 수 있는 스승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행복한 인간이다. 그러니 나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청춘시절에 지울 수 없는 자국을 새긴 상월선생이 그리워질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육문중학교 교정을 거닐어보군 한다.
《세기와 더불어》1권 제3장 길림시절:
1. 선진사상의 탐구
1. 선진사상의 탐구
나는 집에서 한달가량 머무르다가 설까지 쇠고 이듬해 정월중순에 무송을 떠났다. 내가 길림에 도착한것은 행인들의 왕래가 번잡한 한낮이였다. 길을 물을 때마다 아버지친지들의 주소가 적혀있는 수첩을 꺼내들고 언손을 놀려가며 종이장을 번지는것이 거치장스러울것 같아서 나는 미리 내가 찾아야 할 거리와 번지들을 머리속에 다 외워두었다. 오랜 력사를 자랑하는 대도시의 번창한 풍경은 첫 순간부터 조용하고 한적한 농촌지대에서만 살아온 나를 위압하는상 싶었다.나는 개찰구를 나선 다음에도 가슴을 치미는 흥분때문에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나를 새 생활에로 부르는 신천지의 약동하는 모습을 오래동안 바라보았다. 그날 내가 본 도시의 풍경가운데서 가장 인상적인것은 거리에 물장사군들이 많은것이였다. 물의 도시로 이름나 한때는 선창이라고도 불렀다는 고장인데 음료수가 부족하여 저렇게 물장사만 성행해가니 길림이라는 도회지의 생활이 점점 각박해질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지나가는 행인들까지 짜증스럽게 투덜거리였다.물 한모금에도 수판알을 튀겨야 한다는 도시생활의 중압이 첫 걸음부터 심신에 육박해왔지만 나는 그 중압에 저항하는 심정으로 가슴을 쭉 펴고 활개를 치며 도심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갔다. 길림역에서 북산방향으로 뻗은 차루가를 따라 얼마쯤 걸어가니 도시를 성내와 성외로 구분하는 성벽이 보이고 조양문이라는 현판이 달려있는 성문이 보이였다.조양문 가까이에는 신개문이라는 성문이 있었다. 길림에는 조양문과 신개문외에도 파호문, 림강문, 복수문, 덕승문, 북극문을 비롯하여 모두 10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그 매 성문을 장작상군대가 지키고있었다. 풍화작용으로 군데군데 허물어진 길림의 고색창연한 성벽은 이 도시가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는 성시라는 느낌을 주었다.길림은 처음 와보는 생소한 고장이였으나 별로 낯이 설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와보고싶던곳이고 아버지의 친구들이 많은곳이여서 그랬는지 모른다. 나의 수첩에는 내가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 할 아버지의 친구들과 친지들의 주소가 십여개나 적혀있었다. 오동진, 장철호, 손정도, 김사헌, 현묵관(현익철), 고원암, 박기백, 황백하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길림에 있는 아버지의 친구들이였으며 내가 만나보아야 할 사람들이였다.나는 의례방문의 첫 순서로 오동진을 선정하고 차루가와 상부가사이에 있는 그의 집부터 찾아갔다. 사실 그때 나의 마음은 은근히 긴장되여있었다. 아버지의 친구 들이 모처럼 주선해준 화성의숙을 중퇴한것때문에 오사령이 못마땅해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오동진은 이전과 다름없이 나를 반갑게 대해주었다. 내가 화성의숙을 그만두고 길림으로 온 사연을 말했더니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심중한 표정으로 머리만 끄덕이였다.《소문도 없이 길림에 불쑥 나타난 너를 보니 너의 아버지생각이 떠오르는구나. 아버지도 숭실중학교를 그렇게 갑자기 중퇴하셨더랬지. 나는 그때 그 소식을 듣고 여간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퍽 이후에는 아버지가 결심을 옳게 하셨다고 생각하였다. 아무튼 여섯달만에 의숙을 포기하고 길림으로 온 그 결단성이 놀랍다. 길림이 리상에 맞는 고장이라면 여기서 너의 우물을 파거라.》나의 길림행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날 오동진이 한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역시 오동진다운 활달한 사고방식이라는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길림에 와서 공부하게 된바에는 이번 걸음에 어머니와 동생까지 데리고 솔가이주하여 여기다 살림을 펼걸 그랬다고 하면서 서운해하였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왔을 때에도 오동진은 우리 어머니에게 김선생의 친구들이 많은 길림으로 이사하라고 여러번 권하였다.어머니는 그 권고를 고맙게 여기면서도 무송에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양지촌에 산소가 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어떻게 길림으로 훌쩍 이사를 가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날 오동진은 자기의 수하에서 서기로 일하는 최일천을 나에게 소개해주었다 오동진이 서기자랑을 많이 하였기때문에 최일천에 대해서는 나도 일정한 예비지식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정의부내에서 문장가로 이름난 사람이였다. 이날의 상봉을 계기로 하여 나와 최일천은 그후 특별한 동지적뉴대로 이어지게 되였다.그날 오후 오동진은 나를 삼풍잔에 데리고 가서 독립운동자들에게 인사시키였다. 그 독립운동자들속에 김시우가 소개신을 써주면서 만나라고 하던 김사헌도 있고 정의부 경호대장으로 활동하는 장철호도 있었다. 삼풍잔이란 삼풍려관이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려관을 《잔》이라고도 한다. 김사헌과 장철호외에도 이 려관에는 이름모를 독립운동자들이 많이 와있었다.삼풍려관은 태풍합정미소와 함께 길림에서 독립운동자들이 숙박소 겸 련락장소로 리용하는 2대거점이였다. 조선에서 들어오는 이주민들도 삼풍려관을 많이 리용하였다. 이 려관주인은 손정도목사의 동향인이였다. 그는 평안남도 증산에서 살다가 손목사의 권유로 길림에 들어와 삼풍려관을 운영하였다. 간판은 려관이지만 기숙사나 공회당과 같은 인상을 더 주는 그런 집이였다.삼풍려관에서 일본령사관까지의 거리가 100메터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길림지방 정탐활동의 총본영이라고도 할수 있는 일본령사관의 문전이나 다름없는 려관에 밀정들과 경찰들이 그처럼 촉수를 늘이고 찾지 못해 애를 쓰는 반일독립운동자들이 무시로 찾아드는것은 재미없을것 같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자들은 《등잔밑이 어둡다.》고 하면서 그 려관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실지로 삼풍려관에서 애국자들이 붙잡혀 가는 불상사는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도 조직들을 내온 다음에는 이 려관을 자주 리용하였다.김사헌은 김시우의 소개신을 보고나서 나에게 자기가 잘 알고있는 김강이란 조선사람이 길림육문중학교에서 교원을 하는데 그 학교에 들어가는것이 어떤가고 물었다. 시내의 신흥사회계에서 세운 사립학교인데 길림에서는 그중 경향성이 좋다는것이였다. 길림육문중학교가 경향성이 좋은 학교라는것은 사회계에 널리 알려져있었다. 그것은 《길장일보》가 이 학교에 대한 보도를 여러번 하였기 때문이였다. 《길장일보》는 벌써 1921년에 육문중학교를 경영은 참담하나 성적이 매우 훌륭하여 사회 각계의 찬조를 받는 학교라고 소개하였다.자금문제와 교장의 직권람용문제를 둘러싼 분쟁으로 육문중학교에서는 교장이 자주 교체되였는데 내가 길림에 도착한 그 당시에는 남경금릉대학출신인 장음헌을 대신하여 리광한이 교장으로 부임된지 얼마 안된다고 하였다. 교장을 네번이나 갈아치운것만 보아도 육문중학교가 정의와 법도를 얼마나 중시하는 학원인가 하는것을 알수 있었다. 육문중학교의 이 혁신적인 교풍이 나의 마음을 끌어 당기 였다.김사헌은 다음날 나를 육문중학교의 김강선생한테 소개해주었다. 김강은 영어를 잘하였다. 나는 그의 안내로 리광한교장을 만났다. 리광한은 중국민족주의좌파에 속한 사람으로서 주은래총리의 중학시절동창이였고 어려서부터 주총리의 영향을 받은 량심적인 지식인이였다. 내가 주총리와 리광한교장의 연고관계를 알게 된것은 수십년의 세월이 지난 뒤였다.언젠가 나는 우리 나라를 방문한 주은래총리를 만나 청년시절을 회고하면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 중국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리광한교장의 이름을 들었다. 주총리는 그 말을 듣자 여간만 반가와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천진에서 남개대학부속 중학교에 다닐 때 그와 같이 공부하였다고 하였다.리광한교장은 그날 나에게 학교를 졸업하면 장차 어떤 일을 할 생각인가고 물었다. 내가 나라를 찾는 일에 한몸 바치고싶다고 서슴없이 대답했더니 그는 아주 좋은 포부라고 긍정해주었다. 흉금을 터친 담화의 덕이라고 할지 리광한교장은 1학년을 거치지 않고 2학년에서 공부하게 해달라는 나의 요구도 쾌히 들어주었다.청년학생운동과 지하활동을 하던 시기 나는 이 선생한테서 여러번 도움을 받았다. 그는 내가 혁명사업때문에 자주 결석한다는것을 알면서도 눈을 감아주었으며 군벌당국에 매수된 반동교원들이 함부로 나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이모저모로 보호해주었다. 군벌이나 령사관경찰들이 나를 붙잡으러 올 때면 미리 련락하여 울타리밖으로 빼돌리기도 하였다. 교장이 량심적인 지식인이다보니 그밑에서 많은 사상가들이 발을 붙이고 일할수 있었다.내가 육문중학교에 입학하고 돌아오자 오동진부부는 나에게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기숙사에 들어가지 말고 자기네 집에서 다니라고 하였다. 사실 그때 내 처지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였다.나는 어머니의 뒤받침으로 공부를 해야 하였는데 우리 어머니는 병약한 몸이였다. 어머니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하루종일 쉬지 않고 삯빨래와 삯바느질로 품을 팔아서 한달에 3원 정도씩 나에게 보내주었다. 그 돈으로 월사금과 공책값, 교과서값을 대고나면 신 한컬레 사신기가 힘든 형편이였다.이런 처지에서 나는 아버지의 친구들의 권고와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길림에 가서 처음에는 오동진의 집에 있으면서 학교에 다니였고 그가 체포된 다음에는 장철호의 집에 한 1년, 현묵관네 집에도 몇달 그리고 오동진의 후임으로 정의부의 사령을 하던 리웅의 집에도 얼마간 가있었다.당시 길림에 있던 명사들이 대체로 아버지하고 친분이 깊은 사람들이여서 여러모로 나를 돌봐주고 사랑해주었다. 나는 아버지의 친우들의 집에 자주 드나드는 과정에 독립군간부들과 독립운동지도자들을 많이 알게 되였으며 길림에 드나들던 각양각색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게 되였다.그 당시 정의부간부들은 거의다 길림에 상주하고있었다. 정의부는 행정, 재무, 사법, 군무, 학무, 외교, 검찰, 검독 등 어마어마한 중앙기구와 지방기관까지 꾸려놓고 관할구역의 조선동포들한테서 세금까지 받아내면서 한개 독립국가와 맞먹는 행세를 하였다. 이 방대한 기구를 보호하기 위해 정의부는 150여명의 군인들로 조직된 상비적인 중앙호위대까지 가지고있었다.길림은 중국의 한개 성소재지로서 봉천, 장춘, 할빈과 더불어 만주지방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의 하나였다. 길림독군서에서는 장작림의 4촌동생 장작상이 우두머리노릇을 하였는데 그는 일본사람들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일본사람들이 누가 공산당원이고 누가 나쁜 사람이라고 고소하여도 그는 당신들은 상관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그들의 요구를 거절해버리군하였다.그가 이렇게 한것은 그에게 무슨 정치적견해가 있어서라기보다도 무식하고 자존심이 강하였기때문이였다. 그의 이러한 특징이 혁명가들과 사회운동자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었다. 만주지방으로 이주해온 조선사람들의 대부분이 또한 이 길림성에서 살고있었다.이러한 사정으로 하여 일본군경들에게 쫓겨다니는 조선독립운동자들과 공산주의자 들이 길림에 많이 모여들게 되였다. 그래서 이 도시는 자연히 조선사람들의 정치 활동무대로 되였으며 그 중심지를 이루게 되였다. 《동 3성에서의 배일의 책원 지는 길림》이라고 한 일본사람들의 평가가 우연한것이 아니였다.길림은 1920년대 후반기 만주에서 조선민족주의운동의 기본세력이였던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수뇌들의 집결처로 되여있었다. 독립운동자들이 신문을 발간하고 학교를 세우는 일은 화전, 흥경, 룡정 같은데서 많이 하였지만 실지 그 수뇌들이 모여 활동한곳은 길림이였다.엠엘파, 화요파, 서상파와 같은 종파분자들이 제각기 자기파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돌아치던곳도 바로 길림이였다. 공산주의운동자들가운데서도 제노라고 하는 명물들은 거의다 이 길림에 드나들었다.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종파분자, 망명자 등 별의별 사람들이 다 여기로 모여들었다.새것을 지향하고 진리를 찾아 모대기는 청년학생들도 이 성시로 찾아왔다. 한마디로 말하여 길림은 형형색색의 사상조류가 집결된곳이라고 할수 있었다. 여기에서 내가 공산주의기치를 들고 혁명활동을 벌렸다. 내가 길림에 왔을 때 《ㅌ. ㄷ》의 몇몇 성원들은 화전에서 약속한대로 이 도시에 와서 문광중학교를 비롯한 시내 학교들과 기관구, 선창 등에 적을 붙이고있었다.그들은 내가 길림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기 바쁘게 오동진사령의 집으로 뛰여왔다. 《돈이 귀하고 마실 물이 귀하고 땔것이 귀하지만 책이 많아서 좋다.》는것이 그들의 길림인상이였다. 나는 책이 많으면 배고픈 고생과도 타협할수 있다고 롱을 하였다. 이것은 나의 진정이기도 하였다.그들도 육문중학교에 대해서는 좋은 인상을 가지고있었다. 교직원들중에 국민당 우파도 있지만 절대다수의 교원들은 공산당계렬이 아니면 삼민주의의 숭배자 들이라는것이였다. 그런 말을 들으니 마음이 놓이였다.후에 판명된데 의하면 상월선생도 공산당원이였고 마준선생도 공산당원이였다고 한다. 우리는 새로운 고장에서 혁명의 진리를 마음껏 배우며 《ㅌ. ㄷ》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 바쳐 싸워나가자고 결의하였다. 화전에 남아있던 《ㅌ. ㄷ》의 성원들도 활동무대를 찾아 무송현, 반석현, 흥경현, 류하현, 안도현, 장춘현, 이통현 등 만주일대의 조선인거주지역들로 떠나갔다. 그들가운데는 출신중대에 돌아가 다시 독립군의 모자를 쓴 동무들도 있었다.길림과 같이 복잡한 도시에서 얼마 되지 않는 핵심들을 가지고 만사람이 우리의 목소리를 귀담아듣게 하며 《ㅌ. ㄷ》의 리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싸운다는것은 헐한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가 한점의 불씨가 되여 주변의 열사람, 백사람을 불러일으키고 그 백사람이 다시 천사람, 만사람의 심장을 달구어 세계를 변혁할 굳은 결심에 차넘치고있었다.길림에서의 나의 활동은 맑스ㅡ레닌주의를 더 깊이 연구하는것으로부터 시작되였다. 나는 길림으로 올 때 화전에서 시작한 맑스ㅡ레닌주의에 대한 탐구를 본격적으로 더 깊이 해보자고 결심하였다. 길림의 사회정치적분위기는 새 사조를 깊이 파고들려는 나의 결심을 부채질해주었다. 나는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보다도 맑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의 저작들을 탐독하는데 더 열중하였다.당시의 중국은 대혁명시기여서 쏘련이나 일본에서 발간되는 좋은 책들을 많이 번역출판하였다. 베이징에서는 《번역월간》이라는 잡지도 찍어냈는데 거기에 청년학생들의 흥미를 끄는 진보적인 문학작품들이 자주 실리였다. 무송이나 화전에서 볼수 없었던 책도 길림에서는 얼마든지 구할수 있었다. 그런데 나한테는 책을 살만한 돈이 없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면 믿기 어렵겠지만 그때 나는 운동화도 학교에 갈 때에만 신고 집에 와서는 거의 맨발로 다니였다.그때 우마항거리의 도서관에서는 한달에 열람료를 10전씩 받았는데 나는 그 열람권을 달마다 떼가지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도서관에 들려 몇시간씩 책과 신문을 읽군하였다. 그러면 적은 돈을 가지고서도 여러가지 출판물들을 볼수 있었다.책방에 좋은 책이 들어온것을 보면서도 돈이 없어 못살때에는 부자집학생들을 부추겨 사게 하고 그들이 사온 다음 그 책들을 빌려다보군하였다. 돈많은 집 자식들가운데는 읽지는 않으면서도 멋을 부리기 위하여 책을 사다가 장식용으로 꽂아두는 학생들이 있었다.그 시기 육문중학교에서는 학교관리를 민주주의적으로 하였다. 도서주임도 반년에 한번씩 학생총회에서 선출하였다. 선출된 도서주임은 학교도서관운영계획을 세우고 책을 사들일 권한을 가지였다. 나는 육문중학교시절에 두번이나 도서주임으로 선거되였다. 그 기회를 리용하여 맑스ㅡ레닌주의서적들을 많이 사들이였다.책이 많고보니 시간이 모자라는것이 문제였다. 나는 독서시간을 1분1초라도 더 얻어내기 위하여 애를 쓰면서 차례진 시간안에 하나라도 더 많은 책을 읽고 그 본질을 깊이 알기 위하여 노력하였다.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어려서부터 책을 읽게 하고는 그 책에서 중심이 무엇이며 배운 점은 무엇인가 하는것을 꼭꼭 쓰는 습관을 키워주었다. 아버지가 키워준 이 습관이 크게 은을 내였다. 중심을 잡아쥐면서 책을 정독하게 되면 아무리 복잡하게 뒤엉킨 내용도 명확히 파악할수 있고 짧은 시간안에 많은 책들을 볼수 있다.내가 중학시절에 밤을 새우며 책을 본것은 단순한 학구적취미나 탐구심때문만이 아니였다. 나는 학자가 되고 그 무슨 출세의 길을 톺으려고 책을 파고든것이 아니였다. 어떻게 하면 일제를 물리치고 나라를 찾겠는가? 어떻게 하면 사회의 불평등을 없애고 근로하는 인민들을 잘 살게 하겠는가? 내가 책에서 찾고싶었던것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였다. 어디서 무슨 책을 보건 나는 항상 이 해답을 찾으려고 하였다.
맑스ㅡ레닌주의를 교조로가 아니라 실천의 무기로 대하게 되고 진리의 기준을 추상적인 리론에서가 아니라 항상 조선혁명이라는 구체적인 실천에서 찾으려는 나의 립장은 이런 과정을 통하여 싹텄다고 할수 있다. 나는 이 시기 《공산당선언》, 《자본론》, 《국가와 혁명》, 《임금로동과 자본》을 비롯한 맑스ㅡ레닌주의고전들과 그를 해설한 도서들을 손에 잡히는대로 읽었다.정치서적들과 함께 혁명적인 문학작품들도 많이 읽었다. 내가 그때 제일 흥미를 가지고 읽은것은 고리끼와 로신의 작품들이였다. 무송이나 팔도구에 있을 때는 《춘향전》, 《심청전》, 《리순신전》, 《서유기》와 같이 옛날생활을 담은 책들을 많이 읽었다면 길림에 와서부터는 《어머니》, 《철의 흐름》, 《축복》, 《아큐 정전》, 《압록강가에서》, 《소년방랑자》와 같은 혁명적인 소설들과 당시 의 현실생활을 담은 진보적인 소설들을 많이 읽었다.후날 항일무장투쟁을 하면서 고난의 행군과 같은 어려운 시련에 부닥쳤을 때에도 나는 길림시절에 본 《철의 흐름》과 같은 혁명적인 소설들의 내용을 회상하면서 힘과 용기를 얻군하였다. 문학작품은 사람들의 세계관형성에서 중요한 작용을 한다. 그래서 나는 작가들을 만날 때마다 혁명적인 소설들을 많이 써내라고 말하군한다. 지금은 우리 작가들도 혁명적인 대작들을 많이 써내고있다.우리는 당시의 불합리한 사회현상과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처지를 직접 목격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정치적으로 각성되였다. 그때 조선에서 만주로 들어오는 이주민들가운데는 길림을 경유하여 다른 고장으로 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국내의 참상을 수시로 청취하였다.압록강을 건너온 이주민들은 단동을 거쳐 남만철도로 장춘에까지 와가지고는 거기에서 동지철도를 리용하여 북만쪽으로 가든가, 길장선을 타고 길림을 경유하여 그 근방의 오지로 들어가기도 하고 봉천으로부터 봉해선, 길회선을 거쳐 돈화, 액목, 녕안 방면으로 가기도 하였다.추운 겨울철과 이른 봄철이면 길림역과 려관들에서 조선이주민들을 많이 볼수 있었다. 이런 이주민들가운데는 별의별 곡절을 겪은 사람들이 다 있었다. 어느날 나는 동무들과 함께 극장에 《창시》구경을 갔다. 공연이 끝난 다음 《창시》를 하던 녀배우가 우리한테로 찾아와 자기 애인의 이름을 대면서 최 아무개라는 사람이 혹시 여기에 살지 않는가고 물었다. 그 녀배우가 조선말을 하는 바람에 우리는 모두 놀랐다. 조선에서는 《창시》라는것을 하지 않기 때문이였다.옥분이라는 그 녀배우는 경상도녀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어느날 뒤집에 있는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너의 처가 아들을 낳으면 내 사위로 삼고 우리 처가 딸을 낳으면 네 며느리로 주마, 만약 다같이 아들이나 딸을 낳으면 결의형제를 맺어주자고 약속하였다.얼마후 한집에서는 아들이 태여나고 다른 한집에서는 딸이 태여났다. 두집에서는 자식들을 서로 결혼시켰다는 표적으로 명주수건 하나를 둘로 갈라 각각 반쪽씩 나누어가지였다. 그후 두집은 살길을 찾아 제가끔 고향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아들을 본 집에서는 길림에 와 살았는데 그 아들이 커서 문광중학교에 다니였다.그 집에서는 그래도 길림에 온 다음 집도 한채 얻고 자그마한 정미소도 하나 차려놓고 어렵지 않게 살았다. 그런데 녀자를 낳은 집에서는 단동까지 와서 려비가 떨어져 중국사람한테 어린 딸을 팔게 되였다. 옥분이는 매를 맞으며 《창시》를 배워가지고 배우가 되였는데 나이가 들면서부터 고향에서 살 때 결정해놓았다는 그 남자를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새 고장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조선사람들을 몰래 찾아다니며 그 남자의 행처를 탐문하군하였다.그날 옥분이란 그 녀배우는 문광중학교에 다니는 남편되는 사람과 극적인 상봉을 하였다. 옥분이가 《창시》를 그만두고 남편한테 떨어지겠다고 하자 그를 데리고 다니던 흥행단 주인녀자는 굉장한 돈을 내라고 하였다. 그래서 옥분이는 자기 몫으로 나오는 돈을 몇해동안 모아서 몸값을 물어주고 길림으로 돌아오겠다고 하였다. 그때 이런 사연을 목격하면서 우리의 가슴에 피가 맺히고 분노가 생기였다. 학생들은 돈만 알고 인정을 모르는 흥행단 주인녀자를 《뱀같은 녀자》라고 욕질하였다.수십만의 인생이 한데 모여 생존경쟁으로 비지땀을 흘리며 돌아가는 대도시의 생활은 계급사회가 내뿜는 악취를 감추지 못하였다. 뙤약볕이 내려쬐는 어느 여름날 동무들과 함께 북산에 갔다오던 나는 길가에서 인력거군이 부자와 다투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였다.인력거를 타고 온 부자가 인력거군한테 돈을 적게 준 모양이였다. 인력거군이 부자에게 지금은 《삼민주의》시대인데 《민생》문제를 좀 돌봐주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면서 몇푼만 더 달라고 빌었다. 부자는 돈을 더 줄 대신에 도리여 《삼민주의》만 알고 《오권헌법》은 모르는가고 하며 단장을 들어 인력거군을 때리였다.분격한 우리 학생들은 부자놈에게 달려들어 돈을 더 주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이런 체험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에 왜 인력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고 인력거를 끌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열두대문이 달린 으리으리한 집에서 호강을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거지가 되여 거리를 헤매야 하는가 하는 의문과 불만을 가지게 되였다.혁명적세계관은 사람들이 자기의 계급적처지와 리해관계를 인식하는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착취계급을 증오하고 자기 계급의 리해관계를 옹호하는 사상을 가지며 나아가서는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각오를 가지고 혁명의 길에 나서게 되였을 때 형성된다고 볼수 있다.나도 맑스ㅡ레닌주의고전을 비롯한 혁명적인 책들을 보고 계급적처지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다음에는 사회현상을 보고 불평등이 많다는것을 알게 되였으며 착취 계급과 착취사회를 증오하는 사상이 자라서 결국 세계를 개조하고 변혁 해야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투쟁의 길에 나서게 되였다.맑스와 레닌의 저서들을 널리 탐독하고 거기에 깊이 심취될수록 나는 그 혁명학설을 청년학생들속에 한시바삐 보급해야겠다는 충동을 가지게 되였다. 육문 중학교에서 내가 처음으로 사귄 동무는 권태석이라는 조선학생이였다. 초기에는 육문중학교에 조선학생이 모두 네명 있었는데 공산주의청년운동에 마음을 둔것은 권태석이와 나뿐이였고 그 나머지는 정치운동에 무관심했다. 그저 돈만 알고 졸업한 다음 장사나 해먹을 궁리만 하였다.나와 권태석은 지향도 비슷하고 사회를 보는 눈도 비슷해서 처음부터 서로 배짱이 맞았다. 중국학생들가운데서는 장신민이라는 청년이 나하고 가까웠다. 그 사람이 늘 나와 같이 다니면서 정치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의견을 많이 나누었다. 사회의 불평등으로부터 시작하여 제국주의의 반동성과 일제의 만주침략기도, 국민당의 반역적죄행에 대한것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화제는 다양하였다.그때까지만 해도 길림에서는 맑스ㅡ레닌주의가 청년학생들속에서 동경의 대상 으로만 되여있었다. 맑스가 대단한 사람이라니까 어떤 인물인지 좀 보자는 식으로 고전을 뒤적거리거나 맑스주의가 어떤것인지 모르면 추세에 뒤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정도였다.나는 화전에서 얻은 경험을 참작하여 뜻이 통하는 몇몇 동무들로 먼저 육문 중학교안에 비밀독서조를 조직하였다. 비밀독서조는 진보적인 청년학생들을 맑스 ㅡ레닌주의사상과 리론으로 튼튼히 무장시키는것을 사명과 목적으로 하였다. 이 조직은 매우 빠르게 자라서 얼마후에는 문광중학교와 제1중학교, 제5중학교, 녀자중학교, 사범학교를 비롯한 길림시내의 여러 학교들에 확대되였다.독서조성원들의 대렬이 늘어남에 따라 우리는 독립운동자들이 경영하는 정미소의 방 한칸을 얻어가지고 류길학우회 성원들을 내세워 자체로 도서실을 운영하였다. 지금은 어디에 가나 도서관이 있고 마음만 먹으면 인민대학습당과 같은 큰 도서관도 궁전같이 세우지만 사실 그때 맨주먹밖에 없는 우리 힘으로 도서실을 꾸린다는것이 쉬운 일이 아니였다.책도 사오고 서가도 매고 책걸상도 갖추어놓아야 하겠는데 우리에게는 돈이 없었다. 그래서 일요일마다 철도공사장에 가서 침목을 메나르거나 강가에서 자갈을 져나르는것 같은 삯일을 하였다. 녀학생들도 정미소에 가서 쌀의 뉘를 골랐다. 이렇게 한푼두푼 힘들게 번 돈으로 책을 사들였다.혁명적인 책들을 따로 보관할수 있는 비밀서가까지 갖추어 도서실을 꾸려놓은 다음 간단하면서도 구수하게 책소개를 써서 시내의 여러곳에 붙여놓았다. 그러자 학생들은 앞을 다투어 우리의 도서실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그때 학생들을 끌기 위하여 도서실에 련애소설도 가져다놓았다.청년들은 련애소설들을 읽는 멋에 도서실출입을 많이 하였다. 그런 식으로 책에 맛을 붙이게 해놓고는 사회과학책을 조금씩 주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사회과학 책들을 보면서 점차 각성되면 그때에는 비밀서고에서 맑스ㅡ레닌 주의 고전들과 혁명적인 소설책들을 꺼내주군하였다.우리는 그때 청년학생들에게 《재생》, 《무정》, 《개척자》와 같은 리광수의 소설책도 주었다. 리광수가 3.1운동전야에 일본 도꾜에서 《2.8독립선언서》도 작성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진보적인 작품도 많이 썼기때문에 청년들이 그의 소설을 즐겨 읽었다. 그러나 후에는 변절하여 교양적가치가 있는 작품을 쓰지 못하였으며 나중에는 《혁명가의 안해》와 같은 반동적인 작품까지 써냈다.나는 항일유격대를 창건한 다음 부대를 인솔하고 남만으로 가다가 무송에 잠간 들린 기회에 그 소설을 읽어보았다. 소설 《혁명가의 안해》는 한 공산주의자가 병치료를 하고있을 때 그의 안해가 남편의 병치료를 해주러 다니는 의학전문학교 학생과 치정관계를 맺는 추잡한 생활을 그린 작품으로서 공산주의자들을 모독하고 공산주의운동을 헐뜯는 사상으로 일관되여있었다.토요일과 일요일이면 우리는 길림례배당이나 북산공원 같은데 모여 독서발표모임을 자주 하였다. 처음에는 더러 련애소설내용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러나 듣는 학생들이 그따위 시시껄렁한 이야기는 집어치우라고 들이대군하였다. 이렇게 한번 망신을 당하면 련애소설에 빠졌던 학생들도 스스로 혁명적인 소설책들을 보게 되였다.우리는 청년학생들과 대중들에게 혁명사상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당수》라는 방법도 리용하였다. 어느날 나는 목이 아파서 찜질을 하느라고 수업에 참가하지 못한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북산에 들렸더니 소경주위에 숱한 사람들이 모여앉아 이야기를 듣고있었다.가까이 다가가보니 소경이 넉두리 같은것을 해가며 《삼국지》의 한대목을 뜬금으로 엮어대고있었다. 그는 제갈량이 꾀를 써서 적진을 일격에 무찌르고 들어가는 장면 같은데서는 북까지 치면서 흥을 돋구었다. 그러다가 재미나는 대목에 이르러 이야기를 뚝 그치고는 구경하는 사람들한테 돈을 내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때 중국사람들은 이런것을 《당수》라고 하였는데 군중을 끄는데서는 좋은 방법이였다.그후부터 우리도 이런 식으로 혁명사상을 보급하였다. 우리 동무들가운데 우스개도 잘하고 말주변도 좋은 걸작이 한명 있었다. 우리한테서 과업을 받아가지고 종교인들과의 사업을 하던 동무였는데 기도를 드리고 성경책을 외우는것을 보면 목사들보다 나았다. 그 동무에게 《당수》를 해보라고 과업을 주었더니 성경책을 외울 때보다 더 잘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마실방이나 공원 같은데 가서 내용이 좋은 소설들을 뜬금으로 구수하게 엮어서 매번 호평을 받았다.소경은 《당수》를 하고 돈을 받았지만 그는 돈을 받지 않았다. 그대신 재미나는 대목에 가서 끊고는 한바탕 선동연설을 한 다음 래일 어느 시간에 다음대목을 또 들어보라고 하였다. 그러면 다음날 사람들이 소설을 마저 들으려고 약속된 장소에 모이군하였다.그때 책을 통하여 사귄 사람들중에 인상깊은 사람은 박소심이다. 길림의 번화한 거리에는 《신문서사》라는 큰 책방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한주일에도 몇차례씩 그 책방에 들리군하였다. 그 책방에 박소심도 단골손님으로 다니였다. 그는 매번 사회과학서적을 팔아주는 매대앞에서 무슨 책이 들어왔는가를 알아보려고 한참씩 서성거리군하였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매대앞에서 마주치는 때가 많았다. 몸은 강말랐으나 키가 후리후리하고 지성미가 있는 사람이였다.내가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학생도서관에 넣을 책을 한아름씩 사갈 때면 그는 자기 책이나 고르는것처럼 흐뭇해하면서 어느 책은 어떻고 어느 책은 꼭 볼 필요가 있으니 사가는것이 좋다는 식으로 조언을 주군하였다. 이렇게 책이 인연이 되여 나는 박소심과 친하게 되였다. 내가 동대탄에서 학교를 다닐 때 그는 한동안 내가 거처하는 숙소에 와서 같이 생활하였다.박소심은 서울에서 살다가 들어온 사람이였다. 몸이 약해서 공산주의운동 같은것은 하려고 하지 않고 신문과 잡지들에 짤막한 글들을 써내군하였다. 그가 쓴 글이 아마 《해조신문》이나 《조선지광》같은데 나갔을것이다. 운동에는 크게 관계하지 않고있었지만 종파분자들에 대해서는 몹시 경멸하였다. 박소심이 대가 있고 식견이 높은 사람이기때문에 길림에 드나드는 운동자들은 제가끔씩 그를 쟁취해보려고 하였다.박소심은 일본어로 번역된 《자본론》을 밤을 새워가며 읽군 했다. 돈이 떨어지면 입은 옷을 저당 잡히면서라도 책을 사다 보는 지독한 독서가였다. 그는 통속입문서 몇권을 읽고 맑스ㅡ레닌주의리론가로 으시대는 행세군이 아니라 맑스나 레닌의 주요 저작들을 거의 통달하다싶이 한 사람이였다.박소심은 나에게 《자본론》을 안내해 주고 그것을 해설해준 잊지 못할 선생이였다. 맑스의 저작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자본론》에도 난해한 대목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박소심이 우리에게 《자본론》에 대한 해설강의를 해주었다. 고전을 파악하는데서는 역시 입문서나 안내자가 필요하였다. 박소심은 그 안내자의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하였다. 그는 참으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있었다.한번은 내가 프로레타리아독재에 관한 맑스ㅡ레닌주의고전가들의 명제에 대하여 그에게 물은적이 있다. 박소심은 맑스ㅡ레닌주의고전가들이 력사발전의 여러 단계 에서 프로레타리아독재에 대하여 각이한 측면으로 해석한 명제들을 한참이나 뜬금 으로 쭈르르 외우는것이였다. 리론이나 지식으로 보면 그야말로 맑스주의 대가라고 불리울만한 사람이였다. 그런데 그런 박소심이한테도 모르는것이 있고 막히는데가 있었다.내가 맑스ㅡ레닌주의고전들에서는 로동계급의 계급적해방이 선차이고 민족적해방이 후차라고 했지만 우리 나라는 우선 일제의 기반에서 벗어나야 로동자, 농민이 계급적으로도 해방될수 있지 않는가고 물은적이 있었다. 이것은 그 당시 우리 동무들속에서 많이 론의되고있던 문제였다.당시까지만 해도 맑스ㅡ레닌주의고전들에는 로동계급의 계급적해방과 민족적해방의 호상관계에 대한 리론적해명이 적었다. 식민지나라들에서의 민족해방투쟁에 대해서는 과학적해명을 기다리는 문제가 많았다. 박소심은 나의 질문에 어정쩡한 대답을 하였다.나는 맑스ㅡ레닌주의고전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종주국에서의 혁명과 식민지 나라들 에서의 혁명이 유기적으로 련결되여있다고 하면서 종주국에서의 혁명승리가 가지는 의의만을 강조하고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나라 경우에는 일본로동계급이 혁명에서 승리해야 나라가 독립될수 있단 말이 아닌가, 우리는 그들이 승리할 때까지 가만히 앉아있어야 한단 말인가고 또 물었다.박소심도 그 질문에는 대답이 막히였다. 그는 놀란 눈으로 한참 나를 바라보았다. 박소심은 고전에 씌여있는것처럼 로동계급의 계급적해방을 민족적해방에 앞세우고 종주국로동계급의 투쟁을 식민지나라에서의 민족해방투쟁보다 중시하는것은 세계적으로 공인된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로선상의 문제라고 하였다.내가 납득이 잘 안되여 머리를 기웃거리자 그는 그대로 안타까와서 자기는 맑스ㅡ 레닌주의를 학술상으로만 연구해왔을뿐이지 조선의 독립과 조선에서의 공산주의 건설이라는 구체적인 혁명실천과 결부시켜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고백 하였다.나는 그 말을 듣자 어쩐지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과 같이 실천과 유리되여 학문상으로만 공산주의학설을 연구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때 나와 우리 동무들이 맑스ㅡ레닌주의선진사상을 연구하면서 느낀 제일 큰 고충은 우리도 로씨야사람들처럼 혁명을 통해 사회를 변혁하고 나라를 해방해야겠는데 조선의 형편과 10월혁명이 일어나던 로씨야의 형편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였다.락후한 반봉건국가인 조선과 같은 식민지나라에서 무산혁명을 어떻게 하겠는가, 일제의 가혹한 탄압때문에 자기 조국을 떠나 중국땅에서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조건에서 중국을 비롯한 이웃나라 혁명과 어떻게 련계를 취하며 조선혁명앞에 지닌 민족적임무와 세계혁명앞에 지닌 국제적의무를 어떻게 수행하겠는가 하는 복잡한 문제들이 제기되였다.우리가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옳은 대답을 찾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려야 했고 또 값비싼 대가를 치르어야 했다. 박소심은 맑스ㅡ레닌주의탐구의 나날에 나와 인간적으로 가까와졌고 우리의 혁명적지향에 깊이 끌려들었다. 그는 반제청년 동맹과 공청에도 가입하였으며 우리와 함께 청소년들을 교양하고 계몽하는 사업 에도 헌신적으로 참가하였다. 책속에만 파묻혀있던 사람이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실천무대에 뛰여드니 그 정열이 대단하였다그후 우리는 페병치료때문에 그를 카륜지방에 보냈다. 박소심은 쟈쟈툰에서 5리가량 떨어져있는 무개하기슭에 초막을 짓고 제 손으로 밥을 지어먹으면서 외롭게 지내고있었다. 나는 카륜과 오가자일대에서 활동할 때 시간을 내여 그를 찾아갔던 일이 있었다. 나를 보자 박소심은 여간 반가와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동안의 회포를 나누면서 많은 문제를 토론했다.그때 박소심은 처음으로 나에게 안해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안해가 죽었거나 리혼한줄로 알고있었던 나는 놀랐다. 사진만 보고서도 그의 안해가 매우 아름답고 교양있는 신식녀성이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박소심은 서울에 있는 그 안해가 얼마 전에 편지를 보내왔더라고 하였다. 왜 안해를 데려오지 않는가고 물었더니 자기 처는 부자집 딸이라고 하였다.나는 그의 대답을 듣고 그러면 부자집 딸이라는것을 모르고 결혼했는가고 물었다.박소심은 한숨을 쉬면서 결혼을 한후에 자기의 세계관이 달라졌다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이 너무도 괴이하게 들려 정말 안해를 완전히 잊어버렸는가고 다시 물었다.박소심은 지금까지 잊어버렸다고 생각해왔는데 요즘 편지를 받고보니 자주 생각이 난다고 솔직하게 말하였다.그래서 나는 안해를 사랑한다면 데려와야 한다고 진심으로 권했다. 자기 안해 하나 교양하지 못하면야 어떻게 낡은 세상을 뒤집어엎고 새 세계를 세우겠는가, 안해가 곁에 있으면 병치료에도 좋을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박소심은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도 한숨을 쉬였다.《내 성주동무 말이니 듣겠소. 하지만 내 인생은 이미 기울었소. 실패한 인생이란 말이요.》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후대들에게 넘겨줄 재산이나 정신적유산도 없었다. 자기는 맑스ㅡ레닌주의연구에 한생을 바쳐 로동계급의 리익에 이바지할수 있는 책을 꼭 쓰려고 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였다는것이였다. 살아 펄펄 뛰던 때는 진리를 몰라서 못썼고 진리를 깨닫고 보니 이제는 건강이 허락치 않는다고 한탄하였다.박소심의 말을 들으니 나도 안타까왔다. 박소심은 학문앞에 성실하고 꾸준하였으며 탐구력이 있었다. 책속에만 묻혀있지 않고 실천속에 좀더 일찍 뛰여들었다면 로동계급의 혁명위업수행에 이바지할수 있는 가치있는 리론도 찾았을것이고 실천적인 업적도 쌓았을것이다. 실천속에서 리론이 나오고 그 리론의 정당성도 실천을 통하여 검증된다.우리가 순간도 잊어서는 안될 실천은 조선의 독립이며 우리 인민의 행복이다. 아쉽게도 박소심은 이 진리를 깨닫기 바쁘게 우리곁을 떠나갔다. 박소심은 그후 서울에 있는 안해를 데려다가 병구완을 받으면서 마지막순간까지 소론문과 단상들을 기록하다가 카륜에서 숨이 졌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아침에 도리를 깨닫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고 했지만 박소심과 같이 많은 일을 할수 있는 사람이 진리를 깨닫기만 하고 가버린것은 분한 일이였다.나는 길림에서 3년 남짓한 세월을 보냈다. 내 일생에서 길림은 참으로 잊을수 없는 추억을 남긴 고장이라고 할수 있다. 이 길림에서 나는 과학적학설로서의 맑스ㅡ레닌주의를 리해하게 되였으며 그 학설의 도움으로 조선의 독립과 인민의 행복을 위한 실천적진리를 더 깊이 깨닫게 되였다.내가 새 사조의 진수를 빨리 깨달을수 있었다면 그것은 나라잃은 민족의 아들로 태여난 슬픔과 분노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당하는 참을수 없는 불행과 고통은 나를 일찌기 철들게 하였다. 나는 수난당하는 조국과 겨레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감수하였다. 그것이 나에게 커다란 민족적의무감을 짊어놓았다.길림시절에 나의 세계관이 확립되고 드팀없는것으로 굳어졌으며 그것이 내 한생의 사상정신적량식으로 되였다. 길림에서의 축적과 체험은 그후 나로 하여금 자주적인 혁명사상의 골격을 세울수 있게 하였다.학습은 혁명가가 자신을 수양하기 위해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기초적공정이며 사회의 진보와 변혁에 이바지할 밑천 을 마련하는데서 단 하루도 중단해서는 안되는 필수적정신로동이다. 선진사상 의 탐구과정을 통하여 길림시절에 터득한 교훈으로부터 나는 오늘도 혁명하는 사람 에게 있어서 학습은 첫째가는 임무라고 강조하고있다.
《세기와 더불어》1권 제2장 잊을수 없는 화전:
5. 독립군의 녀걸 리관린
5. 독립군의 녀걸 리관린
화성의숙을 중퇴하고 무송에 돌아와보니 이전처럼 집으로 찾아오는 독립운동자들이 많지 않았다. 밤낮으로 인적이 그치지 않던 지난날의 집안풍경에 대비하면 너무나 도 적막하고 쓸쓸하였다. 내가 무송에서 받은 인상들가운데서 지워지지 않는것은 리관린의 모습이였다. 리관린은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우리 집에서 지내고었었다.오동진이 그를 우리 집에 보내면서 관린은 김선생덕을 많이 입었는데 그 연고를 생각해서라도 무송에 가서 성주 어머니를 잘 도와드리라고 당부하였다는것이다. 리관린은 남만녀자교육련합회 사업을 하면서 우리 어머니를 동무해주고있었다.원래 리관린은 성격이 담차면서도 락천적인 녀자였다. 문무를 겸비한 녀자로서 리관린만큼 인물이 잘나고 기상이 도도하고 대담무쌍한 녀걸은 당시 조선에 없었을 것이다.봉건이 심해서 녀자들이 바깥출입을 해도 얼굴마저 가리우고 다니던 그때 남복차림 으로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리관린을 보면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딴세상 사람이라 도 구경하듯이 희한해서 쳐다보았다. 그런데 며칠 지내면서 보니 리관린은 이전보 다 별로 생기가 덜한것 같았다.내가 화성의숙을 그만두었다는것을 알게 되자 그는 몹시 놀라는것이였다. 생각이 있어도 마음대로 가지 못해 다들 안달아하는 군관학교를 단념해버렸으니 그럴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의숙을 중퇴하게 된 리유와 전말을 듣고서는 용단을 잘 내렸 다고 하면서 길림으로 가려는 나의 결심을 지지해주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쓸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민족주의계렬의 학교를 부정하고 사상적으로 결별해버린 나의 행동이 그에게 충격 을 준 모양이였다. 감수성이 예민한 리관린은 분명 그때 내 생활에서 일어난 변화 를 목격하면서 독립군의 말로, 민족주의말로를 더 심각하게 느낀것 같았다. 어머니 의 말을 들어보아도 그는 이전보다 많이 달라졌는데 요새는 더욱더 말수더구가 적 어지고 조용해졌다는것이였다.처음에는 그저 그 나이의 미혼녀성들에게서 흔히 보게 되는 일종의 고민이 아니 겠는가고도 생각하였다. 리관린의 그때 나이가 28살이였다. 14살이나 15살만 되 여도 머리를 쪽지고 시집을 보내는 조혼의 시대였으므로 28살이라고 하면 다들 쇠서 못쓰겠다고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리관린과 같이 혼기를 놓쳐버린 로처녀 들이 일생문제때문에 고민하는것은 얼마든지 있을수 있는 일이였다.이런 일이 자주 되풀이되므로 나는 어느날 그에게 그사이 왜 그렇게 얼굴이 축가고 우울해졌는가고 물었다. 리관린은 한숨을 쉬면서 자꾸 나이는 드는데 만사가 신통 치 않아서 그런다고 대답하였다. 성주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는 하루에 100리, 200 리를 걸으면서도 힘든줄을 몰랐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신 다음부터는 무슨 일을 하나 해도 성수가 나지 않고 몸에 차고 다니는 권총에도 녹이 쓸 지경이니 어데다 마음을 의탁할데가 없고 야단이 아니냐,독립군이 아무래도 대사를 치르지 못할것 같애, 지금 독립군의 형세가 말이 아니야, 꼭대기에 있는 령감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틀만 차리면서 상발(출근)도 하지않고 싸움깨나 할만한 장정들은 집살림에 재미를 붙이고 총각들은 녀자들의 분내나 맡으 면서 돌아가고있지,…며칠전에는 날파람있던 싸움군총각이 장가를 들어가지고 독립군에서 나와 간도 쪽으로 떠나가버렸구나, 모두들 눈치를 보면서 하나둘씩 꼬리 를 사리는 판이야, 나이가 들어 장가를 가는거야 어떻게 하겠나, 그렇지만 장가를 간다고 총까지 벗어 던지면 조선독립은 누가 한단 말이야,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체면이 없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하였다.나는 비로소 그의 고민이 리해되고 울분이 리해되였다. 처녀의 몸으로 시집도 안가 고 독립운동을 위해 애를 쓰는데 멀쩡한 사내라는것들이 총을 벗어던지고 안식처 를 찾아 달아나는 판이니 그가 분개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글공부를 했다는 처녀 들이 개화바람이 나서 신녀성행세를 하며 돌아갈 때 리관린은 륙혈포를 차고 압록 강을 넘나들면서 왜놈군경들과 격전을 벌리였다.녀자가 남복에 권총을 차고 직업적인 군인이 되여 외적과의 싸움에 나선 실례는 우리 나라 력사에 흔치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글에서 제목을 특별히 따로 설정하여 리관린의 생애를 더듬어보는것도 이 점을 중시한데 있다. 남존녀비의 인습이 뿌리깊이 남아있던 우리 나라에서 녀자들이 권총을 차고 싸움마당에 나선다는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였다.외적에 대한 우리 나라 녀성들의 지난날의 저항방법이 시대마다 다른 양상을 띠고 있는것만은 사실이지만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기서 하나의 공통점 을 발견할수 있다. 그것은 그 저항들이 많은 경우 봉건유교적인 정절관에 기초한 소극 적인 형태로 표현되였다는 점이다.외적이 침노하여 이 나라 인민들을 도륙하고 괴롭힐 때마다 녀성들은 몸을 더럽히 는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고 깊은 산중이나 절간 같은데로 피신해버리군하였다. 미처 피신하지 못한 녀성들은 자결로써 놈들에게 항거하였다. 임진왜란때 나라에 등록된 렬녀의 수가 충신의 수보다 30배이상이나 더 많았다고 하니 이 나라 녀성 들의 절개가 얼마나 강했는가 하는것은 능히 짐작할수 있을것이다.최익현이 대마도에 가서 단식으로 순국했을 때 그의 부인은 3년상을 마치고 자결 로써 남편과 같은 길을 걸었다고 한다. 인륜의 도리로 볼 때에는 그것을 나라에는 충성하고 남편을 위해서는 절개를 지키는 최대의 도리라고 응당하게 평가할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모두가 죽음만을 택한다면 원쑤는 누가 치고 이 나라는 누가 지켜주겠는가 하는것이다. 나라가 근대화되면서 우리 녀성들의 사 고방식과 인생관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피신, 자결의 소극적인 방법으로 적들 에 게 저항하던 이 나라의 녀성들이 남성들과 함께 군경들의 총검앞에 가슴을 내대 고 반일시위에 떨쳐나섰으며 적의 관공서에 폭탄을 던지였다.그러나 손에 총을 잡고 녀성독립군으로 이국땅에서 10년유여의 세월을 무력항쟁에 참가한 녀자는 리관린밖에 없을것이다. 리관린은 원래 인물이 잘나서 어데 가나 꽁 무니를 따라다니는 남자들을 떼버리느라고 애를 먹던 녀자였다. 용모나 학식이나 가정환경을 보면 학교에 가서 교원도 할수 있고 좋은 남편을 만나 남부럽지 않게 호강할수 있는 바탕을 가지고있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한몸을 초개와 같이 독립운동 에 바치였다.그의 아버지는 삭주에서 여러 정보의 땅과 산림과 초가이기는 하나 10칸이나 되는 집을 가지고 자작농사를 하면서 살아가는 중산층이였다. 그는 리관린이 12살 나던 해에 상처를 하여 2년후에 재취를 한다는것이 16살 되는 처녀를 데려왔다.리관린은 자기보다 겨우 2살밖에 더 먹지 않은 녀자를 어머니라고 부를수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봉건이 심하여 딸이 15살이 되도록 학교에 보낼 생각은 하지 않고 적당한 혼처를 물색하여 시집보낼 궁리만 하고있었다.남들이 학교에 다니는것이 부러워 늘 공부를 시켜달라고 떼를 쓰던 리관린은 아버 지의 처사에 불만을 느끼고 15살 때에 집을 뛰쳐나왔다. 그는 아버지가 어디로 간 사이에 슬그머니 압록강가에 나가 얼음구멍앞에 옷과 신발을 벗어놓고 그길로 의주에 갔다. 거기서 그는 먼 친척벌되는 사람의 도움으로 양실학교에 입학하였다. 반년쯤 배포유하게 공부를 하다가 가을이 다된 때에야 그는 아버지에게 학비를 보내라는 편지를 부치였다.딸이 강물에 빠져죽은줄로만 알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그의 아버지는 편지를 받고 너무도 기뻐 곧 의주땅으로 달려갔다. 그는 딸에게 이제는 네가 공부하는것을 막지 않겠으니 요구되는것이 있으면 아무때나 편지하라고 하였다. 리관린은 그때 부터 학비걱정을 모르고 공부에 열중하였다. 성적도 우수하였으므로 학교에서는 그를 평양녀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에 추천하였다.이렇게 한해두해 공부하는 과정에 그는 세상리치도 깨닫게 되고 우리 아버지의 보증으로 조선국민회에도 들게 되였는데 그때부터는 당당한 혁명조직의 성원으로 지하활동에 참가하였다. 그가 우리 아버지한테서 《지원》의 뜻을 배운것이 바로 이때였다. 리관린은 평양녀자고보와 숭실중학교, 숭의녀학교, 광성고보의 학생들속에서 동지들을 흡수하기 위한 공작을 은밀히 하였다.어떤 날은 그가 원족삼아 만경대에도 놀러 왔다. 우리 집에 와서는 아버지와 사업 토의도 하고 어머니의 일손도 도와주었다. 교통조건이 불리한 때였지만 경치가 좋다고 봄이면 숭실중학교나 광성고보 같은데서 많은 학생들이 점심밥을 싸가지고 만경대로 놀러 오군하였다.평양에서 3.1인민봉기가 폭발하자 그는 시위대렬의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시위가 좌절되면 기숙사에 들어가 잠간씩 숨을 돌리고는 다시 만세를 부르면서 학우들을 고무하였다. 봉기가 실패하고 시위주모자들에 대한 검거선풍이 일어나자 그는 고향에 돌아가 직업적인 독립운동의 길에 나섰다. 망국의 운명을 끝장내기 전에는 학창에서 공부나 하고 앉아있을수 없다는 결심이 선것이다.초기에는 오동진이 조직한 광제청년단에서 총무로 활동하였다. 리관린은 만주로 건 너가기전에 벌써 고향에서 일본경관 두놈을 권총으로 쏴죽이고 압록강얼음구멍에 처넣어 세상을 놀래운적도 있었다. 독립군에 입대한후 그가 국내에 자금모연공작을 나왔다가 경찰에게 걸려들어 조사를 당한적이 있었다. 리관린이 이고 가는 보퉁이 속에 권총이 들어있었으므로 정황은 아주 위급하였다.경찰은 그 보따리를 자꾸 풀라고 하였다. 리관린은 보다리를 푸는척하다가 재빨리 권총을 뽑아들고 경찰을 수림속에 끌고들어가서 처단해버렸다. 국내에 모연공작을 자주 다니다나니 그는 로상에서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언제인가 그는 오동진이 주는 임무를 받고 평안남도일대에 나가 모연공작을 한 일이 있었다. 모연을 마치고 국내조직에 있는 사람과 함께 본영으로 돌아오던 그는 삼도만에서 하루밤 류숙하던 중 근방에 있는 다른 무장단성원들의 협박을 받았다.그때 두사람의 수중에는 몇백원에 달하는 돈이 있었다. 그자들은 권총을 꺼내들고 공포를 쏘아대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두사람을 위협하였다. 동행하던 남자는 그 위협에 겁을 먹고 간수하고있던 돈을 고스란히 내놓았다. 그러나 리관린은 한푼의 돈도 내놓지 않고 오히려 호령질로 그들을 쫓아버리였다.우리가 항일무장투쟁을 할 때에는 유격대에 녀장군들이 많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녀성이 조선에는 없었다. 고보시절에 수놓이나 재봉 같은것만 배우던 책상 물림의 녀자인데 그처럼 용감하고 담력이 있었다. 한때 《동아일보》나 《조선 일 보》같은 신문들이 리관린을 두고 굉장히 떠들었다. 리관린은 또한 절개가 굳고 대가 강한 녀자였다.3.1인민봉기후 남만에서는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사업이 활발히 벌어지고있었다. 그런데 모든 단체들이 저마다 다른 파를 무시하고 자기 파를 내세우면서 본위주의 를 하기때문에 통합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통합을 위한 론의는 매번 무의미한 입씨름과 마찰로 공회전을 하였다.아버지는 통합운동이 직면하고있는 이런 난관을 타개하기 위하여 이 사업에 독립운동의 원로들을 인입하려고 결심하였는데 그 첫 대상으로 지목된 사람이 량기탁이였다. 적의 감시속에 있는 량기탁을 서울로부터 남만주까지 안내해온다 는것이 쉬운 일이 아니였다. 아버지는 심중히 생각해보던 끝에 그 적임자로 리관린을 선정하고 량기탁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어 그를 서울로 파견하였다.량기탁은 민족주의자들속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있었다. 평양 한학자의 가정에서 태여난 그는 일찍부터 애국적인 신문활동과 교육운동으로 대중속에 반일독립정신을 배양하는데 많은 힘을 기울이였다. 량기탁이라면 조선에서 처음으로 되는 《한영 사전》을 편찬하고 일본에 대한 국채보상운동을 지도한것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105인사건》으로 감옥살이도 여러해 하였으며 신민회와 상해림시정부(국무위원), 고려혁명당(위원장)조직에도 관계하였다. 이 사람이 오동진과 함께 정의부도 조직 하였다.이런 경력으로 독립운동자들은 소속에 관계없이 그를 존경하였다. 리관린은 서울에 나갔다가 형사들에게 붙잡혀 종로경찰서 구류장에 갇히였다. 적들은 그에게 매일 같이 악착한 고문을 들이댔다. 코에 고추가루물을 부어넣기도 하고 참대침으로 손톱눈을 찌르기도 하고 두팔을 뒤로 제껴 천정에 매달아놓기도 하였다.어떤 날에는 그를 마루바닥에 눕혀놓고 얼굴에 널판자를 올려놓은 다음 그것을 디디고 서서 발을 탕탕 구르기도 하였는데 고문할 때마다 중국에서 왔는가, 로씨야 에서 왔는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다니는가 하면서 차고 때리고 짓밟고 하였다. 나중에는 두다리에 매운 재떡을 붙이고 석유를 친 다음 불을 달아놓으면서 태워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그래도 리관린은 굴복하지 않고 나는 직업이 없어서 다니는 녀자다, 어느 부자집 침모나 보모를 하려고 서울에 왔는데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붙잡아다놓구 왜 이렇게 못살게 구는가고 대들었다. 리관린이 하도 뻗대자 한달만에 놈들은 그를 놓아주었다. 그는 운신조차 할수 없는 몸이였으나 기어이 량기탁을 데리고 흥경 으로 들어갔다.그때에 받은 그 고문의 후탈로 리관린은 흥경에 도착하자마자 병상에 매인 몸이 되였다. 동료들이 그를 간호하다 못해 차도가 보이지 않아 한 늙은 의사를 데려 다가 진찰을 시키였다. 그런데 맥을 짚어본 의사는 태맥이라고 엉터리없는 진단을 내리였다. 이름난 미인한테 수작을 걸어보고싶었던 늙은 의사의 실없는 야유였는 지도 모른다.리관린이 하도 어이가 없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따지고 들자 의사는 임신을 했다고 하였다. 의사가 말을 끝내기 바쁘게 리관린은 베고있던 목침을 들어 그에게 냅다 던지면서 이렇게 욕설을 퍼부었다.《이자식, 너 젊은 녀자가 시집도 안가구 독립 운동을 하자고 나서서 총잡고 싸우는데 무엇이 배가 아파서 조롱하느냐, 나를 헐뜯어서 얻어먹을게 무엇이냐, 다시한번 말해봐라.》혼쌀이 난 의사는 신발도 신지 못하고 달아나버리였다.리관린이 이런 기개를 가지고있었기때문에 우리 아버지도 그에게 중요한 과업을 많이 주군하였다. 우리 아버지가 시키는 일이라면 리관린은 무엇이든지 다하였다. 평양에 가라면 평양에 가고 서울에 다녀오라면 서울에 다녀왔다. 급한 련락을 가라면 련락을 가고 녀성계몽을 하라면 녀성계몽을 하였다.우리 아버지가 국내공작을 할 때면 리관린은 그 수행원으로 따라다니면서 아버지의 신변호위도 하고 사업도 보좌해주었다. 그가 다닌 로정은 실로 수만리에 달한다. 의주, 삭주, 초산, 강계, 벽동, 회령 같은 북부국경일대와 간도지방은 물론, 순안, 강동, 은률, 재령, 해주를 비롯한 서선지구와 멀리 경상도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곳이란 거의 없었다.리관린은 그 당시 우리 나라에서 처녀의 몸으로 백두산을 넘나든 첫 녀성이였다.일생에서 가장 열렬한 축복을 받으며 살아야 할 그 황금같은 청춘시절에 그는 이처럼 타향의 이슬비를 맞으면서 녀자로서는 힘에 부친 군인생활을 하였다.애국의 일념밑에 몸에 권총을 두개씩 차고 소란스러운 세상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활약하던 그가 기울어져가는 독립운동을 두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가슴이 아팠다.내가 길림으로 갈 준비를 하기 시작하자 그는 자기도 나처럼 장차 길림에 가서 무엇인가 좀 해보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리관린은 그후 그 결심도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나는 길림에 가서 공부할 때 손정도네 집에서 두세번 그를 만나보았다. 그때 리관린이 시국이야기를 해달라고 하기에 나는 우리 나라 혁명의 전도에 대해 장시간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우리가 하는 식이 마음에 든다고 하였다.그러면서도 여전히 정의부 지붕밑에서 뛰쳐나오지 못하고있었다. 리관린은 공산주의를 좋다고 하면서도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민족주의좌파였다. 나는 민족 주의운동의 조락을 두고 번민하는 리관린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민족주의진영에는 리관린과 같이 사생활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애국지사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옳은 지도자가 없다나니 리관린처럼 담력이 크고 절개가 강한 녀자도 어떻게 할바를 모르고있었다.《ㅌ. ㄷ》가 방금 첫걸음을 뗀 때여서 그는 우리의 운동선에도 합류하지 못하였다.아버지가 생전에 그처럼 믿어주고 사랑을 기울여 키워온 리관린이 그 어디에도 마음을 의탁하지 못하고 번민하는것을 보면서 나는 우리 나라 민족해방운동에 조선의 모든 애국력량을 하나로 결속하고 이끌어줄수 있는 참다운 지도세력이 없는것을 통탄하였다.리관린의 고민은 나로 하여금 우리 새 세대들이 혁명을 위해 더 분발해야겠다는 충동을 느끼게 하였다. 리관린처럼 옳바른 방향타가 없어 모대기는 애국자들을 위해서도 우리가 한시바삐 만사람을 공감시킬수 있는 새길을 개척하여 나라의 독립을 지향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같이 하나의 흐름을 타고 싸워나갈수 있는 혁명의 새시대를 마련해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게 되였다.나는 이런 결심을 가지고 길림으로 갈 준비를 다그쳤다. 길림에서 마지막으로 리관린을 본후 반세기가 흐르는동안 우리는 줄곧 그를 찾았다. 우리가 동만에서 유격대를 무어가지고 활동할 때 그 대오에는 20대의 녀자들이 많았다. 남성들과 꼭같은 기개와 투지를 가지고 민족해방사의 새 장을 펼쳐나가는 그들의 용감한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독립군의 녀걸 리관린을 생각하였다. 그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있는지 그의 행방을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참으로 궁금하고 안타까왔다.여러 경로를 통해 수소문을 해보았으나 그의 행방과 운명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길이 없었다. 조국이 해방된후 그의 고향 삭주에도 들려 찾아보았지만 거기에도 리관린은 없었다. 우리가 그의 행방을 처음으로 알아낸것은 1970년대초였다. 우리 당력사연구소동무들이 여러모로 탐문하던 끝에 그가 중국땅에서 아들딸 남매를 키우며 살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리관린과 함께 싸우던 사람들가운데서도 공영, 박진영과 같이 《ㅌ. ㄷ》의 영향 으로 공산주의물을 먹은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갔다. 그들은 모두 혁명가답게 최후도 값있고 장렬하게 마치였다. 그러나 리관린은 자기를 이끌 어줄수 있는 옳은 지도자를 만나지 못한탓으로 하여 투쟁을 중도반단하지 않으면 안되였다.그래도 오동진이 살아있을 때는 관전회의에서 선포된 무산혁명방침을 실현한다고 하면서 속도 많이 태우고 걸음도 많이 걸었다. 내가 길림으로 떠난 그해(1927년) 여름에 리관린은 장철호를 비롯한 독립군대원들과 함께 내도산에 가서 풀막을 치고 감자농사를 지으면서 군중계몽도 하였다. 오동진은 아마 내도산마을을 개척하여 독립군의 활동기지로 만들려고 했던것 같다.그러나 오동진이 붙잡힌 다음에는 이런 활동도 다 흐지부지되였다. 민족주의좌파 세력 가운데서 공산주의조류쪽으로 제일 크게 기울어진 사람이 오동진이였는데 이런 기둥이 잡혀가다나니 관전회의방침을 실현하겠다고 몸을 내대는 재목도 없었 다. 정의부안에 공산주의를 동조하는 인물들이 더러 있기는 하였으나 맥을 추지 못하였다.3부의 통합으로 국민부가 나온후에는 민족주의상층도 급격히 반동화되여 공산주의 라는 말조차 번지기 어렵게 되였다. 국민부의 지도자들은 공산주의를 동조하는 민족주의좌파인물들에 대하여 일제경찰에 밀고하거나 암살해버리는 반역행위도 서슴지 않고 감행하였다. 리관린도 국민부테로분자들의 부단한 추격과 협박을 받으며 피신처를 찾아 헤매게 되였다. 그러다가 결국은 어느 중국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가정에 파묻히고말았다. 상하사불급이라는 말과 같이 가정을 이루는것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다.거치른 만주땅에 새별처럼 나타나 세상의 이목을 끌며 원쑤들을 전률케 하던 《독립군의 꽃》, 《만록총중 일점홍》은 이렇게 속절없이 시들어버렸다. 그는 비유해 말하면 민족주의라는 목선을 타고 먼 항행을 떠난 독립운동자였다. 고난과 시련이 끝없이 겹쳐드는 반일독립항쟁의 그 풍랑사나운 망망대해를 헤쳐나가기에는 너무나도 연약한 배였다. 그런 쪽배로는 도저히 조국광복이라는 목적지에까지 갈수 없었다.숱한 사람들이 그 배를 타고 항행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기슭에까지 가닿지 못하고 중도에서 주저앉아버리였다. 그렇게 주저앉아가지고서는 밥벌이나 하고 우국지사흉 내를 내면서 편안하게 살아갈 구멍수만 찾아다니였다. 지난날 민족을 《대표》 한다고 하던 상층들가운데는 백고약을 만드는 소시민이 되거나 깊은 산속에 도피 하여 중이 되여버린 사람들도 있었다.변절은 안하고 가정에 파묻히거나 생업에 몰두하는것은 그래도 좀 나은편이였다. 리관린과 함께 민족주의항로를 헤쳐나가던 독립운동자들가운데는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의 앞잡이로 굴러떨어진자들도 있었다. 리관린은 우리와 헤여진 다음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이역에서 보내다가 여러해전에 조국으로 돌아왔다.그는 내가 독립군시절에 자기가 그처럼 따르던 김형직선생의 아들 성주라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부터 조국에 돌아오고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고 한다. 성주가 나라를 령도한다면 만민평등의 사회건설에 대한 김형직선생의 리념이 실현될것인데 그 현실을 기어이 보고싶었다는것이였다. 찬바람부는 만주광야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마다 눈물을 지으며 끝없이 그려보던 나서자란 그 산천에 묻히고싶었다는것이였다.그러나 리관린이 귀국을 결심하기까지에는 여러해동안의 남모르는 고민이 있었다.그에게는 두 남매와 여러 손자, 손녀들이 있었다. 한번 떠나면 다시 넘어서기 어려 운 만리타향에 사랑하는 자식들을 죄다 남겨두고 홀몸이 되여 조국으로 돌아올 결심 을 한다는것은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로인으로서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 였다.그러나 리관린은 그 후대들과 영영 갈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조국으로 기어이 돌아 가리라는 결심을 내리였다. 리관린과 같이 담력이 큰 녀성이 아니고서는 감히 엄두도 낼수 없는 대용단이였다. 그가 한창나이때 나라를 위해 청춘을 고스란히 바치지 않았더라면 그런 용단을 내릴수 없었을것이다.조국을 위해 울어도 보고 웃어도 보고 피도 흘리면서 온 넋과 육신을 다 바친 사람들만이 조국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심장으로 깨달을수 있다. 나는 리관린이 이역땅에 자식들을 다 떨궈두고 백발을 날리며 단신으로 조국에 돌아온것을 보고 그의 불같은 조국애와 고결한 인생관에 탄복하였다.무송에서 헤여질 때 20대였던 리관린은 그때 80고령의 백발로인으로 내앞에 나타났다. 뭇사람들의 눈길을 끌던 홍안의 아름다운 모습은 더는 찾아볼길이 없었다. 그렇게도 애를 태우며 찾을 때에는 소식이 감감하던 리관린이 머리에 흰서리를 무겁게 이고 내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반세기이상이나 우리를 갈라놓고있던 그 무정한 세월을 두고 서글픈 감회에 잠기지 않을수 없었다.우리는 리관린에게 평양시 중심부의 풍치좋은 곳에 살림집을 따로 마련해주고 나이를 고려하여 식모와 의사까지 붙여주었다. 그 집은 처녀시절에 그가 다니던 녀고보자리로부터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김정일동지가 리관린의 심정을 헤아려서 그런 곳에 집을 잡아주었다. 김정일동지는 그 집에 나가서 늙은이의 취미와 기호에 맞게 가구의 위치도 정해주고 조명과 난방상태까지 다 보아주었다.리관린은 몸이 불편했지만 그 집 앞마당에 터밭을 일구고 강냉이를 심었다. 내가 어린시절에 강냉이를 무척 좋아했기에 자기 손으로 강냉이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고 싶다는것이였다. 반세기가 지난 때였지만 그가 내 식성까지 다 기억하고있었다. 그는 무송에 있을 때에도 여름철에 풋강냉이를 사다가 뒤뜨락에서 내 동생들에게 구워주군 하였다.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친 젊은 시절의 공적을 생각하여 우리는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장례도 잘 치르어주고 그의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장하였다. 진실로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지구의 그 어느 곳에서 살든지 선조의 무덤이 있고 자기의 태가 묻힌 낯익은 강산으로 찾아오기 마련이며 설사 다른 지점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어느 때인가는 이렇게 만나 정을 나누게 되는 법이다.
Iran: EU oil sanctions 'unfair' and 'doomed to fail
Iran has said an oil embargo adopted by European Union foreign ministers over the country's nuclear programme is "unfair" and "doomed to fail".
The measures would not prevent Iran's "progress for achieving its basic rights", foreign ministry spokesman Ramin Mehmanparast said.
The sanctions ban all new oil contracts with Iran and freeze the assets of Iran's central bank in the EU.
The EU currently buys about 20% of Iran's oil exports.
"European officials and other countries which are under America's political pressure... should consider their national interests and not deprive themselves of Iran's oil to help US officials achieve their secret aims," Mr Mehmanparast added.
He accused the US of trying to create "problems with energy supply requirements in countries which are America's economic rivals".
US President Barack Obama has welcomed the EU sanctions, saying they show international unity against the "serious threat" posed by Iran's nuclear programme.
Warships on the move
The sanctions were formally adopted at a meeting of EU foreign ministers in Brussels on Monday.
Iran had "failed to restore international confidence in the exclusively peaceful nature of its nuclear programme", British Prime Minister David Cameron, French President Nicolas Sarkozy and German Chancellor Angela Merkel said in a joint statement.
"We will not accept Iran acquiring a nuclear weapon. Iran has so far had no regard for its international obligations and is already exporting and threatening violence around its region," the leaders added.
The measures were "another strong step in the international effort to dramatically increase the pressure on Iran", US Treasury Secretary Timothy Geithner and Secretary of State Hillary Clinton said in a statement.
Meanwhile, the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the UN's nuclear watchdog has confirmed it is sending a team to Iran between 29 and 31 January "to resolve all outstanding substantive issues".
Last November the IAEA said in a report that it had information suggesting Iran had carried out tests "relevant to the development of a nuclear explosive device".
Tehran insists its nuclear programme is for energy purposes.
Earlier on Monday, the Pentagon said the US aircraft carrier USS Abraham Lincoln, as well as a British Royal Navy frigate and a French warship, had passed through the Strait of Hormuz at the entrance to the Gulf without incident, following Iranian threats to block the trade route.
Russian opposition
The EU said the sanctions prohibit the import, purchase and transport of Iranian crude oil and petroleum products as well as related finance and insurance. All existing contracts will have to be phased out by 1 July.
Investment as well as the export of key equipment and technology for Iran's petrochemical sector is also banned.
BBC Europe Editor Gavin Hewitt says it is one of the toughest steps the EU has ever taken.
EU foreign policy chief Catherine Ashton said the purpose of the sanctions was "to put pressure on Iran to come back to the negotiating table".
Earlier, UK Foreign Secretary William Hague said the embargo showed "the resolve of the European Union on this issue".
"It is absolutely right to do this when Iran is continuing to breach United Nations resolutions," he added.
But the Russian foreign ministry said it was a "deeply mistaken" move that would not encourage Iran to return to the negotiating table.
"It's apparent that in this case there is open pressure and diktat, aimed at "punishing" Iran," it said in a statement.
BBC Iran correspondent James Reynolds says the decision may damage the Iranian economy - but in itself it won't destroy it.
Iran sells most of its oil to countries in Asia. The EU and the United States are now working to persuade Asian countries to reduce their purchases from Iran as well.
Iran has already threatened to retaliate by blocking the Strait of Hormuz at the entrance to the Gulf, through which 20% of the world's oil exports pass.
The US has said it will keep the trade route open, raising the possibility of a confrontation.
Late last year Iran conducted 10 days of military exercises near the Strait of Hormuz, test-firing several missiles.
Oil prices have risen already because of the increasing tension and the expected impact of an EU ban on oil supplies to Europe.
A French warship also accompanied US and UK naval vessels through the Strait of Hormuz on Monday
German anti-Semitism 'deep-rooted' in society
Anti-Jewish feeling is "significantly" entrenched in German society, according to a report by experts appointed by the Bundestag (parliament).
They say the internet has played a key role in spreading Holocaust denial, far-right and extreme Islamist views, according to the DPA news agency.
They also speak of "a wider acceptance in mainstream society of day-to-day anti-Jewish tirades and actions".
The expert group, set up in 2009, is to report regularly on anti-Semitism.
The findings of their report, due to be presented on Monday, were that anti-Jewish sentiment was "based on widespread prejudice, deeply-rooted cliches and also on plain ignorance of Jews and Judaism".
They added that far-right slogans at football matches were a regular occurrence.
The report's authors put Germany midway in their assessment of other European countries in relation to the spread of anti-Semitism.
They see extremely high levels of anti-Jewish sentiment in parts of Poland, Hungary and Portugal.
Germany's Jewish population has experienced something of a revival since the fall of the Berlin Wall.
Before 1989, the population was below 30,000 but an influx of Jews, mainly from the former Soviet Union, has raised the number to 200,000.
Speaking on Friday to mark the anniversary of the 1942 Wannsee conference, when the Nazis' murder of millions of Jews was mapped out, President Christian Wulff pledged that Germany would keep the memory of the Holocaust alive and would never abandon
Big Tokyo earthquake likely 'within the next few years'
A big earthquake is much more likely to hit the Japanese capital, Tokyo, in the next few years than the government has predicted, researchers say.
The team, from the University of Tokyo, said there was a 75% probability that a magnitude 7 quake would strike the region in the next four years.
The government says the chances of such an event are 70% in the next 30 years.
The warning comes less than a year after a massive earthquake and tsunami devastated Japan's north-eastern coast.
The last time Tokyo was hit by a big earthquake was in 1923, when a 7.9 magnitude quake killed more than 100,000 people, many of them in fires.
Researchers at the University of Tokyo's earthquake research institute based their figures on data from the growing number of tremors in the capital since the 11 March 2011 quake.
They say that compared with normal years, there has been a five-fold increase in the number of quakes in the Tokyo metropolitan area since the March disaster.
The 2011 quake caused massive destruction on Japan's north-eastern coast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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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y based their calculations on data from Japan's Meteorological Agency, They said their results show that seismic activity had increased in the area around the capital, which in turn leads to a higher probability of a major quake.
The researchers say that while it is "hard to predict" the casualty impact of a major quake on Tokyo, the government and individuals should be prepared for it.
Correspondents say that while the university calculations take account of greater seismic activity since March, government calculations may use different or less up-to-date data and different modelling techniques.
The 9.0 magnitude earthquake last year aksi crippled the cooling systems at the Fukushima nuclear power station, causing meltdowns in some of its reactors.
Japan is located on a tectonic crossroads dubbed the "Pacific Ring of Fire" which is why its is commonly regarded as one of the world's most quake-prone countries, with Tokyo located in one of the most dangerous areas.
Correspondents say that while the university calculations take account of greater seismic activity since March, government calculations may use different or less up-to-date data and different modelling techniques.
The 9.0 magnitude earthquake last year aksi crippled the cooling systems at the Fukushima nuclear power station, causing meltdowns in some of its reactors.
Japan is located on a tectonic crossroads dubbed the "Pacific Ring of Fire" which is why its is commonly regarded as one of the world's most quake-prone countries, with Tokyo located in one of the most dangerous areas.
EU Iran sanctions: Ministers adopt Iran oil imports ban
European Union foreign ministers have formally adopted an oil embargo against Iran over its nuclear programme.
The sanctions involve an immediate ban on all new oil contracts with Iran, while existing contracts will be honoured until 1 July.
Tehran denies that it is trying to develop nuclear weapons and says talks and not sanctions are the only way to resolve the dispute.
The EU currently buys about 20% of Iran's oil exports.
Meanwhile, the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the UN's nuclear watchdog has confirmed it is sending a team to Iran between 29 and 31 January "to resolve all outstanding substantive issues".
Last November the IAEA said in a report that it had information suggesting Iran had carried out tests "relevant to the development of a nuclear explosive device" - sparking the decision by the US and EU to issue tougher sanctions.
Earlier on Monday, the Pentagon said the US aircraft carrier USS Abraham Lincoln, as well as a British Royal Navy frigate and a French warship, have passed through the Strait of Hormuz at the entrance to the Gulf without incident in the wake of Iranian threats to block the trade route.
'Substantial impact'
Under the new deal, EU governments are expected to stop signing new contracts with Iran when the ban comes into place - which could be as soon as this week, Reuters news agency reports.
All existing contracts will have to be phased out by 1 July.
Additional restrictions on Iran's central bank are also expected to be agreed by EU ministers, although no further details have been given.
BBC Europe Editor Gavin Hewitt says it is one of the toughest steps the EU has ever taken.
UK Foreign Secretary William Hague said the embargo showed "the resolve of the European Union on this issue".
"It is absolutely right to do this when Iran is continuing to breach United Nations resolutions and refusing to come to meaningful negotiations on its nuclear programme," he added.
In response to the EU announcement, one senior Iranian politician said Tehran should halt all oil sales to European countries immediately.
Ali Fallahian was quoted by the semi-official Fars news agency as saying that Iran should stop the export of oil before the 1 July deadline "so that the price of oil soars and the Europeans... have trouble".
Russian Foreign Minister Sergei Lavrov reacted to the embargo by saying that such "unilateral sanctions do not help matters" and called for a resumption of talks between Iran and the international community.
Earlier, EU foreign policy chief Catherine Ashton said the aim of the sanctions was to "make sure that Iran takes seriously our request to come to the table".
She said world powers had yet to receive a reply to an offer made to Iran in October to hold new talks.
Rising tensions
BBC Iran correspondent James Reynolds says oil is the country's most valuable asset and sales help to keep the Iranian government in money and power.
A decision by the EU to stop buying from Iran may damage the Iranian economy - but in itself it won't destroy it, our correspondent says.
Iran sells most of its oil to countries in Asia. The EU and the United States are now working to persuade Asian countries to reduce their purchases from Iran as well.
Iran has already threatened to retaliate over the sanctions by blocking the Strait of Hormuz at the entrance to the Gulf, through which 20% of the world's oil exports pass.
The US has said it will keep the trade route open, raising the possibility of a confrontation.
Late last year Iran conducted 10 days of military exercises near the Strait of Hormuz, test-firing several missiles.
Oil prices have risen already because of the increasing tension and the expected impact of an EU ban on oil supplies to Europe.
A French warship also accompanied US and UK naval vessels through the Strait of Hormuz on Monday
북의 선군정치에 대한 분석
Journal by 유리
세계적으로 200여개의 나라가 있습니다. 매개 국가는 자기자체의 국책이 있고 자기정치방식대로 국가를 운영해나가고 있지요. 그러나 그네들의 정치방식은 쥐여짜고보면 다 같은 소리입니다.
그러나 내 보건대 세계적으로 가장 독특한 정치방식은 북의 선군정치라고 생각되는데요 이것은, 그 어느나라에도 없는 정치방식입니다. 서방 언론이 북의 정치방식을 놓코 이러쿵저러쿵 하는데 이건 다 지들방식대로 국가를 운영해나가지 않코 독특한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해나가면서 그네들이 두덜대는 붕괴로 가는것이아니라 당당하게 세계 대국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화하기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선군정치라는 말이 나왔는데요 이것이 무엇인가? 모 굳이 제가 설명을 안한다고 해도 이미 민족진영의 많은 분들께서 알고있으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혹시나 모르시는 분들이 계실거 같아 함 적어봅니다.
선군정치란 "군사를 국사중으로 여기고 혁명과 건설에서 제기 되는 모든 문제를 군사 선행의 원칙에서 해결해나간다는것"입니다.
이 점에서 한가지 질문이 생가나는데요 언젠가 단군박공님의 글을 보다가 어떤분이 댓글을 달았더라고요 "북이 왜 가난하고 아사가 많은가?" 모 이런 질문은 넘 보편적이지요.
그런데, 이건 북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탈북자들이 하는 소리들을 들으면 모 금방 북이 붕괴직전 같은데요 그네들 말은 그냥 흘려들으면 됩니다.
혹시, 애견들 길러보셨는지 모르겠는데요 전 함 길러봤거든요. 탈북자들 하는 행동이 애견당 같다고 봅니다. 주인의 맘에 들기위해서 모 머든 다하지요. 없는 내용은 만들어내고 모 있던내용은 좀 불구어서 말하고 모 그러는 그네들의 입에서 모가 바른소리 나오겠습니까?
"북이 왜 가난한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드리겠습니다.
이미, 단군박공님이 말씀하신것처럼 북은 가난한 나라가 아닙니다. 가난? 이 글을 쓰는 저도 웃음이 나오네요~ 가난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것이 경제일것입니다. 북의 GDP가 얼마인지는 정확히 발표된자료가 없습니다. 하지만, 장담컨데 GDP 모 이런 복잡한 경제술어들이 그 나라 부의 전부를 보여준다는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전 중국 청나라시기 중국의 GDP는 다른 유럽의 열광들 보다 많았으며 중일전쟁(Sino-Japanese War) 가 일어나기 전까지 중국의 GDP는 일본의 2.8배 였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GDP와 일본의 GDP가 중공업(Heavy Industry)에 기초하고 있는반면에 중국의 GDP는 농업(Agriculture)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즉, 다시말하면 유럽열광들은 대포, 함선, 자동차를 만들어내는데 중국에서는 차입이라던가 모 농산물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 소리입니다. GDP가 아무리 높다고해도 모합니까? 결국에는 유럽열광들과의 전쟁에서 패했고 결국에는 홍콩(Hong Kong) 과 마카오(Macao) 는 영국에 빼았기고 대만(Taiwan) 은 일본에 빼앗기고 무튼 중국이 산지산지 외국열광들에 의해 갈라져나갔었습니다. 결국에는 섬나라 오랑케들이 넘어와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떵어리를 강점하였습니다.
모 우리 민족에 대한 얘기를 안하고 남의 민족에 대한 소리를 한다고 나무람 하지 마세요. 제가 말하자는것은 이처럼 GDP 그자체가 그 나라의 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소리입니다. 제 생각컨데 북의 GDP의 많은 비중을 대다수 대포, 탱크 와같은 국방공업이 차지한다고 봅니다. 국방이 강해야 국가가 안전 하고 국민의 생존 활동이 안정 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북의 이 선군정치가 경제 분야에 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에 활용이 되는 데요 우선, 경제 분야 에서는 모든 힘을 국방 분야에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북에서 오신 분들과 몇 마디 말을 주고 받았었는데 참 인상적 이였습니다. 특히, "사탕이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총알이 없이는 못산다"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말씀은 저의 가슴을 크게 흔들어놓았습니다.
이미, 김일성 주석님께서 내놓으신 중공업(Heavy Industry)을 우선적으로 발전 시키고 경공업(Light Industry)과 농업(Agriculture)을 동시에 발전시키자는 경제노선은 그 기본이 국방분야를 우선적으로 발전시키자는 의미와 같다고 저는 생각 됩니다.
중공업(Heavy Industry) 이것은 즉 국방공업(Defence Industry)이라고 말해도 아무 의심 갖을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왜냐 하면 중공업(Heavy Industry), 이것이 국방공업(Defence Industry)의 중추를 이루기 때문 입니다. 또한 중공업(Heavy Industry)은 공업의 기초 라고 말해도 될 듯합니다. 그럼 이 점에서 한 가지 질문이 나오는데요 즉, 왜 북은 선군정치를 고집 하면서 군사를 강화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역사는 전에 제가 영문으로 쓴 아티클을 참조하시기를 바랍니다.
관련기사: WW 3rd
1994년 김일성주석님께서 서거하시고 김정일 국방위원장님께서 선택 하신 길이 바로 이 선군입니다. 이미, 그시기 북의 경제는 많은 투자를 요구하고 있었으며 특히 극심한 자연재해로 인해 먹을것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럼, 왜 김정일 위원장님께서 선군정치를 택하시였는가? 사회주의 세력이 붕괴되고 단신으로 남은 북 으로써는 이 길 만이 국가를 살리는 길 이였기 때문 이였습니다.
만전쟁에서(온갓, 수 많은 전쟁 에서) 승리한 미국의 담 목표는 북 이였습니다. 핵 개발 하는 국가라는 명목 밑에 외부세계 로터 북을 고립 시켜놓코 경제 제제를 걸어 놓코 또 한반도 주변에 수 많은 무기 들을 끌어다 놓코 북 을 위협하는 미국의 눈 앞에는 북 이라는 나라가 막 붕괴 해갈 듯 보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약 북 이 국방분야를 발전 시키지 않코 경제발전의 길을 택하였다면 이미 북 도 일찌감치 남한 처럼 미국의 한 개 주가 되는 신세를 면치 못하였을 것입니다. 굶어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남의 노예로 안 살겠다는 북의 이 선택은 우리 민족의 불우한 역사를 대풀이 하지 않겠다는 뜻 이였습니다. 강대했던 고구려, 이것이 북 이 바라던 것 이였으며 이씨 조선의 굴욕적인 역사는 북이 바라는것이 아니였습니다. 북한이 지난 거의 20여 년 동안 먹을것도 지대로 못 먹고 입을 것도 지대로 못 입으면서 자래운 국방력은 AK-47이나 전연 지대에 풀대 숲 처럼 깔려있는 야포들이 전부가 아닙니다. 또 박물관 에다가 전시해놓코 구경 하려고 만들어놓은 장식 품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비단 북한 만을 지키자고 만들어 놓은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을 다시는 노예의 신세로 만들지 못하기 위해서 북 이 풀 죽을 먹으면서 이룩해 놓은것" 입니다.
어떤이들은 북 도 남한 처럼 경제를 발전 시켜야 한다고 하는데 오늘 나는 그네 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남한 땅에 제것 이란 게 모가 있냐고? 미국이 쥐여준 딱딱이 M-16을 들고 나라를 지킨다는 남한의 군사력? 장기간 외국 기업에서 빌려쓴 기술, 그걸 물지 못해 빚 더미에서 허덕이는 남한 경제? 이런 걸 생각 해보면 북 의 이 선택에 대해서 머리가 숙여집니다. 온 민족을 노예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고생하신 북한 큰 형님을 몰라보고 남한의 꼴통들이 하는짓거리 들을 보면 생각 같애서는 쥐박이 면상이라도 한대 줘박고 싶은 생각입니다. 북한이 핵 무기로 남한을 위협 한다고 집안 망신 인줄 몰루고 동네방네 소문 내는데요 내 참 지들이 북의 핵 우산 아래 있다는 점은 왜 생각들 못하는지 정말 꼴통들 입니다.
예로부터 남 한테서 맞는 매보다 집안 사람한테서 맞는 매가 더 아프고 남 한테서 듣는 욕보다 집안 사람한테서 들은 욕이 더 가슴을 허빈다고 했습니다. 북한의 이런 마음을 몰라보고 갖은 악담으로 북한을 자극하고 또 건드려도 보는 남한 정부는 저질 이라는 생각밖에 안들고요 또 그래도 같은 민족이라고 이런 남한 정부에 대해서 참을 성을 보이는 북한에 대해서는 정말 고개가 숙여집니다. 마치, 모 모르고 까부는 동상(동생)에 대한 큰 형님의 참을 성이라고 할까? 그래도 그 동상이 어디가서 매를 안 맞게 하려고 국방력 강화 하는 큰 형님 맘은 몰라 보고 도와줄 대신에 제제 결의에 선참 으로 손드는 이 저질 동상 땜에 큰 형님이 마니 힘들겠습니다.
이제, 이 저질 동상에 대한 큰형님의 화가 폭팔할 거 같습니다. 그 화가 폭팔할 때면 이미 동상의 후회는 늦을 것이며 또 이 저질 동상이 그렇케 놀도록 옆에서 부축한 미국 이라는 깽도(깡패도) 큰 형님의 주먹을 피할 수 없겠지요. 그 날을 생각해보니 막 가슴이 설례입니다.
자 그럼 오늘은 이만 여기서 제 글을 맺으려고 합니다. 미숙한 글을 보아주셔서 감사 하고요 앞으로 많은 조언 부탁 드립니다.
우리 글 첨 배우고 쓴 글이라 글자 들이 wrong인게 많은데요 이점에 대해서 죄송합니다.
《세기와 더불어》1권 제2장 잊을수 없는 화전:
4. 새로운 활무대를 그리는 마음
4. 새로운 활무대를 그리는 마음
화성의숙에서는 학교운영자금의 부족때문에 많은 곤난을 겪고있었다. 의숙의 학생 수가 100명도 채 되지 못했으나 당시의 독립군 형편에서 그만한 학생들을 먹여 살린다는것도 헐한 일은 아니였다. 정의부가 주인이였지만 돈을 넉넉히 대주지 못하였다. 백성들한테서 한푼두푼 모은 군자금으로 행정, 군사, 민사의 세가지 틀거리를 다 갖추고 한개 국가와 맞먹는 허울을 가까스로 유지해나가는 정의부 로서는 돈을 크게 대줄 처지가 못되였다.
화성의숙당국은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학생들을 학교운영자금모연공작에 주기적으로 동원시키였다. 학생들은 20명이 한조가 되여 자기의 출신중대에 돌아가 무기를 받아가지고는 두달동안씩 정의부관할구역을 돌아다니면서 자금을 모으다가 기한이 되면 다른 조와 교대하군하였다. 그렇게 돈을 모았대야 몇달을 넘기지 못하고 인차 바닥이 나군하였다. 그러면 또 길림에 올라가서 정의부에 손을 내밀었다.
한번은 최동오숙장이 겨울나이준비를 위한 자금을 해결하려고 정의부본부에 숙감을 파견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숙감은 빈손으로 학교에 돌아와 3중대장을 나쁜놈 이라고 욕하였다. 화성의숙에 주려고 내놓았던 돈을 3중대장이 먼저 가로채가지고 가서 자기의 결혼식비용으로 몽땅 써버렸다는것이였다. 어찌나도 돈을 물쓰듯 했던지 며칠을 불궈두고 온 동네를 다 먹이고도 음식이 남아 이웃동리 사람들까지 불러다 먹이였다고 한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분격을 금할수 없었다. 정의부금고에 있는 돈이라고 하여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것은 아니였다. 그 돈은 백성들이 죽을 먹고 끼니를 건느면서도 나라를 찾아달라고 푼전을 모아 군자금으로 바친 돈이였다. 돈이 없으면 짚신을 삼아 팔아서라도 군자금을 내고서야 마음을 놓는 우리 인민이였다.
3중대장한테는 그런것도 안중에 없는 모양이였다. 사리사욕에 얼마나 눈이 어두 우면 중대장이라는 사람이 그런 너절한 사취행위를 하였겠는가. 총을 잡고 적과 혈전을 벌려야 할 사명을 지니고있는 지휘관이 그러한 탐오행위를 꺼리낌없이 하였 다는것은 독립군의 상층이 변질되여가고있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을사조약》후 최익현이 지휘한 순창의병의 패보를 듣고 수백명의 의병을 모아 전라도일대에서 맹활약을 하던 한 의병장은 자기의 부하가 백성의 재물을 략탈한 사실을 알고는 그것을 탄식하던 끝에 부대를 해산하고 산속에 숨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그 의병장이 백성에 대한 침해를 얼마나 큰 수치로, 죄악으로 받아들였는가를 가늠할수 있다.
3중대장의 비행은 결국 인민에 대한 침해라고 할수 있었다. 나는 림강에서 살 때 독립군의 몇몇 대원이 조선에 건너가서 농민들의 소를 강제로 빼앗아가지고 돌아와 사람들의 말밥에 오르는것을 보았다. 그 대원들이 소속된 부대의 지휘관이 우리 집에 왔다가 아버지한테서 호된 추궁을 받고 돌아갔다.
그 당시 독립군이 군자금을 거두려고 관할구역의 조선인거주지역들에 나타나면 지역을 책임진 사람들이 아무 집에서는 돈 얼마, 아무집에서는 쌀 몇말 하는 식으 로 문서를 만들어 부락에 돌리였다. 주민들은 그 문서에 적혀있는 량만큼 돈이 나 식량을 군자금으로 바쳐야 하였다. 가난한 농사군들한테는 이것이 큰 부담이였다.
그러나 독립군들은 그런 사정은 외면하고 어떻게 하나 더 많은 돈을 받아내려고 애를 썼으며 저마끔씩 관할구역을 정해놓고 승벽내기로 그 울타리를 넓히였다. 어떤 독립군들은 다른 무장단성원들이 모연해오는 자금을 중간에서 협박하여 빼앗아가지고 달아나기도 하였다.
크고작은 무장단성원들이 저마끔씩 인민들한테서 경쟁적으로 돈을 긁어들이였다. 그들은 백성들을 순전한 납세자, 돈을 대주고 쌀을 대주고 잠자리를 대주는 시중군들로밖에 보지 않았다. 이런 비행은 지난날 봉건사회의 관료배들이 하던 행위와 조금도 다를바가 없었다. 조선의 봉건통치배들은 궁궐에 옥관자를 쓰고 앉아 인민의 피땀을 짜낼 새로운 세금법만 만들어내면서 백성들의 주머니를 끊임없이 털어갔다.
한때 봉건정부는 경복궁을 짓는데 막대한 돈을 써버리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문세 (통행세)라는것까지 생각해냈다. 그렇게 긁어간 돈으로 대학이라도 하나 세우고 공장이라도 지어놓았다면 후손들한테서 고맙다는 말이라도 들었을것이다. 화성 의숙의 진보적청년들은 중대장이라는 사람이 그 지경으로 타락하였으니 독립군 도 이제는 망해가는 모양이라고 개탄하였다. 그러나 그저 비난하고 개탄할뿐이였다. 지금과 같이 밝은 세상이면 군민이 여론을 모아가지고 법에 제기한다든가 동지재판 같은것을 하여 버릇을 떼주겠지만 법도 없고 군률도 무른 당시로서는 별도리가 없었다.
정의부에 민사를 담당한 기구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간판뿐으로서 군자금을 제대로 바치지 못하는 백성들이나 데려다가 볼기를 치는 정도이고 중대장과 같은 사람들의 위법행위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주었다. 그들의 법에는 상층만이 통하는 개구멍이 따로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독립군과 모든 독립운동자들에게 단단히 경종을 울려야 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경종을 울리겠는가 하는것이 문제였다. 최창걸 은 당장 학생대표들을 선출해서 1중대부터 6중대까지 빠짐없이 돌아다니며 항의를 들이대자고 하였다.
어떤 동무들은 정의부가 발간하는 《대동민보》같은 출판물에 글을 써서 독립군의 관료행동을 폭로하자고도 하였다. 그렇게 하면 좋겠지만 3중대장과 별반 차이없는 정의부본부나 다른 중대장들, 출판물의 편집성원들이 그런 내용을 받아들이겠는가 하는것이 문제였다.
나는 확신성없는 방법을 가지고 날자를 질질 끌것이 아니라 독립군 각 중대들에 성토문을 보내자고 하였다. 동무들도 그 방안을 지지하면서 나더러 성토문을 쓰라고 하였다. 그 성토문은 《ㅌ. ㄷ》를 조직한후 우리가 민족주의자들에게 가한 첫 비판이였다. 처음 써보는 성토문이여서 무엇인가 하고싶은 이야기를 다 담지 못한것 같았으나 동무들이 좋다고 하기에 김시우에게 주어 정의부 통신원이 오면 전하도록 하였다. 그후 성토문은 통신원의 손을 거쳐 인차 각 중대들에 전해졌다.
반응도 어지간히 일어났다. 군자금을 결혼식비용으로 써버린 당사자는 물론이고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정의부를 비난하는데 대해서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오동진까지도 그 성토문에서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였다. 이듬해초에 내가 길림에 가서 공부할 때 그는 내앞에서 그 성토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6중대에 내려갔다가 거기에 모인 중대장, 소대장들과 함께 성토문을 보았다고 한다.
《그 성토문을 보고 나는 3중대장을 되게 문책하였네. 중대장자리에서 떼던지려고까지 생각했지. 그런 물건짝들이 독립군망신을 다 시키거든.》 오동진은 독립군상층이 변질되여가고있다는것을 허심하게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수습할길 없어 분해하고 안타까와하였다.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면서도 독립군의 타락을 막아내지 못하고 그것을 수수방관할 때 오동진이 그 불같은 성미를 어떻게 다잡았는지.
나는 오동진의 말을 듣고 독립군의 부패가 우리와 같은 젊은 세대들의 고민으로만 되는것이 아니라 량심적인 민족주의자들의 고민으로도 된다는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한장의 성토문으로써 독립군의 정치도덕적타락을 막는다는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였다.
독립군은 점점 더 헤여나올수 없는 조락의 길을 걷고있었다. 자산계급의 리익을 옹호하며 대변하는 민족주의군대로서의 독립군의 운명이 다르게는 될수 없었다.
인민들을 거칠게 대하고 그들에게 지나친 경제적부담을 들씌우는데서는 화성의숙의 학생들도 독립군과 별로 차이가 없었다. 그들도 모연공작에 동원되면 관할구역을 돌아다니며 경쟁적으로 재물과 량식을 걷어들이였다.
모연에 잘 응하지 않는 집에 대해서는 애국심이 없다고 트집을 걸든가 독립군도 몰라본다는 식으로 까박을 붙이면서 하다못해 돼지나 닭 같은 짐승이라도 바치게 하였다. 그들은 학교에서 조밥만 자꾸 해준다느니, 부식물이 어떻다느니 하면서 밥타발까지 하였다. 한번은 어떤 학생이 기숙사식당에서 저녁밥을 먹다가 조밥에 시래기국만 주니 식사질이 왜 이 모양이냐고 하면서 트집을 걸던 끝에 식당사감을 하는 황세일과 다투기까지 하였다. 황세일은 사감의 일을 아주 성실하게 하였다.
그런데 식사질이 조금만 떨어져도 학생들은 사감이 제구실을 못한다고 비난하였다.
나는 해방직후 의주에서 군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하는 황세일을 만나 그와 함께 화성의숙시절을 회상한적이 있다. 그때 황세일은 웃으면서 자기는 화성 의숙시절의 교훈을 생각하여 리에 내려가도 절대로 밥타발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는 화성의숙에서 조밥을 타발하는 사람들은 졸업후 독립군에 돌아가서도 밥타 발을 계속할것이며 그런 사람들의 종말은 필연코 돈이나 권세 밖에 모르는 추악한 인간으로 전락되는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2년후에 군관으로 독립군의 중대와 소대들을 지휘하게 된다는데 있었다. 굶어죽을 각오는 커녕 조밥을 먹을 각오조차 되여있지 못한 군대한테서 과연 무엇을 더 기대하겠는가.
독립군운동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운동일반에 대한 실망과 함께 화성의숙의 교육에 대한 환멸은 날이 갈수록 내 마음속에서 점점 더 크게 자라올랐다. 화성의숙은 나의 기대에 만족을 주지 못하였고 나는 화성의숙의 기대를 충족시킬수 없었다. 화성의숙이 내가 바라는 그런 학교로 될수 없는것처럼 나도 화성의숙이 바라는 그런 학생으로 될수 없었다. 화성의숙에 대한 나의 불만과 나에 대한 화성의숙의 불만은 서로 정비례하였다.
나는 맑스ㅡ레닌주의 선진사상에 심취되면 될수록 화성의숙의 교육으로부터 멀어져 갔고 화성의숙의 교육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헤여나올수 없는 고민의 세계에 빠지였다. 내가 의숙으로부터 멀어지는것이 나를 거기에 보내준 사람들의 믿음을 저버리는것으로 되고 그들에게 나의 장래를 부탁한 아버지의 뜻을 어기는것으로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장례에 참가하려고 수백리를 달려와 나를 위로해주고 로자를 찔러주며 의숙으로 등을 떠밀어주던 오동진과 의숙에 왔다고 나에게 술까지 부어주던 김시우며, 최동오며, 강제하 선생들의 생각을 하면 참으로 죄송스럽기도 하였다.
그런 사람들과의 의리를 지키자면 내가 불만이 있더라도 화성의숙의 교육에 재미를 붙여야 하였다. 눈을 꾹 감고 2년동안 공부하다가 배치해주는 중대에 가서 곰상곰상 독립군생활을 하면 그 사람들앞에서 체면도 세울수 있었다. 독립군생활을 한다고 하여 새 사조에 대한 연구를 못하거나 《ㅌ. ㄷ》의 터전을 넓히는 작업을 못한다는 법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체면때문에 자기가 보수적이라고 규정한 교육과 외교를 하면서 적당히 지낸다는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였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낡은 교육과 타협하고싶지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할것인가? 집에 돌아가서 삼촌대신 약방일이나 맡아가지고 가정살림을 돌볼것인가, 아니면 심양이나 할빈이나 길림과 같은 도회지에 가서 다른 상급학교에 진학할것인가.
이런 복잡한 심리적곡절끝에 나는 화성의숙을 중퇴하고 길림에 가서 중학교를 다니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였다. 내가 화전대신 길림을 내 운명의 다음정거장으로 선택한것은 이 도시가 만주지방에서 조선의 반일독립운동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모여드는 중요한 정치적중심지였기때문이다. 이런 리유로 하여 길림은 《제2상해》라고 불리우기까지 하였다. 중국관내에서는 상해가 조선혁명가들의 집결처였다.
나는 화전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터치고 보다 광활한 무대에로 나가 《ㅌ. ㄷ》의 결성으로 첫 걸음을 뗀 공산주의운동을 더 높은 단계에서 본격적으로 벌려보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화성의숙을 중퇴하게 된 기본리유였다. 내가 화성의숙을 다니다가 반년만에 중퇴하고 길림으로 간것은 내 생애에서 처음으로 되는 대용단이였다. 두번째 용단이 있었다면 그것은 남호두회의후 새 사단을 조직하면서 《민생단》보따리를 불살라버린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나는 지금도 그때 내가 화성의숙을 중퇴하고 길림에 가서 청년학생들속에 들어갈 용단을 내린것이 정당한 처신이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화성의숙을 제때에 떠나지 않고 그 울타리속에서 맴돌았더라면 그이후 조선혁명을 급속한 앙양에로 승화시킨 모든 공정들이 그만큼 지연되였을것이다.
내가 학교를 그만두고 길림으로 가겠다고 하자 《ㅌ. ㄷ》성원들은 깜짝 놀랐다. 나는 그들에게 《ㅌ. ㄷ》를 내온것만큼 이제는 그 조직과 리념을 사방에 펼쳐가야 한다, 화성의숙에 주저앉아서는 아무 일도 못할것 같다, 이런 학교를 다녔대야 큰 보람도 있을것 같지 않다, 내가 간 다음 동무들도 기회를 보아 독립군부대나 적당한 고장에 자리를 든든히 잡고 《ㅌ. ㄷ》의 줄을 뻗치면서 대중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동무들은 다 조직의 성원들인것만큼 어디에서 일하든지 조직의 통일적인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몇몇 동무들과는 후날 길림에서 만나자는 약속도 했다.
나는 화성의숙을 중퇴하는 문제를 두고 이미 김시우와도 의논하였다.《집에 가서도 의논해보겠지만 이거 뭐 화성의숙에 와서 공부해보니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고… 돈은 없지만 길림에 가서 중학교에라도 다니고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내가 이런 고백을 했더니 총관은 몹시 섭섭해하였다. 그러면서도 의숙을 그만두겠다는데 대하여서는 막지 않았다. 《자네가 그런 생각이 있으면 내 친구들과 의논하여 주선해주겠네. 사람마다 다 자기의 마음에 맞는 달구지가 있는 법이야. 화성의숙의 달구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네의 달구지를 타고 가게나.》 내가 화성의숙에 오는것을 누구보다도 기뻐하고 환영해준 김시우가 그처럼 대범하게 리해하여주는 바람에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총관은 최동오숙장이 섭섭해하지 않도록 중퇴 하더라도 인사나 잘하라고 하면서 어머니를 만나고 길림으로 갈 때에는 꼭 자기한테 들리라고 하였다. 김시우를 납득시키는 일은 예상외로 순탄하게 되였다.
그러나 최동오숙장과의 작별은 참기 어려운 괴로움을 동반하였다. 처음에는 선생이 노여움을 타면서 한참동안 나에게 섭섭한 말을 하였다. 사내가 한번 뜻을 품었으면 그만이지 중퇴를 하다니 될말인가, 의숙의 교육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중퇴하겠다는데 이 어수선한 세월에 만사람의 구미를 다 맞출수 있는 그런 학교가 어디 있는가고 하면서 막 야단을 하였다. 그러다가 나를 등지고 창가를 향해 돌아섰다.
선생은 그 창가에서 눈내리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있었다.《성주와 같은 수재들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학교라면 나도 이 의숙에서 물러가겠네.》선생이 폭탄처럼 내던지는 말에 나는 몸둘바를 모르고 함구무언으로 서있었다. 학교의 교육이 어떻다고 정면에서 운운한 내자신의 처사가 숙장선생을 위해서 너무 가혹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후 최동오선생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옆에 가까이 다가와 어깨우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조선을 독립시키는 주의라면 나는 민족주의건, 공산주의건 상관하지 않겠네. 아무튼 꼭 성공하게.》선생은 운동장에 나와서도 퍼그나 오랜 시간 나의 생활에 교훈으로 될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었다. 선생의 머리와 어깨우에는 눈이 내려와 자꾸 쌓이였다.
나는 그후 폭설속에서 나를 바래주던 숙장선생의 모습을 회상할 때마다 그날 선생의 어깨우에 쌓인 눈을 털어드리지 못한 실수를 두고두고 후회하였다. 그때로부터 30년이 지나 나와 최동오선생은 평양에서 감격적인 해후를 하였다. 나는 수상이고 선생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간부였지만 그 상봉은 역시 어쩔수 없는 스승과 제자의 상봉이였다. 화전에서 추켜들었던 《ㅌ. ㄷ》의 리념은 전쟁의 시련을 이겨내고 승리한 이 땅에서 사회주의로 개화하고있었다.
《결국 그때 성주수상이 정당했습니다!》선생이 웃으면서 나의 아명을 부르는 바람에 나의 추억은 수십년의 세월을 거슬러 눈내리던 화성의숙의 운동장으로 날아갔다. 곡절많은 정치생활의 파동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로스승은 아무런 설명도 주해도 붙어있지 않는 이 짤막한 말로 30년전에 있었던 나와의 대화를 결속지었다.
내가 화성의숙을 중퇴한데 대해서는 우리 어머니도 지지해주었다. 처음에 어머니는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말을 듣고 대단히 심각해지였다. 그러나 내가 중퇴사유를 솔직하게 말씀드리자 마음을 놓는것이였다.
《네가 학비때문에 자꾸 걱정을 하는데 사람이 돈때문에 주접이 들면 아무 일도 못한다. 학비는 어떻게 해서든지 댈테니 너는 그저 품었던 뜻을 꼭 이루어라. 이왕 새 길을 가려고 결심한바에는 걸음을 걸어도 큼직하게 걸어라.》 어머니의 말씀은 새로운 포부를 품고 무송에 돌아온 나를 크게 고무해주었다.
무송에 와보니 내가 소학교에 다닐 때부터 알고있던 많은 동무들이 살림이 구차하여 상급학교에 가지 못하고 가정에 파묻혀 갈길을 찾지 못하고있었다. 나는 그들을 깨우쳐 혁명의 길로 이끌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ㅌ. ㄷ》를 방금 조직하고 그 뿌리를 사방에 뻗쳐가려고 결심한 뒤여서 나도 무슨 일이든지 하지 않고서는 못견딜 심정이였다.
나는 소년들을 선진사상으로 교양하고 혁명의 길로 이끌기 위하여 무송시내와 그 일대의 애국적인 소년들로 새날소년동맹을 조직하였다. 그때가 1926년 12월 15일이였다. 새날소년동맹은 말그대로 일제를 타도하고 조국을 광복할 새날을 위하여, 낡은 사회를 짓부시고 새 사회를 건설할 광명한 새날을 위하여 투쟁하는 공산주의적소년조직이였다.
새날소년동맹의 결성은 타도제국주의동맹이 활동규모를 넓혀나가는데서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이 동맹이 내세운 구호도 대단하였다. 그때 우리는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이룩하기 위하여 투쟁하자는 구호를 내세웠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새로운 선진사상을 학습하고 그것을 광범한 군중속에 널리 해설선전할데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당면하게 수행해야 할 과업들을 제기하였다.
나는 새날소년동맹의 과업을 실현하기 위한 조직원칙과 사업체계, 동맹원들의 생활규범을 규정해주고 길림으로 떠날때까지 그들의 동맹생활을 지도해주었다.
1926년 12월 26일에는 《ㅌ. ㄷ》와 새날소년동맹을 조직한 경험에 토대하여 어머니를 도와 반일부녀회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후 혁명투쟁을 적극적으로 벌려나갔다. 그때 어머니는 무송현성안은 물론, 멀리 주변농촌의 넓은 지역에까지 다니며 도처에 야학을 내오고 조선녀성들에게 우리 나라 글을 배워주고 그들을 혁명적으로 교양하고있었다.
무송에서 얼마쯤 머무르다가 길림으로 들어갈 때 나는 약속대로 화전에 있는 김시우를 찾아갔다. 김시우는 김사헌선생이 우리 아버지하고 친한분이라고 하면서 그의 앞으로 편지를 써주었다. 내가 가면 학교에 입학시켜달라는 소개신이였다. 그것이 김시우와의 마지막상면이였다.
김시우는 내가 잊지 못하는 사람들가운데서도 가장 인상깊은 한사람이다. 그는 말이 적은 사람이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대중계몽과 후대교육으로부터 무기구입, 자금조달, 국내공작원들의 길안내, 비밀문건과 비밀자료들의 전달, 무장단체들의 통합과 행동통일을 위한 사업에 이르기까지 그가 관계하지 않은 분야란 거의 없다.
그는 아버지의 일을 잘 도와주었을뿐아니라 내가 하는 일도 성심성의로 뒤받침 해주었다. 우리가 《ㅌ. ㄷ》를 뭇던 날 밖에서 망을 봐주며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도 김시우였다. 김시우는 나와 헤여진후에도 영풍정미소를 계속 운영하면서 독립군에 식량을 대주고 조선인학생들에 대한 후원을 열심히 하였다. 중국에서 국내전쟁을 할 때에는 혁명후원회 위원장으로 화전에서 일본군대와 장개석군대의 침해로부터 조선사람들의 생명재산을 지키느라고 모진 고생을 하였다.
김시우가 조국으로 돌아온것은 1958년이였다. 한평생 민족을 위해 그처럼 많은 일을 하고서도 그는 그것을 한번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다나니 나도 그의 행처를 알수가 없었다. 그는 전천에서 중병이 들어 림종의 날이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는것을 알게 된 때에야 비로소 자식들앞에서 우리 아버지와의 관계, 나와의 연고관계를 이야기하였다.
그 말을 들은 아들이 깜짝 놀라면서 그런 깊은 인연이 있으면 왜 장군님을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는가, 장군님이 아버지를 만나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장군님이 지금 우리 전천땅에 와서 현지지도를 하고계시는데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아버지가 몸을 움직일수 없는 형편이면 우리 집에 모시는것이 도리가 아닌가고 들이댔다.
그때 내가 정말 전천군에서 현지지도를 하고있었다. 김시우는 아들의 말을 듣고 도리여 그를 꾸짖었다. 《내가 죽기전에 옛날일을 이야기하는건 너희들이 무슨 덕을 입으라고 그러는게 아니다. 우리 집 래력이 여사여사하니 너희들도 장군님을 잘 모시고 받들라는거다. 국사에 바쁘신 장군님의 걸음을 한시라도 지체시켜서야 안되지.》
그 로인성미가 원래 옛날부터 그렇게 고정하였다. 아들의 말대로 했더라면 그도 나를 만나고 나도 그를 만났을것인데 정말 아쉽게 되였다. 나로서는 평생 풀지 못할 한이다. 나는 화성의숙시절을 생각하고 《ㅌ. ㄷ》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김시우를 회고하군 한다. 김시우를 떼놓고서는 나의 화전시절에 대하여 말할수 없다. 우리가 화전에서 새 사조를 보급하고 《ㅌ. ㄷ》를 결성하던 잊지 못할 나날에 나를 도와 숨은 노력을 제일 많이 해준 사람이 바로 김시우였다.
《ㅌ. ㄷ》가 불패의 대오로 자라날수 있었던것은 김시우와 같은 성실한 인민의 지지를 많이 받고 있었기때문이였다. 나는 이런 인민의 기대를 가슴깊이 새기며 커다란 포부와 결심을 안고 길림으로 향하였다.
핵커 박사가 본 북의 핵 기술도 실은 90년대 기술
예정웅 국제정세분석가
새해 공동사설을 보면 북은 한반도에서의《전쟁이냐 평화》냐 《민족의 안보》문제를 중요하게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동사설은 오늘의 긴장된 정세 아래에서 인민군대는《주체적인 전쟁관점》을 안고 《고도의 격동상태를 견지》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서해 연평포격전으로 불안정한 정전체제의 모순이 표출되고 남한과 미국이 어느 때고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북침전쟁연습으로 민족적 참극을 막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노력을 끝까지 다 해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북은 21세기의 새로운 10년대는 민족분열의 비극을 끝장내고 희망의 년대, 통일과 번영의 년대를 오늘의 과업으로 민족중시의 입장, 자주통일의 입장에서 올해에 조성된 전쟁의 위험을 가시고 평화를 수호하여야 한다고 했다.
◑ 미래를 볼 줄 모르는 이명박 정부의 반북대결정책새해에도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화려한《립 서비스》와는 무관하게 전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우선 현인택 통일부장관은 “우리는 북의 책임 있고 진정성 있는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 “ 이것이 우리의 확고한 방향성”이라고 강조했다. 이것은 북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하고 있는 말이다. 대화와 협력하자는 북의 제의에 대결로 대답한 것이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반북대결 정책》과 《대북 붕괴전략》에 따른 《흡수통일》을 변함없이 추진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외교통상부는 "평화통일에 대한 국제적 공감대 형성"과 "한·미·일 공조와 협력 강화"등 반북 외세의존 정책을 중요한 과제로 설정했고, 국방부는 북 정권과 군을《적》으로 규정하였으며 "북의 도발에 철저히 대비하고" 당장 싸워도 이기는 전투형 군대"를 만들겠다는 전쟁불사 과제를 설정했다.
남한에 반북 우익 3인방인 현인택, 김성환, 천영우, 같은 반북보수우익들이 정부 요직에 진을 치고 앉아 있는 한 남-북간의 대화나 민족 공동번영을 위한 화해와 협력, 2000년 6.15공동선과 2007년 10.4정상선언을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이명박 정부의 반북대결정책을 보니 앞으로도 남북 회담이 열릴 가능성을 찾아 볼 수가 없다.남한과 미국은 북 힘의 실체에 대해서 솔직히 모르면 모른다고 시인해야 하는데 그들은 대화나 협상이 준비되어있지 않거나 북의 힘의 실체와 실상을 전혀 모르면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정부자체가 이 지경이니 남한 사회는 물론 정치권도 남북 사이의 화해협력이나 통일문제와 관련해 일종의 무감각, 무력감이 만연되어 있다. 활발히 전개되어야 할 통일논의는 엉터리 반통일 사기꾼들에 의해 사라지고 화해와 협력, 교류는 중요한 시점마다 동결 차단되고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의 무지와 무능한 대북정책에 분노를 느끼고 있다.
좀 더 큰 국제정치적 맥락에서 보면 이번 보스워즈의 동북아 순방은 특별히 중요하다.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3일부터 7일까지 남한과 중국, 일본을 차례로 순방하는 것은 6자회담을 협의하기 위한 것이지만 또한 그 속내에는 북-미간 양자회담 통보도 들어있다. 왜냐하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한반도 정세를 대단히 위급한 상황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급하지 않았겠는가. 한반도는 전쟁이냐 평화냐의 갈림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며 더 직접적으로는 북의 핵과 영변핵시설 충격 때문이다.◑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 ( Siegfried S. Hecker) 그는 북에서 무었을 보았을까작년 11월로 타임머신을 돌려보자. 도대체 미국의 지크프리트 헤커 박사 그가 누구인가? 지그프리드 핵커 박사 (Siegfried S. Hecker) 그는 미국 최초로 핵폭탄을 개발했다는 로스앨러모스 국립핵연구소의 명예소장이다. 미국의 핵, 전 세계의 핵을 다 꿰고 있는 미국의 유일한 국립핵연구소 명예소장이다. 그는 작년 11월 초순경, G20 서울회담 직전에 북의 초청으로 11월 2일에서 6일까지 평양을 방문한다. 북은 그에게 제한된 영변 핵시설 참관을 허용한다. 북의 핵 발전의 현주소를 일부 보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그는 잠깐 정신을 잃을 정도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영변의 경수로 발전소용 최첨단의 우라늄 농축시설, 사람들은 그가 영변에서 본 것이 고작 최첨단 원심분리기 2000여개로 생각 할 것이다.
지그프리드 핵커 박사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북의 새로운 시설에 깜짝 놀랐다》면서 《수백 개(hundreds and hundreds)의 원심분리기가 최첨단 제어실(an ultra-modern control room)에 설치돼 있는 것을 목격했으며, 이 같은 사실을 며칠 전 백악관에 보고했다》고 했다. 지그프리드 핵커 박사는 또 "북은 새로운 우라늄 농축시설에 원심분리기 2000대를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그 원심분리기는 미국. 독일. 네덜란드 3국의 우라늄 농축 컨소시엄인 유렌코(URENCO)가 운영하는 알메로(Almelo) 원심분리기(알메로 원심분리기는 초경량 튜브에 중력 상태에서 고속 회전하는 원통 회전체로 구성. 원심분리기 상단 파이프를 통해 육불화 우라늄(UF6)을 주입하고 원심력을 이용, 무게가 다른 우라늄-235와 우라늄-238을 분리하는 방식) <위키백과 참고> 보다 더 첨단화된 것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는 것이다. 그가 목격한 영변 핵시설의 원심분리기는 파키스탄이 개발한 P-1형 원심분리기가 아니라 네덜란드 알메로나 일본 로카쇼무라 원심분리기를 모델로 북측이 자체로 개발한 세계 어디에도 없는 최첨단 제어식의 우라늄 농축 시설이라고 했다.북의 전문가 이렇게 말 해준 적이 있다. 핵커 박사가 말 한 것은 우라늄농축이나 첨단 원심분리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핵커가 말하는 우라늄농축이라던가 가속 원심분리기가 대단해서 보즈워스가 한, 일, 중 3국 방문길에 오르겠는가? 아니다. 우선 북이 진행하는 우라늄 농축은 미국 정보국에서 이미 아는 사실이다. 1990년 중반에 우라늄 (UF6) “육불화 우라늄 기체”를 생산한다는 것은 이미 그들도 알고 있다고 했다. 우라늄 옥산살과 옥시산 분발가공에서 가속 《나노원심분리기》 공정도 다 알고 있으면서 지금 와서 부산을 떨면서 급하게 보즈워스까지 해외 여행길에 내보내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문제 때문이다” 라고 한다. 그러면 다른 문제란 무엇일가? 과연 우라늄농축 때문에? 원심분리기 때문일까?
남한의 국정원이나 대북전문가라고 자칭하는 자들은 잘 알아야 한다. 괜한 한 두 줄의 헛소리 하지 말고...우선 원심분리기하면 대체로 3가지로 유형이 있다. 일반《가스원심분리기》가속《 나노원심분리기》《000원심분리기》로 나누어진다. 여기에서 원심분리기 제형이 존재한다. 옥산살 분말 (oxlate powder)이라는 우라늄농축에서 직접 분리하는 플루토늄 (cplutonium)이 존재하고 이것을 《가스원심분리기》에서 기체로 변이시켜 가속《나노원심분리기》에서 고급한 (UF6)으로 바로 가공을 한다. 이것이 원자핵을 변이하는 공정이다. 이러한 첨단화되고 고급공정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최고의 기술로 인정한다.
그러면《가속원심분리기》에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변이된 핵 가스를 화합하는 공정을 수행한다. 여기서 팔불화 아메리슘 전이 기체 및 고체를 생산하고 다음은 《팔라라디늄 혼합 합금강》의 기초 가스기체를 생산하게 된다. 바로 이 기술이 4차원 핵기술이다. 이 기술은 미국, 러시아 중국이 1세기를 쉬지 않고 막대한 국가투자를 하고 연구해도 따라올 수 없는 기술인 것이다, 북의 현재 핵 연구는 세계에 없는 최상의 기술력이다. 미국, 러시아 중국 대국들은 따라오지 못한다. “어림도 없는 얘기이다”라고 그는 밝힌다.그러면 핵커 박사는 무엇을 보았을까 ? 바로 《가속원심분리기》와 《가속나노원심분리기》에서 제 4차원의 《금속 에너지》를 보았다고 말해야 한다. 그가 진짜 핵 박사라면 말이다. 미국도 폭포처럼 잘 정렬된 미 에너지국 소속의 우라늄농축 시설, 가스 혼합식의 원심분리기(Gas Centrifuges)를 사용한다. 그러나 가스 혼합식 원심분리기는 튜브의 크기가 엄청나게 크고 전기 소모량이 너무나 많은 낡은 구형 방식이다. 핵커 박사는 미국보다 엄청 뛰어난 영변의 최첨단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고, 잠시 정신을 잃었다(minds went blank)고 했다. 핵커 박사는 북 영변의 4차원의 그 금속을 어떻게 이해하였을까 ?
추정한다면, 핵커 박사가 잠시 정신을 잃을 정도의 최첨단 우라늄농축 시설이었다면, 이란이 이미 서방에 공개한 우라늄 농축 원심분리기와도 또 다른, 충격을 뛰어 넘어선 《공포급 핵시설》로 인식했음을 말해 준다. 만일 북측이 공개한 특수합금 알루미늄으로 제작된 튜브가 《나노급 가속회전》의 초정밀 원심분리기라면,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아메리슘 핵 총알》도 만들 수 있는 정교한 핵물질을 추출할 수 있는 시설을 말 한다. 여기서 하나의 가설을 세운다면 일체식 융합결정체인《금속의 변이 공정》을 본 것이다. 북은 신형무기나 세계 최첨단 과학은 잘 보여주지 않는다. 지난 것, 이미 오래전에 상용화 된 것이나 될 것을 공개한다. 어느 국가도 첨단무기나 새로운 과학에 대단히 이기적이다. 이기적인 것이 다 나쁜 것인가? 이 세상의 새로운 진보된 과학은 이기적인 노력과 시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다. 북이 영변 핵시설을 공개한 것은 이미 그보다 더 첨단화된 시설이 있기에 90년대 시설을 보여준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런 수준이 아니고서는 핵커 박사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을 터이니 말이다. 미 최고의 핵 과학자 지그프리트 핵커 박사는 그 순간 무엇을 생각 하였을까? 놀라움과 감탄과 찬사를 금치 못했을 것이다. “아! 이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그 기술을 갖고 있었구나...이들이 꿈의 에너지 세계 최고의 4차원 나노핵기술을 가진 국가이다. 미국이 북과 협조체제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적이 되면 안 되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자 ! 북의 이기적인 그 열매를 오늘에서 핵커가 알았던 것이다. 북은 50년 간 허리띠를 졸라매고 핵을 연구한 과학자들만 수천 명이 넘는다. 지그프리트 핵커 박사는 본국으로 돌아가 어느 누구를 먼저 만났을까.? 백악관의 오바마 대통령인가? 아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맴버들인가? 아니다. 지그프리드 핵커 그 사람도 유대계 피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만난 사람은 세계를 지배하는 유대의 왕이었을 것이다. 유대의 왕 그가 지그리프트 핵커 박사의 말을 듣고 아마도 그의 심장이 두근거리고 마구 뛰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죽어야하는가! 그것이 진정 사실인가. 핵커 박사는 "우리는 너무나 충격적인 광경을 보고 잠시 정신이 나갔었던 것 같다"고 고백한다. 미국 최고의 핵전문가들이 정신 나갈 정도의 북 최첨단 우라늄 농축시설을 본 것이다. 지그리프트 핵커 박사의 보고를 받은 백악관 안보회의와 오바마의 심정은 오죽했으랴!
오바마와 백악관 안보회의는 고민과 번뇌를 거듭한다. 오바마는 이 사실을 언론에 제한적으로 공표하라고 지시한다. 그 이튿날 뉴욕 타임즈는 지그리프트 핵커 박사의 북에서 보고 왔다는 북의 핵 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 실체가 인터뷰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뉴욕타임즈의 보도는 그래서 나온 기사이다. 핵커는 일부만 말했지만 말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1급 비상을 내린다. 초대형 첩보위성《델타4》를 무거운 로켓에 실어 긴급 발사한다. 지난 11월 21일 밤(현지시간)에 발사된 펜타곤내의 미 국립정찰국(NRO)소속 초대형 첩보 스파이 위성 《NROC-32.》를 쏘아 올린다. 너무도 급했던 것이다. 북의 영변과 핵시설을 감시하기 위해서....브루스 칼슨 NRO 국장은 “NRO의 20년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극비 임무를 띤 첩보 및 스파이위성”이라고 했다. 영변 최첨단 우라늄 농축 시설이 공개되면서, 북의 영변 핵시설과 다양한 4차원 핵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미국은 다급하게 스파이 위성을 쏘아올린 것이다.◑ 차기 정권에서 할 수 있는 남북간 화해협력 사업을 왜 그것을 지금 못 하는가자! 그러면 이제부터 한반도의 장래 문제를 전망해 보자 ! 년 초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렇게 지시를 했을 것이다. “선군정치의 핵은 민족 사랑의 정치이다. 남측이 대화에 나오도록 잘 설득 하라고...” 북은 2011년 초부터 대대적인 대남 대화공세, 대미 평화공세를 펼친다. “남한에 사는 동포도 우리민족 구성원들인데, 우리끼리 같이 잘 살아야 할 민족이 아닌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민족 사랑의 정신에 아마 북 간부들은 모두가 숙연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전쟁을 피하고 전쟁을 하드라도 피해를 극소화되어야 하기 때문에 바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대로 대남 대화와 협상의 총공세를 펼친다. 미국에게도 평화공세를 펼친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우리민족끼리인데 자존심과 고집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우리 같이 힘을 합쳐 잘 살아 보자”고 제기한다. 그것이 5일 ‘중대제의’가 나오게 된 배경일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 없이 그런 제의가 나올 수 없다는 것쯤은 이명박 정부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사실 북은 우리는 휴전 안 하겠다고 한마디 하면 그만이다. 분명 국제법이고 전시법이고 규제되는 것도 아니다. 이를 무시한다고 누가 뭐라고 할 수도 없다. 국제사회에 내 놓을 전쟁명분이야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단 하루면 아니 몇 시간이면 남한을 초토화 시켜, 접수하면 고만인 것을... 조선인민군의 전술군 무력만 갖고도 단 몇 시간이면 남한을 접수할 역량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토록 북은 6.15선언과 10.4이행계획을 같이 하자고 한다. 남, 북간 화해와 협력으로 통일하자, 이산가족방문, 금강산 관광 재개와 적십자회담 등 그리고 바다와 하늘, 땅의 모든 문을 열자고 한다. 왜 북은《대남 화평굴기》전략을 취할까?
조, 중, 동 보수우익 수구들이 말하는 주체적이며 자주적이 정치와 자력갱생의 경제체제를 갖추고 있는 북이 돈이 아쉬워서? 반북선동세력들이 말하는 북이 쌀을 얻기 위해서? 좁아터진 사고를 벗어던지고 크게 사고를 하라. 대결관점을 갖고 북을 바라보면 북의 진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그런 것이 절대 아니다. 북이 쌀이 필요하다면 미사일 몇 기만 내다 팔면 될 것이고, 돈이 필요하면 재래식 무기체계 1개 대대 분을 내다 팔면 족한 것을...국제무대에 나가 CNC 기계를 수출해만 해도 얼마든지 자금을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왜 북이 이명박 정부에게 대화와 협력을 하자고 호소하겠는가. 이명박과 수구언론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정치의 핵심과 의도를 잘 알아야 한다. 북은 분명히 2012년을 통일의 해로 규정하였다. 그것도 아주 패기와 용감성을 갖고 있는 젊은 대장을 전면에 내세워서 말이다. 북의 의도와 답은 명백한 것이다.
이제 미국과 남한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북은 그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북은 작년 12월에 리차드슨에게 이미 그러한 메시지를 주었으며 미국은 답을 내놔야 하는 것이다. 전쟁이냐 평화냐, 평화를 원한다면 빠른 시간 내에 오바마든 힐러리든 평양을 와야 하며, 그들이 오지 않겠다면 그때는 분명히 북은 어려운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북은 미국과 중국에게 《우리가 이 정도 인내 하는 것도 많이 참은 것》이라고 말한다.
중국은 6자 회담에 북이 참가하도록 하기 위해 최고위급에서 외교적 에너지를 다 쏟을 만큼 쏟았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미국은 6자회담 틀 내에서 북과 한자리에 앉는 걸 회피하지 말라’고 반복한다. 미국은 ‘남북 관계가 어느 정도 개선되면 6자 회담에 들어갈 수 있다’며 남북 양측에 공을 넘긴다.
분명한 것은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시간을 끌면 정말 무서운 결정의 순간이 멀지 않아 도래한다. 그 결정이란 연평 포사격 수준이 아니다. 무자비하고 전격적이며 섬멸적인 전쟁방식이 적용될 것이다.《선제타격》이다. 과연 무서운 선제타격 앞에 미국의 누구든 견디지 못한다. 국제관계와 정치를 안다는 사람들이면 능히 가려볼 문제이다. 결과는 무엇일가? 누구도 모른다. 분명한 점은 년 초부터 나이든 보스워즈가 노구를 이끌고 동북아의 전쟁위기의 평정을 위한 계획에 따라 한, 중, 일 순방을 나선 것이다. 지난 2011년 1월 5일 북의 정부, 정당, 단체 연합 성명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한 구절을 인용하자. 《...우리는 남조선당국을 포함하여 정당, 단체들과의 폭넓은 대화와 협상을 가질 것을 정중히 제의한다. 대결의 방법으로는 결코 북남관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무력충돌과 전쟁밖에 가져올 것이 없다는 것이 지난 3년간의 총화이다. 대화와 협상만이 현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출로이다. 우리는 최악의 상태에 이른 북남관계를 풀기 위해 당국이든 민간이든, 여당이든 야당이든, 진보이든 보수이든 남조선당국을 포함한 정당, 단체들과 적극 대화하고 협상할 것이다. 특히 실권과 책임을 가진 당국사이의 회담을 무조건 조속히 개최할 것을 주장한다. 북남사이에는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제기되는 문제들을 슬기롭게 해결한 좋은 전례가 있고 이미 채택한 훌륭한 원칙과 선언들이 있다. 북과 남이 마주앉으면 오해와 불신도 풀리고 평화와 번영을 위한 방도들이 허심탄회하게 논의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 집권 3년 동안 남, 북간에 대화다운 대화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남, 북장관급 회담도 없었다. 그러나 역사 발전은 언제나 고정불변한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체될 뿐이다, 결국 이명박 정부는 집권 5년 동안 반북대결정책으로 북과 제대로 된 대화 한번 해 보지도 못한 체 청와대를 떠나야 되겠는가? 차기 새 정권은 이명박 당신이 청와대를 떠나는 그 순간 당신의 그 모든 반북대결정책은 하루아침에 날아가게 될 것이다.
차기정권에서 할 수 있는 대북사업을 왜 이명박 대통령 당신은 그것을 지금 못하는가. 기회는 만드는 것이지 저절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끝)
북미 핵대결
국제정세분석가 최한욱
1990년대 초 소련이 붕괴되고 냉전이 해체되었다. 냉전은 미국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가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북한만 제거하면 성조기는 영원히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해 미국이 핵개발을 문제 삼으며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요구하자 북한은 한국에 배치된 미국의 핵문제를 동시에 거론하였다. 1990년 11월 16일 유엔 주재 북한 대사는 주한민군 핵무기도 동시사찰하면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사찰을 수락하겠다고 말했다.
“북한 외교관은 1990년 국제원자력기구 총재단 미팅에서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한 것은 남한의 미 전술핵과 미국의 핵우산이 제거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말한 적도 있어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 조약 사항을 지키지 않겠다고 했다. 그 같은 말은 반대로 해서하면 미국이 남한에서 전술핵을 철수할 경우 더 이상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 사찰을 지연할 명분이 없게 된다는 논리가 성립합니다.”
마이클.J.마자르 [북한핵 뛰어넘기]
“핵사찰 문제를 들고 나와 우리에게 부당한 압력을 가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조선반도를 비핵지대, 평화지대로 만들려는 것은 우리의 일관한 입장입니다. 우리는 핵무기를 개발할 의사도 능력도 없으며 공정성이 보장되는 조건에서는 핵사찰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는 것을 한 두 번 만 천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한다면 하는 것이고 안한다면 안하는 것이지 결코 빈말을 하지 않습니다.”
김일성 [1992년 1월 1일 신년사]
과연 부시(현부시의 아버지)가 김일성의 말을 믿을 수 있었을까? 물론 믿지 않았다.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겠다며 안전조치협정에는 서명하지 않는 북한의 태도는 미국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불안과 공포가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던 시점에 북한은 자신들의 요구사항들을 내놓았다. 북한은 부시정부에 팀스피리트훈련 중지, 남북미 3자회담, 한국에서 핵무기철수, 주한미군 철수, 핵불사용을 약속하라고 요구했다. 이중 3가지는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한 핵보유국의 의무사항이다. 그리고 미국에 대한 동시사찰을 국제원자력기구에 요구한다. 북한의 핵시설을 보여줄 테니 주한미군의 핵무기도 보여 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북한의 요구는 매우 정당한 것이었다.
핵확산금지조약의 의무는 비핵보유국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핵보유국들도 그에 상응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 핵보유국은 무엇보다도 비핵보유국을 핵무기로 위협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한반도에는 어떤 핵무기도 존재하지 말아야 하며 핵전쟁훈련은 더 더욱 용납될 수 없다. 팀스피리트훈련은 세계 최대 규모의 핵전쟁훈련이었다. 따라서 당시 핵확산금지조약을 위반하고 있던 것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는 매우 난처한 상황에 몰리고 있었다. 북한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북한의 핵활동을 감시할 수 없고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면 미국은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북한 앞에서 바지를 내리는 수모를 당해야 한다. 부시는 북한의 핵문제를 시비 걸려다가 오히려 50년동안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던 미국의 한반도 핵문제가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결국 부시는 북한과의 교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1991년 9월 27일 부시는 “한국에서 지상 및 해상 발사 단거리 핵무기를 모두 철수”한다는 전술핵무기철수선언을 발표한다. 그리고 92년 1월 6일 팀스피리트훈련을 중단하였다. 미국의 태도 변화를 확인한 북한은 92년 1월 30일 안전조치협정에 조인하였다. 그리고 4월 5일 북한의 최고인민회의는 이를 비준했다. 92년 9월에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했고 같은 해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남북한이 ‘비핵화 공동선언’을 합의함으로써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를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북한이 안전조치협정을 비준함에 따라 국제원자력기구는 92년 5월말부터 12월까지 5회에 걸쳐 북한의 영변 핵시설을 사찰했다. 사찰을 통해 국제원자력기구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오히려 미국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공식사찰이 끝나자 미국은 북한을 믿을 수 없다면서 특별사찰을 요구하였다. 미국의 특별사찰 요구는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국제원자력기구는 미국의 요구를 앵무새처럼 북한에 전달하였다. 당연히 북한은 반발했다. 북미대결은 서서히 불이 붙기 시작하고 있었다.
1993년 1월 20일에 취임한 클린턴은 부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악의제국을 무너뜨린 세계 유일의 대제국이 동방의 작은 나라 앞에서 쩔쩔매는 이유를 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집권초기 전임자들보다 강경한 대북정책을 선택하였다. 클리턴 정부는 특별사찰을 수용하지 않으면 선제공격도 불사하겠다고 북한을 압박하였다. 그리고 92년 중단되었던 팀스피르트훈련을 재개한다. 클린턴의 무모한 야심 덕분에 채 일 년도 안돼 북미합의는 물거품이 되었다.
클린턴정부는 북한에 미신고한 영변의 2개 기지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했다. 미신고 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은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미국이 군사력으로 압박하며 특별사찰을 요구하자 북한은 팀스피리트훈련이 시작되는 시점에 맞춰 93년 3월 9일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3월 12일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였다.
당시 세계 유일의 초대국을 자처하는 미국과 핵전쟁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다. 소련붕괴이후 미국의 독주를 막을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동구사회주의의 몰락으로 당시 북한은 고립무원의 상황에 놓여 있었고, 세계 어디에도 북한을 도와줄 나라는 없었다.
북한은 미국에 사전 통보하고 1993년 5월 29일부터 사흘간 모두 3기의 미사일 시험을 단행한다. 그 중 두 발은 하와이와 괌 앞바다에 떨어졌다.
클린턴정부는 경악하였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래 미국은 본토가 공격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적 없다. 결국 클린턴도 공화당의 전임자들처럼 무릎을 꿇었다. 대화 외에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직후인 6월 2일 뉴욕의 유엔 주재 미국대표부에서 제1차 북미고위급회담이 개최되었다. 북한 측 수석대표는 강석주 외무성 부상이었고 미국 측 대표는 로버트 갈루치였다.
당시 미국은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북한이 3월 10일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했기 때문에 유예기간 60일이 되는 6월 12일에는 탈퇴가 확정되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늦어도 6월 12일 전까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회의 첫날 갈루치는 느닷없이 북한 측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엄포성 발언을 내뱉었다.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취소하십시오. 3일 이내에 취소하지 않으면 무력행사 카드를 배제하지 않겠습니다.”
한마디 내뱉은 그는 벌떡 일어서서는 회의장에서 나가려 했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민 북한 측 대표 한 사람이 갈루치에 볼펜을 집어 던졌다. 그러자 갈루치가 멈칫 했다. 그 즉시 강석주는 이렇게 받아쳤다.
“이해하십시오. 오늘은 여기서 회의를 마친다고 발표합시다. 3일 후에 양국이 서로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한판 벌려 봅시다.”
볼펜은 갈루치에게 명중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갈루치도 등골이 오싹했던 모양이었다. 당황한 갈루치는 이렇게 답했다.
“아닙니다. 이 회의는 평화를 위한 회의입니다. 절대 깨지면 안 됩니다.”
김명철 [김정일 한의 핵전략]
결국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시한을 하루 앞 둔 6월 11일 북미공동성명이 채택되었다. 클린턴은 왜 공화당의 전직 대통령들이 동방의 작은 나라 앞에서 쩔쩔맸는지 마침내 알게 되었다.
이후 북미회담은 계속되어 1993년 10월 14일 미국은 팀스피리트훈련을 취소하고 북미 외교관계 수립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리고 1994년 2월 15일 북한은 미국이 원하는 7개 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수용하였다. 모든일이 원만하게 해결되는 듯 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94년 3월 개최하기로 한 북미고위급회담을 일방적으로 거부하고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하였다. 또다시 전쟁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북한에 쩔쩔 매고 있는 클린턴 정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미국은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김영삼은 서독처럼 한국이 북한을 흡수하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이 그렇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미국이 겉으로는 대화를 하고 있지만 본심은 다르다고 판단했다. 94년 3월 미국은 팀스피리트훈련 중단의 전제 조건으로 남북 특사교환이라는 엉뚱한 카드를 내밀었다. 김영삼이 끼어든 것이다. 결국 미국은 3월 11, 12일에 예정되어 있던 북미고위급회담을 취소하고 팀스피리트훈련을 재개하겠다고 북한을 위협하였다. 결굴 3월 19일 남북회담이 개최된다. 김영삼은 판문점에서 클린턴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주기로 작정하였다. 당시 한국 측 대표는 남북회담의 의제도 아닌 핵문제를 회담자에 끌고 나왔다. 남측대표는 “핵문제가 조속히 해결되지 않을 경우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팀스피리트훈련을 재개할 것이라고 북측 대표를 위협하였다. 이에 대해 북측의 박영수 대표가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응수한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애초 이 회담은 비공개로 합의되었다. 그런데 한국정부는 회담 장면을 녹화한 후 전후 맥락은 누락시키고 박영수대표의 “서울 불바다”발언을 교묘하게 편집하여 언론에 공개하였다. 불바다 발언은 마치 북한의 선전포고처럼 들렸기 때문에 한국은 발칵 뒤집혔다. 보수언론들은 대대적인 반북캠페인을 조직하였다. 북한의 호전성을 규탄하는 보도물이 홍수를 이뤘다. 난데없는 라면사제기 열풍이 한국을 강타하고 북한이 곧 밀고 내려 올 것만 같은 긴박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제 두 번째 조연인 국제원자력기구가 등장할 차례였다.
북한이 1994년 5월 12일 영변의 5MW급 원자로 핵연료봉을 교체하기 시작했다고 국제원자력기구에 통보하였다. 폐연료봉을 교체하지 않을 경우 체르노빌 참사와 같은 대형 핵누출 사고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규정에 따라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의 입회를 허용하였다. 5월 24일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이 평양에 도착하였다. 사찰을 마친 6월 6일, 국제원자력기구는 “연료봉의 추후 계측마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이 원자로에서 핵물질 전용이 있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없게 됐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국제원자력기구 이사회는 6월 10일 대북제재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북한은 3일 후인 6월 13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국제원자력기구 즉시 탈퇴를 선언했다.
이에 클리턴 정부는 영변 핵시설 폭격 계획을 수립하고 94년 6월 18일 개전을 결정한다.
94년 6월 한반도는 민족의 생존권이 벼랑 끝으로 몰리는 최악의 전쟁위기를 맞았다. 이미 미국은 6월 2일부터 매시간 단위로 한반도 상황을 점검하는 비상체제를 갖추고 인디펜던스 항공모함을 환태평양군사훈련에 참가시켰으며, 미 상원은 이미 퇴역한 고속정찰기 SR71을 복귀시켜 북한상공을 정기정찰하기 위해 1억 달러의 예산지출을 승인하고 예방폭격을 배제하지 않고 있음을 재확인하였으며, 미군 1개 사단 증파를 협의하는 등 군사적 대결상태를 준비해 나갔다. 또 존 매케인 상원의원 등은 “북한이 계속 버틸 경우에 대비해 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계획을 지금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언론이나 여론조사 등도 대화보다는 대결을 촉구하고 군사력 사용이라는 초강경 대결을 역설하였다.
강정구 [한반도 정쟁위기의 실상]
한반도 전쟁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94년 6월 16일 주한미사령관 케리 럭과 레이니 주한 미대사는 한국내 미국인들에게 대한 소개작전을 추진하기로 합의하였다. 럭은 자신들의 가족들에게 사흘 뒤인 일요일까지 한국을 떠나라고 했다.
하루는 보고를 받으니 내일 대사관 직원 가족들의 철수를 발표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전쟁 직전에 취하는 조처다.
남북에서 천만명에서 2천만 명이 죽을 것이다. 그 날 저녁 클린턴하고 32분 동안 통화했는데 대판 싸웠다.
김영삼
클린턴은 당장 북한을 폭격이라도 할 것처럼 온갖 허세를 떨었지만 속으로 떨고 있었다. 미국은 북한을 쉽게 폭격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이미 93년 5월 북한 미사일의 미 본토 공격 능력이 확인되었고 전쟁시뮬레이션 결과 미군의 피해가 너무 크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의 마지막 절차로 6월 15일 지미카터를 클린턴의 특사 자격으로 평양에 파견했다. 개전을 하루 앞둔 6월 17일 김일성과 카터의 교섭이 극적으로 타결 되었다는 낭보가 백악관에 날아든다. 클린턴은 재빨리 움직였다. 6월 20일 북미고위급회담을 재개하고 경제제재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북한에 보냈고 24일 북미 양국 당국자들이 뉴욕에서 회담했다. 그리고 6월 28일 한국 정부는 7월 25일 김영삼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할 것이라고 갑작스럽게 발표하였다. 전쟁전야의 한반도에는 갑자기 대화의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은 7월 8일 김일성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결국 미뤄지게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김정일 각하
각하
나는 나의 모든 직권을 행사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제공될 경수로발전소대상의 자금보장과 건설을 위한 조치들을 추진시키며 1호 경수로발전소가 완공될 때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제공될 대용에너지보장과 필요한 자금조성과 그 이행을 위한 조치들을 추진 시키겠다는 것을 당신께 확인하는 바입니다.
이와 함께 나는 이 원자로대상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책임이 아닌 다른 이유들로 하여 완공되지 못하게 되는 경우 나의 모든 직권을 행사하여 미합중국 국회의 승인 밑에 미합중국이 직접 맡아 완공하도록 할 것입니다. 동시에 나는 대체에너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책임이 아닌 다른 이유들로 하여 제공되지 못하게 되는 경우 나의 모든 직권을 행사하여 미합중국 국회의 승인 밑에 미합중국이 직접 맡아 제공하도록 할 것입니다.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미합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사이의 기본합의문에 지적된 정책들을 계속 이행해 나가는 한 이 행동방향을 견지할 것입니다.
경의를 표합니다.
미합중국 대통령 빌 클린턴 [1994년 10월 20일 위싱턴 백악관]
10월 20일 클린턴의 담보서한이 김정일에게 전달되고 다음날 북미기본합의서, 즉 제네바합의가 채택되었다. 클린턴은 북한을 굴복시키려 했지만 끝내 북한의 요구사항을 모두 수용하고 핵문제를 해결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제네바합의는 바로 북미관계 정상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서방진영에 북한이 곧 붕괴할 것이라는 3-3-3설이 유행하면서 클린턴 정부는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다. 미국은 제네바합의에 도장을 찍었지만 그 합의에 결과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003년까지 북한에 경수로 2기를 지어주기로 약속하였다. 아직 10년 이라는 긴 시간이 남아 있었고 2003년이 오기 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은 김일성 주석의 사후 북한 체제는 매우 불안정해지고 급기야 동구사회주의국가들의 경우처럼 붕괴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급기야 94년부터 해마다 대홍수와 가뭄이 연이어 북한을 강타하면서 북한 정권 붕괴의 꿈은 실현되는 듯하였다. 북한이 붕괴되면 연연히 클린턴은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다. 그걸 노렸던 것이었다.
제네바 합의 서명 후 6개월 안에 체결되어야 할 경수로제공계약은 1995년 12월에 되어서야 확정되었다. 1997년 7월에 가서야 경수로 부지 공사에 착수하고, 2000년 2월이 되어서야 경수로 발전소 본 공사가 시작되었다. 2003년 경수로를 인도하겠다는 약속은 이미 물 건너갔다. 아무리 빨라도 경수로 공사는 2007년에나 되어야 완공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클린턴 정부는 애초부터 제네바합의를 이행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3년만 참고 기다리면 94년 6월의 치욕을 모두 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북한은 붕괴하지 않았다. 그는 김정일을 잘 모르고 있었다.
미국은 또다시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북한과 약속한 시한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미국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또다시 미국은 책임을 북한에 떠넘길 무언가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소위 “금창리 핵개발설”이다.
금창리 핵개발설은 1998년 8월초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에 처음 등장하였다. 클린턴 정부는 금창리 핵개발설을 의도적으로 언론에 흘려 제네바합의 불이행의 책임을 북한에 떠넘기려 하였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북한을 공격할 명분을 쌓으려 하였다.
금창리 문제가 공론화되기 전인 98년 6월 초 미 공군 소속 4전투비행단은 플로리다에서 한국전쟁을 가정한 작전계획에 따라 장거리 핵투하 훈련을 벌였다. 이 작전에는 폭격기를 비롯해 F-16기와 공중조기경보기와 공중급유기 등 24대의 공군기가 참가하였다. 당시 미군은 이 훈련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클린턴은 북한과의 핵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북한의 대응은 미국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98년 8월 31일 경악할 만한 뉴스가 전쟁준비에 한창이던 백악관과 펜타곤에 날아들었다. 북한이 인공위성을 발사한 것이다.
북한이 지난달 31일 북위 40.8도, 동경 129.7도에 위치한 무수단리에서 성공적으로 최초의 자국산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1998년 9월 4일 러시아 위성관측센터 대변인
백악관은 혼비백산하였다. 북한의 장거리 탄도미사일이 최소한 미국의 서부 해안 도시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명백히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클린던은 북한과 전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1998년 8월에 있었던 북한의 대포동 1호 시험발사는 북한의 능력이 사거리 5,500 킬로미터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문턱을 넘어섰음을 과시하였다.
미 국가정보회의 의장 존 개넌
클린턴은 94년과 똑같이 행동하였다. 겉으로 전쟁 불사를 외치면서 조용히 북한과의 교섭을 준비했다. 미국은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 이후 대북선제공격을 명문화한 자계 5027-98 등을 언론을 통해 흘리며 북한을 압박하였다. 하지만 이미 클린턴은 북한과의 대결에 지쳐 있었다. 더 이상 힘으로 북한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북한은 궁지에 몰린 클린턴을 연속 타격하였다. 98년 12월 2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은 “선제공격은 미국만의 독점물이 아니며, 지구상에 조선의 공격을 필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고 경고 하였다. 다음날인 12월 3일 북한의 인민무력성 부상 전창령은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을 아예 날려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이미 싸움은 결판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그동안 미국의 약속 위반 행위에 대한 대가를 받아낼 작정이었다. 북한은 미국에게 금창리 시설에 대한 3억달러의 참관료를 요구했다. 클린턴은 어떻게든 금창리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결국 미국은 5억달러 상당의 식량원조로 관람료를 대체하고 99년 3월 금창리를 참관하였다. 그곳에는 거대하고 놀랄 만한 빈 동굴이 있었을 뿐이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광범위한 텅 빈 지하터널 단지의 일부임을 발견했다. 북미 기본합의를 위반했다는 결론을 내릴 증거가 없다.
1999년 5월 27일 미 국무부
미국은 금창리 의혹을 끌고 나와 결국 세계의 면전에서 망신만 당하고 말았다. 혹 떼려 다 혹 붙인다는 속담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페리보고서에 따라 99년 말 북미회담이 재개되었다.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변화에 따라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고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이 채택되었다. 10월에는 김정일의 특사로 국방위원회 조명록 제1부위원장이 백안관을 방문하고 북미공동코뮤니케가 발표되었다. 곧이어 미 국무장관 올브라이트가 평양을 방문하였고 2000년 11월 클린턴은 미합중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역사적인 평양 방문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2000년 11월 미국의 대선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져 평양 방문은 역사속에 묻히고 말았다.
위의 사진은 고 조명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차수
북, 잠수함 전력과 특수전 부대 전투
예정웅 국제정세분석가
◐ 북의 인민군대의 고유한 특질과 기질북의 특수전 요원들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북의 군대의 기질, 북의 군대의 고유한 특질을 한번 짚고 가자. 물론 이 글은 북의 자료에 토대하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우리 인민군대는 명실공히 당과 수령의 군대, 최고사령관의 군대로서 혁명의 수뇌부 “결사옹위정신”이 꽉 들어찬 충성의 혁명대오로 되고 최고사령관으로부터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전군이 혁명적 동지애에 기초하여 혼연일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북의 군대는 어느 나라 군대와도 구별되는 자기의 고유한 특질,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 첫째가 바로 수뇌부 결사옹위 기질이다.북의 군대에는 지난 한반도 전쟁 시기 수뇌부가 있는 원산-평양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기 위해 고지의 기관총 화구를 몸으로 막아 부대의 진격로를 열어놓은 이수복, 영도자와 시민들이 살고 있는 평양을 보호하기 위해 비상탈출하지 않고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불타는 비행기를 조종하여 마친 길영조, 뜻밖의 정황으로 하여 항일혁명 전통의 구호나무들이 산불로 손상될 위험에 처했을 때 그것을 자기의 몸으로 지켜내고 숨진 20여명의 무재봉 병사들, 북에는 이렇게 수뇌부와 혁명전통을 결사옹위하는 한길에 자기 한목숨 서슴없이 바친 유명무명의 병사들이 많으며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그리고 북의 군대는 혁명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진영 사회의 군대에도 소위《군인 기질》이라며 전투정신문제를 오래전부터 중시해왔고 최근엔 정신전력 강화를 부쩍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라크전 참전 미군들 중 자살자, 정신질환자, 군대 부적응자가 늘어나는 것을 보면 정신전력 강화 수준에 의문표를 붙이지 않을 수 없다.북한 주민들 대부분이 혁명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난의 행군 그 엄혹한 시기를 큰 변화나 이탈 없이 이겨낸 것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그 중에서 인민군대의 혁명적인 기질은 차원이 다르다.
북한에서는 태생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노동이나 학습, 과학탐구는 사람들이 자기의 땀과 노력, 지혜와 재능으로 사회의 물질적 재부를 창조하고 과학의 요새를 점령하기 위한 활동이라면, 전투 활동은 군인들이 적들과의 대결에서 자기의 생명을 아낌없이 바쳐 당과 수령, 조국과 민족,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한 활동이다. 그리고 북의 군대는 전투 활동에서 “격렬성”과 “간고성”, “희생성”을 특히 강조한다. 이렇듯 북의 군대는 그 조직형식과 존재이유에서부터 사회의 다른 집단들과 구별되는 군대이다.
그가 수행하는 사명과 임무의 중요성으로부터 정연하고 잘 째인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다. 높은 조직성과 규율성이 없다면 성과적 활동 담보가 어렵기 때문이다.
북의 군대와 같이 째이고 정연하며 엄격한 조직체계를 가진 사회적 집단은 이 세상에 없으며 인민군대처럼 높은 조직성과 규율성을 요구하는 사회적 집단은 북에서도 없다. 북의 군대는 상대와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야 마는 백두산 혁명 강군의 견결한 전투적 기질을 전통화한 군대로서 사회주의 강성대국건설과 조국보위 등 북한의 선군 혁명에서 주력군 중의 주력군으로 인정받고 있다.특히 북은 군대는 세계적 판도에서 반제자주 투쟁의 선봉에 서 있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며 북의 군대에는 항일혁명 전통의 비상한 군사전법인 축지법(?)이 있다. 우리 여기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사색해 보자. 미 제국은 북에 대해서 무언가 모르고 있다.
미 제국의 최대 약점은 무엇인가? 미 제국은 북을 잘 모르고 덤볐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은 북의 군사정보를 흐릿하게 알고 있다면 당연히 모험을 할만하다. 미국은 정치적 문제를 제쳐놓고라도 북이 정말로 우주무기체계인 미확인 비행물체를 가지고 있는가, 진짜 핵융합에서 나온 이온무기체계로 무장되어 있는가? 그들은 여기에 관심을 집중한다. 이 진실을 알아낸다면 미군은 죽어도 좋다는 것인가? 그렇다. 미국은 세계 반제자주의 선봉에 서있는 북을 여러모로 알고 싶어 한다. 그래야 미 제국이 내일의 세계의 패권을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미 제국의 군산복합체의 목표이자 한미연합침략 훈련의 진짜 목적이다.반대로 북은 이것을 기회로 이용하여 가장 대담하고 통이 크게 전진해 나간다. 그렇다면 미국과 전 세계를 지배하는 유대세력의 진짜 약점은 무엇인가? 바로 미본토의 안전이다. 북-미간에 전쟁이 난다면 북은 비대칭 전략과 비례식전략을 동시에 구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글에서는 그런 전략의 일환인 북의 특수부대의 기질, 북 인민군 특수부대 요원들의 고유한 특질과 세계 제1위의 잠수함전력에 대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 북, 잠수함전력 세계 1위, 특수전 요원들 세계1위 북의 해군사령부에는《수로국》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수로국》의 사명은 한반도와 세계 곳곳의 바다 길을 개척하고 잠수함이 잠복 은신해 있을 만한《안전지대》, 바다 밑 구석을 찾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북의《수로국》이 그려놓은 남한의 동, 서해와 남해의 바다 속 깊은 해저 지도는 잘 그려져 있으며 새까맣게 점이 찍혀 있을 만큼 구체적이라고 한다. 매 점마다 번호를 매겨놓고 그 번호수가 얼마나 많이 늘어갔는지... 남한의 수평선 바다 밑에는 지금도 북의 각 종류의 잠수함들이 요소요소에 잠복해 있다고 한다. 얼마나? 그 숫자는 비밀이라 필자도 모른다. 그들은 3개월에 한 번 씩 교대하며 노출되지 않으려고 일단 작전지역에 들어가 매복과 함께 시동을 끄고 배터리로 3개월 동안 버틴다.
3개월, 그것이 쉬운 일인가? 그들은 고도의 경각심을 갖고 전파를 수신하고 작전한다. 잠함내의 그 좁은 공간에서 쉴 참에는 비디오도 보고 영화도 보고 커피와 차를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정규학습도 한다. 그렇게 3개월 동안 최악의 조건 속에서 잠복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얼마나 불편했으면 귀항할 때 잠수함의 특수전 요원들이 제 발로 걸어 나오지 못하고 사람들이 들어가 부추겨 꺼내와야 할 정도라고 한다.
상상해 보라. 바다 밑 잠수정 그 좁은 공간에서 3개월이라니...이들 잠함 특수전 요원들의 정신적 사상적 투쟁의 기질이 이렇다. 최고사령관 결사옹호정신과 사상으로 단련된 철의 인간들만이 견딜 수 있는 부대가 잠수함특수전부대인 것이다. 오래전부터 북에는 스파커(sparker)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것을 연구하기 위해 수백만 달러를 써가면서 북의 국방과학연구소는 마침내 2002년 이 설비를 완성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선물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스파커는 잠수함 침투를 위한《해저측정설비》를 말한다. 배 밑에 장착하고 지나가기만 해도와 해저 밑의 염분농도, 해저의 땅, 주름, 물고기 Ep의 이동까지 모든 정형을 낱낱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스파커의 결과물에 따라 잠수함 통로가 열리게 된다.
대체로 잠수함에서 사용하는 탐지 수단은 음파이다. 염분농도가 짙으면 짙을수록 음파를 더 잘 잡아먹기 때문에 잠수함의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염분농도를 따라 잠수함 통로를 개척하며 또한 바다 밑 바위 밑이나 동굴 같은 안전지대에 매복해 숨기도 한다. 이 염분농도는 계절에 따라 차이가 남으로 계절마다 탐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북은 지금껏 이 스파커로 남한의 해저 전체를 탐지해왔으며 육지보다 바다 밑을 지형을 훤히 꿰차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물론 남한 해저만 탐지한 것이 아니라 일본열도의 해저와 해협, 태평양 해저, 미국 영해의 해저까지도 잠함의 통로가 마련돼 있다고 한다.
이 지구상에 어느 국가의 국경이나 경계를 무시하고 여권이나 비자 없이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통로가 두 군데 있는데 바로 바다 밑 해저와 우주공간이다. 지금은 국제해양 규범이 많이 변화되어 12해리까지 당사국의 영해이고 그 너머 200해리까지는 배타적 경제수역이다, 즉 EEZ 라인이 되고 있다.
북 해군의《수로국》은 모든 지역을 완전히 탐지해 낼 뿐만 아니라 침투도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잠수함 전력만 갖고도 조국통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로 북의 잠수함 부대와 잠수특수전 요원들의 정신력과 실력은 세계 제1위 최강이라고 한다. 해양 전투 역사상 독일은 2차 대전 때 4년 동안 1000톤급 유보트를 1000여척을 생산해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폈다. 북의 잠수함 부대가 바로 제2의 유보트 부대들이다.
진짜 전시에 북의 잠수함 부대에 의해 미 해군과 미국의 해상 보급로는 완전히 차단당하게 되어 있으며 남한 해저에서는 미국의 항모나 잠수함, 이지스함, 구축함은 임의의 순간 순식간에 걸레조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실례를 들면 85년 구소련의 (키예프급 )대잠 항모와 4척의 대잠, 구축함들과 북의 (로미오급) 4척이 동해에서 모의 전투《훈련》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구소련의 키예프급 항모는 온 몸이 잠수함 탐지기구로 뒤덮여있고 대잠헬기를 수십 대 데리고 다니는 그야말로 잠수함 킬러라고 한다.
거기에다가 대잠 전문 구축함 4척까지 함께 호위작전을 폈으니 당연히 모두가 구소련이 연습훈련에서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결과는 북의 로미오급 디젤 잠수함 4척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 얘기는 지금도 러시아 해군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구소련 해군이 놀랐다는 것이다.
키예프급과 대잠 구축함들이 격침 판정을 받자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면서 북 잠수함이 실제 자신들을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 보자며 부상을 요구했다 한다.
그러나 북의 로미오급 잠수함들은 불과 300미터 전방에서 괴물처럼 떠올라 구소련 장교들을 아연 실색케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로미오급은 구소련에서 최초 생산된 것이며 로미오급의 특이한 음향은 구소련이 제일 잘 알고 있다는 것인데-잠수함 마다 자기만의 특이한 음향이 있다고 함- 즉, 북 로미오급은 새롭게 개량된 것이었다. 소음을 더 조용하게 만드는 그 기술은 북 자체로 개발한 것이라고 한다. 바로 북의 유고급 잠수정의 초승달 모양의 이중 스큐류와 같은 모형은 세계 어느 나라도 없다는 것이다. 잠수함 소음의 근원인 스큐류 제작 기술은 정말 어려운 기술로써 남한은 손도 대지 못하는 것이며 당시 일본도 초보적인 기술밖에 없었고 한다. 그런데 북이 잠함 스큐류 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북은 이미 80년대 구소련 해군도 전혀 눈치체지 못하도록 중형급 잠수함의 큰 스큐류를 개량하고 있었다고 한다.
북의 모든 무기는 주체적인 자기식의 원천기술에 외국의 기술은 참고한다. 물론 남한의 국군 잠수함도 뛰어난 작전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미군과의 연습훈련에서 국군의 작은 돌핀급 잠수함이 연습 훈련게임을 하는 족족 바로 앞까지 침투하여 파괴시키는 전과를 올리자 미군이 짜증과 화를 내기까지 해서 나중엔 국군 측에서 미군측에 일부러 공격 실패라고 통보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소형 디젤 잠수함이라고 해서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것, 북 잠수함 부대가 연습훈련게임에서 구소련의 대규모 함대를 격파했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당시 한미연합 사령관 라포트가 북의 특수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솔직히 말해서 북의 잠수함 특수부대 등 북의 특수부대 요원들이야말로 실력은 세계 최고입니다”라고 했다.
북의 잠수함은 엄청나게 많다. 90년대 까지만 해도 중국 미국 러시아 다음이라고 했다. 상어급, 유고급 등 소형 잠수함까지 합치면 세계 1위라는 것. 잠함은 작아도 깔보면 안 된다는 것, 왜냐하면 작아도 어뢰는 같은 것을 쓰기 때문이다. 실제로 4만톤급 전함도 2차 대전 때 조그만 잠수정한테 당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북의 잠함은 매일 동해안 해저를 왔다 갔다 한다고 한다. 가끔 동해안 모래밭에 의문의 발자국을 본적이 있는 남한의 해안 초병들이 있을 것이다. 강원도 북부 고성에서 속초 등 해안을 따라 두 겹 세 겹의 철조망이 처져있다. 그만큼 북의 특수부대 요원들의 침투가 가장 쉬운 곳이 서해안이 아니라 동해안이라는 것이다. 특수전 요원들이 안방 드나들듯 드나들었다고 한다.북의 고물 잠함이건 최신형 이온잠함이건 미군과 남한 해군은 그것을 못 잡는다고 한다. 구소련 항모를 제압했던 과거 북의 주력 잠함이었던 로미오 급(1800톤급) 잠수함은 중국에서 들여온 게 16척이나 되며 자체로 제작한 것이 15척 등 이미 30년 전에 31척이나 보유하고 있었으니, 2011년 21세기에는 더 말해 뭐하겠는가.
북이 핵잠수함을 보유한지 20년이 넘었다고 하며, 지금은 어뢰도 최신형의 어뢰를 장착했고 이온 스텔스 잠수함의 경우엔 해양 포브스미사일로 무장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부산과 시모노세끼 왕복 페리호 운항선에 주한미군 가족들 수백명씩이 탑승해 비상시 철수작전 훈련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원인모를 이유로 페리호가 표류하거나 기관고장을 일으키고 선체 앞부분이 찌그러지고 표류했다는 신문 보도를 접한다. 그리고 사고원인이 고래나 상어와 충돌 때문이라는 보도를 접했을 것이다. 그게 사실일까? 잘 사고해 보라. 그곳은 물살이 쌘 해협이며 고래나 상어의 서식지가 아니다. 미국 민간인들이 철수작전 연습에, 어느 소형 잠함이 미 태평양 사령부에 보내는 ‘까불지 말라’는 경고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북은 가상천외한 주체적인 자기식의 전략 전술을 가지고 있다. 북에 무진 막강한 군력의 힘이 없었다면 미국은 물론 중국이나 러시아도 북을 무시했을 것이다. 실제 미국은 중국의 힘을 빌려 북을 고립 압살시키려는 갖은 모략책동 벌려왔다. 만약에 북의 선군정치가 없었더라면 북의 안보가 침해당하는 수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은 북을 고립 압살 붕괴시키기 위해 별 별 머리를 다 쓴다. 미국은 중국의 힘을 빌려 북을 고립 압살시키려는 갖은 모략책동 벌려왔다. 미국은 러시아까지 반북에 이용하려고 했다. 북은 결코 당하고만 있을 나라가 아니다.지금도 미 제국주의자들의 그 음흉한 붕괴전략은 더 지능적이고 노골화되고 있다.
북이 핵과 4차원의 군사과학 기술과 힘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남한도 지금처럼 살지 못하고 벌써 망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북이 이라크나 아프칸, 오늘의 리비아처럼 힘이 없고 허약한 국가였다면 미국에 의하여 침략, 점령되었을 것이 자명하다. 그렇게 되면 제국주의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이이제이 전략 견지에서 보더라도 남한의 활용가치는 사라지게 된다. 토사구팽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미국이 이라크나 약소국을 침략하는 것을 보면 어떤 이성이나 선의를 기대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미국이 북을 점령하고 나면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면 남한도 그야말로 미국의 직접 신식민지 통치 하에 자주권은 말살하고 완전 식민지노예로 삼을 수 있으며 특히 자신들을 끝까지 괴롭히 우수한 혈통을 가진 민족이었다는 점에서 아예 한민족을 회생불능 수준으로 전멸시킬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주장이 많다. 아메리카 인디언, 하와이 원주민들에게 어떤 악행을 가했는지, 그리고 지금도 그런 악행에 대해 미국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만 봐도 이는 결코 무리한 억측이 아니라고 본다. ◐ 북의 특수전 요원 선발 방식조선인민군의 특수부대원이 되려면 1년간의 기초훈련을 통과해야 한다고 한다. 저격여단도 마찬가지이다. 1년간의 혹독한 기초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되면 또 새로운 훈련이 기다린다.
저격여단은 개전 시 남한 국군으로 위장해 활동하거나 민간인으로 위장해 침투하는 훈련을 받는다. 남한 말씨에 국군 복장, 영락없는 남한의 군인, 공무원이거나 평범한 보통의 사람이다. 민간인 위장은 각양각색이다. 소지품은 단출하다. 미국의 그린베레 등 특수전 요원들처럼 주렁주렁 무전기나 방독면 그런 것을 달고 다니지 않는다.북의 특수전 요원은 계란만한 고성능 폭탄, 칼, 권총 그 정도이다. 나머지는 자신의 실력으로 싸워야 한다. 권총 사격 연습은 50m 거리에서 초속 4m로 움직이는 목표물 사격, 20발 사격 시 15발 적중이면 휴가를 갈 수 있다. 보통 사람은 거의 못 맞춘다.특수부대 저격여단은 소수로 움직이고 최정예 요원들이라 상대하기가 매우 어렵다. 남한 군복을 입고 소총부터 공용화기까지 남한 군대의 무기를 사용한다. 훈련도 남한과 같은 방식으로 하고 심지어 군가며 얼차려까지 국군과 똑같이 한다고 한다.
북의 특수부대가 왜 강하냐 하면 물론 훈련도 강하지만 선발 자체가 다른 나라하고 완전히 다르다. 사상성이 최우선 이다. 북의 특수부대원이 되려면 일반부대에서 4년 이상 근무한 병사 또는 하사관이 부대장의 추천을 받아서 1년간의 특수부대 훈련소를 통과해야 한다. 즉, 북 특수부대 1년차는 6년째의 군대 밥을 먹는, 남한 군으로 치면 중사, 상사 급 대원인 것이다. 북의 특수부대 기초 훈련소는 매우 혹독한 훈련을 각오해야 한다. 적당이 한다가 없다는 것이다. 통과하기 쉽지 않다. 그리고 평균이 15년 이상을 복무한다. 총 년 수는 거의 20년이 넘는다.
그러니 모든 면에서 귀신이다. 1년차가 벌써 남한 군 중사, 상사 급인데 거기에다가 15년 더 훈련받으니 사실 20년 군 생활 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 특수부대는 사실 따라 올 수가 없다. 특수요원 5년차면 혼자서 남한 군 1개 중대 정도는 해치울 수 있어야 한다.이는 북이 특수전을 매우 중요시하는지 한다는 증거다. 북의 1년차 대원(특수부대 6년째)이라도 절대 무시하지 못한다. 5년차 정도 되면 거의 특수전 요원의 전투기질은 신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보면 된다. 특히 북 특수부대는 2년 간격으로 규정에 미달되는 요원은 탈락시킨다. 즉 1, 2년차 규정치가 있고 3, 4년차 규정치가 있으며 조금씩 규정치가 올라간다. 미달자는 일반부대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물론 시험을 거쳐 다시 복귀는 가능하다. 즉 철저한 실력제다. 미군 특수전 전문가가 보는 북의 특수전 부대와 남한 특수전 부대 차이는 1 대 2~4정도로 본다. 즉 북 특수 부대원 1명이 남한 공수 2~4명과 맞먹는다는 얘기다.
훈련 내용도 북 경보병들이 남한 공수보다 훨씬 힘들다. 남한 공수부대는 25kg 군장 메고 120km 하루에 돌파하기 어려울 것이다. 북에서는 그것도 2년차 규정이다. 3-4 년차는 돌파 거리가 더 많다 130km 훈련소에서 100km 통과가 기준 즉, 훈련소에서 통과해 1년차로 와서 2년 동안 연습해 20km 를 더 뛰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일반부대의 경보병 대대 정찰중대, 정찰소대 같은 곳으로 가야한다 5년차들은 훈련 시 20kg 군장 메고 150km 산악 행군이다. 3일을 계속해야 한다. 산악 행군 못하면 역시 탈락이다. 그리고 남한은 의무복무 규정상 군대에 끌려간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북에서는 앞으로 인생과 직결된 곳이다. 즉 군 제대 시 30프로가 당원증을 받게 되는데 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배급우선, 주택우선 배정. 혁명가 대우를 받는다. 그러니 군 생활을 열심히 한다.
북의 인민군은 세계 유일하게 장교는 100%사병에서 된다. 즉 장군들도 모두 일, 이병 출신들이다. 그러니 장군이나 사병이 일심동체다. 서로 특수부대 갈려고 열심히 한다.
그리고 다른 군대와 다르게 정년이 없다. 진급 못해도 평생 장교다. 그러니 장교 되려고 사병들 나름대로 열심이다. 그리고 제대를 해도 같은 부대는 같은 직장에 배치된다.
즉 예비군의 조직 자체가 현역과 별 차이가 없다. 잠수함 부대 출신들은 잠수함 제작 조선소에 가고 기갑 부대 출신들은 탱크 장갑차 공장에 배치되고 군대 고참이 직장 상사가 된다. 그러니 북 예비군 민방위 부대가 얼마나 무서운지 감이 올 것이다. 북 민방위군은 현역하고 합치면 1000만이 넘는 잘 째인 군대가 되는 것이다. 미국이 북하고 대결해서 이기려면 북처럼 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이나 남한은 그게 쉽지 않은 구조다.
왜 남한군은 탄약을 2주치만 가지고 있는지 감이 올 것이다. 남한군대의 임무는 미군이 올 때까지 시간 벌기용 군대라는 것은 국군에서 복무해본 병사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북은 미국과 전혀 다른 제도 즉, 선군정치 국가이다. 미국이 사상 기술적으로, 정신적으로 강철같이 단련된 이런 기질의 북 인민군대를 이길 방법이란 핵공격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보다 더 앞선 4차원 핵무기체계까지 갖추었으니 그것도 사용할 수 없다. 결국 미국은 북에 항복하는 것만 남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그래서 미군이 팀스피릿트 훈련을 했던 것이며 지금은 키리졸브-독수리 즉 전술 핵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북이 아무것도 아닌 군대인데 미군이 왜 5KT 203MM 전술핵 대포 쏘고 하겠는가. 북과 남한이 전쟁하면 미군은 물론 남한 국군도 30분이면 엄청난 피해를 피치 못하게 된다.◐ 북의 특수전 요원들의 남한 합법훈련 실례를 들어 보자.
강원도 잠수함 사건이 났을 때의 일이다. 북 인민군 잠수함부대 정찰팀은 잠수함이 좌초되자 불필요한 남북교전으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그랬던지 대부분 자결을 하고 딱 3명이서 보고를 위해 산을 따라 북상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국군 5개 사단 병력과 수만 명의 예비군이 쳐놓은 몇 겹의 포위망을 뚫고 남한군을 따돌리거나 전투를 하면서 조금씩 북상한다. 남한 군 5개 사단이 갈팡질팡 한다. 헬기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는 공수특전단도 땅에 발을 딛기 전에 저격당했는데 후에 보니 모두 이마 한 가운데를 명중시켰었다고 한다. 그들은 진부령까지 넘어간다.
휴전을 앞에 두고 3명이 긴급 토론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게 해서 2명은 총알이 다 떨어질 때 까지 5개 사단을 온통 휘저어 놓으며 싸우기로 하고 그 사이 한 명이 휴전선을 넘기로 토론을 종결한다. 2명은 전투 중 남한 군에게 사살될지언정 절대로 투항은 없다. 마지막 순간엔 자결하기로 결정을 본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저항하면서 1명을 기어이 월북에 성공시킨다.
1명을 보내기 위해 2명이 나뉘어 작전한다. 특수요원 2명 대 5개 사단의 대결이었다. 결과 오늘은 이 산속에서 내일은 저쪽 산 아래 동굴에서 5개 사단 병력을 분산시켜 피로와 극도의 혼란을 야기, 녹초를 만들어 놓는다. 그 사이 1명은 귀환해 전과 보고를 한다. 모두 영웅칭호 받는다. 그들은 북의 정찰국 소속 586 부대 특수전 요원들이였다. 정찰국은 평양에 지휘부가 있고 정치부, 정보부, 특수부, 기술통신부, 훈련부, 외국어 학교가 있다. 이외의 조직은 모두 특수부대들이다.
이들은 싸움만 잘하는 것이 아니다. 인텔리들이다. 외국어에 능통하고 매우 우수한 인재들이다. 고도의 기술과 전투실력을 갖고 있으며 지적이며 높은 사상성을 갖고 있다. 못하는 것이 없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힘과 모든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야 말로 인민군 고유한 특질과 기질의 전형이다. 특수부대 요원이 되겠다고 훈련소에 입소하면 정문에서 인민군의 떼를 벗는다. 남한 군인이 되어야 한다. 군복을 벗고 국군 군복을 지급받으며 부대편성도 새로 한다. “양덕 훈련소의 경우 한꺼번에 1개 연대가 6개월 간 훈련을 받는다.모든 일과는 국군의 그것과 동일하다. 심지어는 속옷도 남한제품(쌍방울 표)을 입는다. 북의 특수전 요원들은 계급에 따라 국군 계급장을 부착하고 침투지역 별로 부착하는 부대 마크도 다르다. 훈련기간 인민군에서 쓰이는 용어는 절대 사용하지 못한다.
행진을 할 때도 국군 군가들을 부르고 개인화기나 공용화기 모두 국군이 사용하는 무기를 쓴다. ”얼차려를 받을 때도 ‘원산폭격’ ‘한강철교’ ‘매미’ 등 국군 얼차려를 똑같이 한다. 주목할 점은 합법훈련소에 각 군 사령부 등 주요시설과 똑같은 모양의 남한 건물을 세워 집중적인 파괴훈련도 한다는 사실이다. 국군의 훈련이나 실탄사격, 한미합동 군사훈련 등의 모습을 담은 영상들도 보여준다.미 국방부 그렉슨 차관보에 따르면 북이 보유한 AN-2는 주요 골격을 제외하곤 목제구조로 만들어졌으며, 외피도 금속이 아닌 캔버스 천으로 둘러있다. 때문에 레이더의 전파가 반사되지 않기 때문에 되돌아온 전파의 시간을 계산해 항공기의 위치를 알아내는 레이더로는 AN-2를 탐지하기 어렵다고 한다. 북은 최대 300여대의 AN-2(스텔스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서울신문, 2010.09.18) 지난 2008년 10월 기사를 살펴보니 이런 내용도 있다. 군의 한 정보소식통은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북이 서해 상공에서 AN-2기를 이용해 미사일을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면서 "정보 당국은 북이 병력 수송과 낙하산 강하훈련용 AN-2기에서 핵과 생화학 탄두를 탑재한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능력을 이번에 입증한 것으로 보고 AN-2기의 위협을 새롭게 분석하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세계일보 2008-10-09) 헝겊과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AN-2기가 미사일 2기를 탑재하고, 핵과 생화학 탄두를 발사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했다니...
북의 국방력은 자연을 이용한 신묘한 무기체계가 50%나 된다고 한다. 남한 군 당국 발표였으니 믿어야 되지 않겠나. 북의 스텔스기는 레이더에 백지로 나오고 실체를 본 사람도 없으나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어야 한다. 스텔스기가 뜨는 것 같고, 그러다 보니 미 국방부는 고육지책 끝에 AN-2임에 틀림없다고 결론 내린 것 같다.(탈북자들의 증언 인용하여 추리한 것)북의 특수전 요원들의 작전수행범위는 세계 어디든지 침투 할 수 있다. 한반도를 넘어서서 일본, 미국의 하와이 본토군기지들까지 확장된다. 일본 방위청은 북의 특수전에 대응하는 전략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찰국의 특수부대 요원들은 해외침투 작전도 한다. 유사시 일본열도, 오끼나와, 괌도, 하와이까지 침투한다. 미 서부해안 침투까지도 가능하다.세계 어느 곳이든 명령만 내리면 침투가 가능하다. 이들 부대와 요원들은 화학무기와 생물학무기로 중무장하고 있다. 이 정찰국은 전부 다른 부대에 연계(ATTACH) 되어 있다. 즉 전방 4개 군단에 정찰여단과 정찰대대의 형태로, 직속 정찰국 중에서도 최정예로 해외침투 부대를 구성한다. “격렬성”과 “간고성”, “희생성”을 기질로 갖고 있는 20~30만명의 북의 특수부대 요원들이 지금 이 시각에도 격동된 상태에서 명령만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인터넷 규제로 주민통제에 혈안이 된 미쿡사회
미쿡의 히틀러 패러디. 미쿡 사회는 인터넷 규제법률중 하나인 SOPA 법안으로 조지 오웰이 예언한 거대한 동물농장이 되었다. 경제는 변기통에 빠졌고, 미쿡 사회는 갈수록 주민 감시와 통제의 경찰국가가 되었다. 세계 최대의 사이트인 구글은 물론이며 페이스북, 유튜브, 트위터조차도 저작권침해의 불법회사가 되 버렸다. 미쿡인들은 정보 공유는 물론 표현의 자유마저 박탈당했다. 오바마 정부는 미쿡 최대 자료공유 사이트인 '메가업로드'를 강제 폐쇄시켰고, 회사 책임자들을 체포했다. 시리아, 이란, 중국을 인터넷 규제 국가로 비난한 오바마행정부는 더 악랄한 짓을 서슴치 않고 자행하고 있다. 이런 패러디도 저작권침해 이유로 불법이며, 패러디 물이 올려진 사이트도 역시 불법으로 간주된다.
"미국이 공산주의가 된다니…도대체 왜?"| 기사입력 2012-01-22 13:54 | 최종수정 2012-01-22 14:48
공산주의가 아니라 [파쑈주의]가 정답임. 공산주의는 아무나 하나? 간나 새끼들.영화 '소셜네트워크'를 패러디한 게시물.
'미국공산주의연방'에 오신걸 환영합니다/美 누리꾼 SOPA 반대 게시글 봇물 미국의 SOPA(stop online piravy act, 온라인 도용방지법안)에 대한 현지 누리꾼들의 저항이 거세다. 해당 법안이 통과되면 온라인 저작권 규제가 강화돼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다.합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영화, 드라마, 방송, 음악 콘텐츠를 이용한 UCC 등 재생산 저작물도 만들수 없다. 물론 그간 합법적으로 운영돼 왔던 자료 공유 사이트 등도 하루아침에 폐쇄될수도 있다. 본보기 예였던 걸까? 지난 19일 (현지시각) 미국 최대의 자료공유 사이트 '메가업로드'가 폐쇄되고 대표 운영진이 구속됐다.온라인세상의 자유를 완전히 뺏길수 있다는 절박감에 누리꾼들은 "SOPA는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외치고 있다. SOPA를 비꼬는 패러디물도 인기다.
누리꾼들의 가장 큰 반발의식은 바로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지난해 SOPA법안을 발의한 텍사스 하원 의원 라마 스미스의 얼굴을 소재로 영화 소셜네트워크의 포스터를 패러디한 게시물이 대표적이다.라마 스미스의 얼굴위에는 "이 이미지를 사용하면 얼마나 오래 감옥에서 썩어야할까"라고 써있다. 사소한 사진도 함부로 사용못하는 SOPA의 맹점을 비꼰 것이다.인기 만화영화 심슨가족의 이미지를 사용해 "호머심슨 그림을 사용했으니 이제 5년뒤에 감방에서 나와서 봅시다"란 게시물도 있다. 구속이 구체적인 형벌로 나타날까 봐 두려워하는 누리꾼들의 심리를 보여준다고 하겠다.미국이 더이상 자유민주주의를 대표하는 국가가 아니게 됨을 경계하는 게시물도 눈에 띈다.미국 국기에 별 대신 구 소련 국기에 그려져 있던 호미와 낫을 그려넣은 게시물 그림, 미국이 민주국가에서 제외된 것으로 표시된 세계지도도 눈에 띈다.
한편 미국의 누리꾼에게 인기 있는 여러 사이트들의 집단적인 움직임도 가시화되고 있다. 단기간 사이트 폐쇄는 미 정부에 대한 저항감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신흥 온라인 커뮤니티 레드잇닷컴과 지식백과사전 위키피디아, 마이클 무어 감독의 홈페이지가 잇따라 24시간 폐쇄를 감행했다.IT 전문 언론매체인 씨넷 역시 지난 18일 하룻동안 사이트를 폐쇄하고 온라인상의 자유를 되찾자는 메시지를 대문화면에 띄웠다. 미국 누리꾼들은 씨넷이 24시간 폐쇄를 단행하자 "마침내(finally) 언론마저 우리 편을 들기 시작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